[기고] 박경훈(화가·제주전통문화연구소장) "오히려 제주돌담이 세계유산 지정 빠를 수 있어"

▲ 눈 묻은 겨울의 밭담의 아름다움 ⓒ 강정효 사진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ee, 이하 WHC)는 필리핀의 코르디레라스 다랭이논(Rice Terraces of the Pilippine Cordilleras)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이곳은 2000년 동안 높은 산간에서 벼농사의 등고선 경작(일명 다랭이논으로 산 중턱을 따라서 고랑이나 논둑을 만들고 벼를 재배하는)을 해 오는 곳으로 논둑을 이어 놓으면 그 길이가 자그마치 지구 반 바퀴에 해당하는 22,400㎞에 달한다고 한다.

이러한 농업지식과 신성한 전통, 공동체적 균형이 전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계속 전승되었고,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면서 자연과의 보존을 아우르는 조화로움이 표현된 아름답고 경이로운 경관을 형성해왔다.

유네스코는 이 필리핀의 코르디레라스 다랭이논을 인간과 환경 사이의 정복과 조화가 잘 표현된 위대한 아름다움을 인정해‘문화적 경관’제1호 세계 유산으로 지정한 것이다.

▲ 필리핀의 라이스 테라스(Rice Terraces)로 불리는 일명 '다랭이논'은 1995년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필리핀 '다랭이논'

우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하면 으레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국의 ‘만리장성’이나,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또는 국내의 ‘종묘’나 ‘수원 화성’같은 거대하고 국가적이거나 빼어난 것만을 떠올릴 것이다.

▲ 꽃길이 아름다운 애월 광령 사라마을의 어느 올레.
그러나 유네스코가 규정하는 세계문화유산은 유적, 건축물, 장소 세 가지 분야의 ‘탁월한 보편적인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지니는 유산을 말한다.

WHC는 세계유산을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으로 크게 이분하여 세계유산을 보호해왔다. 그러나 이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강하여 다양한 인류문화유산을 포괄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1972년 세계유산보호협약은‘인류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인류의 문화 및 자연유산보호’를 보호유산의 개념 안에 담았고, 이 협약은 그 동안의 이분법적 사고를 통합하는 데 기여한 국제협약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통합적 유산 가치에 대한 변화의 시도는 1992년 열린 WHC 제16차 총회가 ‘문화경관(cultural landscape)’개념을 도입하고“특정유산 형태의 등재 지침서”를 개정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지침서는 문화경관을 3가지 유형으로 구성하고 이 항목에 부합되는 유산 중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유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 3가지 유형은 정원이나 공원 등 심미적 가치를 보유한 인공조성 경관(Clearly defined landscape), 사회·경제·정치·종교적 함의를 지니면서 자연환경과 결합되거나 반응하여 발전된 경관인 진화 경관(Organically evolved landscape), 그리고 주로 자연환경에 반응한 문화적 결합체인 결합적 경관(Associative landscape) 등으로 제시하고, 문화적 경관이 갖고 있는 결합적 가치(Associative value), 주민과의 관계, 그리고 생물다양성 보호와 연계해서 유산을 적극적으로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음에 주목했다.

세계문화유산이 되기 위해서는 비교평가 대상이 없는게 더 낮다

세계유산협약은 유산을 크게 3가지, 즉 문화유산, 자연유산, 혼합유산으로 분류하고 ‘문화적 경관(Cultural Landscapes)’을 위의 유산 중 문화유산의 범주로 포함시켰다. 이후 현재까지 문화적 경관에 해당하는 세계 각국의 35곳이 지속적으로 선정되고 있다. 제주의 돌담은 바로 이 문화적 경관으로 세계적인 것이다.

제주특별자치도는 한라산, 거문오름 용암동굴계(거문오름, 벵뒤굴, 만장굴, 김녕굴, 용천동굴, 당처물동굴), 성산일출봉 응회환을 하나의 권역으로 설정하고‘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로 명명하여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 상공에서 내려다 본 제주의 산담 ⓒ 강정효
범도민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국내 최초의 자연유산 등재를 위해 성원을 보내주었다. 지난 10월 제주자연유산지구를 실사한 세계유산위원회 세계자연보존연맹(IUCN)의 폴 리처드 딩월(Paul Richrd Dingwall) 자문관은 특히 “100만 명 서명운동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큰 감명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세계자연유산 등재의 강력한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하와이 등 다른 화산 지대와의 비교평가, 사후 관리방안 등 아직 등재를 위한 절차 등이 남아 있어 세계자연유산 등재를 위한 모든 요소를 갖췄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즉, 이는 유사자산과의 비교를 통해 가장 탁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세계유산이 되기 위해서는 그 자체로 비교평가의 대상이 없는 것일수록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가 높고 등재절차마저 빠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최근 제주특별자치도는 용암동굴과 한라산의 자연유산 등재에 올인 하다 보니, 진정 등재도 빠르고 또한 그 소중함과 세계적 가치가 뒤떨어짐이 없는 ‘흑룡만리’라 불리는 제주의 돌담은 뒷전에 밀려 있는 상황이 안타깝다.

다락밭에서 구불거리며 이어진 밭담, 전 세계에 또 어디 있을까?

필리핀의 다랭이논과 제주의 돌담은 그 자체로 인간이 자연에 적응하면서 창조된 경관이다. 밭을 경작하는 농촌 중에서 우리처럼 빌레왓, 다락밭에서 구불거리며 이어진 돌담경관을 비교할 만한 곳이 전 세계에 어디 있을까?

▲ 남해 다랭이논은 농촌진흥청과 문화재청에 힘입어 2005년 1월 국가지정문화재(명승 제15호)로 지정됐다. 사진은 농협편 방송광고에 등장한 남해 108층 다랭이논.
제주의 밭담은 필리핀의 다랭이논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규모와 경관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이는 특히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의 문화적 경관의 기초적 원칙에 가장 부합되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것이다. 세계유산은 매년 6월 1년에 한 차례씩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서 선정된다.

지금부터라도 제주 돌담(밭담, 산담)의 현황을 전수실태조사하고 이 중 보존이 잘되고 경관적 가치가 큰 지역·장소를 파악하여, 보존대책과 문화유산 등재계획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세계유산등재 점수는 모두 7점이나 대부분 사람이 살지 않는 사적과 기념물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미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는 역사·민속마을 등 문화경관에 속하는 유산들이 세계유산으로 속속 인정되고 있고, 이 새로운 유산개념의 국제적 이해가 전반적으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생활유산(living heritage)은 전무하다. 특히 돌담의 주종인 밭담으로 둘러쳐진 밭은 사계절 경작되는 살아있는 유산인 것이다. 즉, 생활하는 터전이자 세계문화유산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세계유산 등재가 단순히 경관보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농촌의 삶이 가능하게 하는 또 다른 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농촌·해촌은 제주문화의 보루이자 저장고이다. 농촌이 살아야 제주의 문화정체성 역시 온전하게 지속되고 그 뿌리를 보존하고 가꾸어 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화산섬과 용암동굴”이 국내 최초의 자연유산 등재를 내다보고 있다면, 살아 있는 생활유산로서도 국내 초유의 세계문화유산이 되는 진기록이란 또 다른 선물을 제주의 돌담은 우리에게 안겨 줄 것이다.

▲ 구좌읍 동김녕리 속칭 '진슬’의 밭담 전경
제주돌담, 세계인들에게 제주의 삶을 전수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자원

최근 문화재청에서 제주도와 전국의 도서지방의 돌담길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하려다 하가리 주민들의 절대반대에 부딪혀 등록이 유보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하지만 이 문제의 본질은 우리나라의 지정문화제 관리의 제도적인 문제점에서 기인한 것이지 하가리 주민들이 우리의 전통유산의 가치를 몰라서 그렇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음의 기사는 그런 문화재관리제도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하가리 윤태규 리장은 “말방아를 문화재로 지정한 이후 1년에 한 차례 짚이는 것만을 보조할 뿐 반경 300m이내는 모든 행위가 규제되고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하다”면서 “초가집도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한 채는 거의 쓰러져 있는데도 방치되고 있지만 아무런 보수도 하지 못한 채 오히려 마을 주민들의 삶만 가로 막고 있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제주의 소리, 2006년 11월 15일자)

이 보도에서 보듯이 그간의 문화재정책·제도는 결국 문화재는 소중한 것이라는 인식보다는 불편한 무엇이라는 것과 피해의식만 남겨버려 오히려 앞으로 후손들에게 남겨야 할 문화재보존의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뿐이었다.

박물관에 가지 않은 민속유물이나 가옥 등은 민중들의 생활 속에서 전승되어 온 유산이다. 즉 이것들은 사용해야 하고, 부서지면 보수하면서 그 대를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박제화 된 상태에서 유지보수 한 번 제대로 안 해주고, 법령상의 규제만 받아들이라면 어느 누가 이를 받아들이겠는가. 이는 우리나라 문화재정책 전반의 개선책을 내와야 하는 문제이기도 한데, 문화재의 지정은 지정만이 아니라, 그 가치를 인정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한 지정 후에는 그 지정에 따른 불편함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육성책이 따라야 하며, 특히 마을 주민들이 그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지원책도 뒤따라야 한다. 보존의 결과가 주민 삶에 득이 된다면 어느 주민이 마을의 문화유산을 아끼지 않겠는가. 

▲ 제주(애월 어음)에서만 만날 수 있는 속칭 ‘작지왓’의 농부

제주의 돌담유산은 주민들의 삶의 문제와 결부된 '생활유산'

‘제주의 돌담’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의 경우도 등재가치가 있는 돌담유산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생활유산(living heritage)이라는 특질이 있다. 

▲ 사진=강정효

즉, 이에 대한 보존대책은 규제뿐만 아니라 보존의 과정이 정신적으로 자긍심을, 물질적으로 풍요로 주민들에게 돌아가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제주의 돌담은 그 돌담 안에 밭작물을 재배하고 살아가는 농민들의 지속적인 삶이 전제되어야만 그 돌담유산도 지속적으로 관리되고 보존되는 것이다.

진정한 보존은 그곳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주민들의 삶의 문제란 것이 생활유산(living heritage)보존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세계유산 등재조건에는 이러한 지속가능한 보존을 위해 세계유산을 소유(관리)하게 되는 나라는 새로운 도시계획 수립 등의 대규모 개발을 도모할 때는 세계유산의 보호·보존을 배려할 의무가 있다.

 등재유산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유산의 가치를 전파하는 교육활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국가적으로도 대 국민교육이 행해 져야 하는 것이다. 세계유산기금(WHF)이나 국내의 조성된 보존기금 등을 통해 정기적이고 지속적인 관리와 수복(修復)을 행해야 한다.

세계유산으로 인정받고 등재시킨다는 것은 기실 그 유산에 대해 더욱 각별하게 보호·보존하겠다는 세계와의 약속이 본질인 것이다. 그러므로 등재 시키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존을 위한 대장정이 시작된다는 점을 분명히 깨달을 필요가 있다. 행여 유산으로 등재되면 관광객이 40~50% 많아 질 것이라는 등재효과에만 눈이 가면 안 될 일이다.

▲ 필리핀의 라이스테라스는 한국의 다랭이논과 흡사하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의 본질은 "인간의 삶을 기억하자는 것"

지금 제주는 지역사회와 자연환경 모두 변화의 격랑 속에 있다. 특히 우리의 경관은 그동안 난개발에 의해 부단히 파괴된 결과, 바람섬의 경관과 스카이라인은 사라진 지 오래다. 최근 한미FTA 등을 통해 보듯이 농업의 미래도 밝지 않다. 그 흔한 뜬 땅에 한 뼘 자투리마저 담을 둘러 농사를 지어온 고난에 찬 생의 바람막이었던 돌담을 볼 수 있는 날도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늦었다고 판단할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다.

▲ 박경훈 제주전통문화연구소장
유네스코 문화유산은 특별한 것만을 기념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 본질적 취지는 인간의 삶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특히 ‘문화적 경관’은 환경에 적응한 인간과 자연이 어떤 관계를 맺었고, 어떻게 공존해왔는가를 기억하자는 의미가 더 큰 것이다.

그 취지에 의하더라도, 우리는 제주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 한 뼘 땅을 일구어 제주의 삶의 흔적과 그 기억을 존재 그 자체로 웅변하는 돌담의 보존을 통해, 자연과 공존해온 제주인의 삶을 후대들에게 세계인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제주특별자치도의 ‘특별한’ 일이 될 것이다. / 박경훈(화가/제주전통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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