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폭력에 대한 '조선일보'의 우려, 격에 맞지 않다

며칠전 10대 여중생들이 동료 여학생을 집단 폭행하는 장면이 담긴 동영상으로 인터넷에 유포되어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하였다. 영상에는 10대 여학생들 네 명이 한 여학생을 방안에 감금시켜놓고 번갈아가며 폭행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들 가해학생들은 피해학생이 계속해서 '잘못했다', '미안하다'고 사정하는데도 피해 학생에 대한 폭행을 지속했다. 가해 학생들은 피해학생에 대해 일말의 측은지심도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동영상의 파장이 일파만파(一波萬波)로 확산되자 경찰이 급기야 수사에 나섰고, 붙잡힌 가해학생들에 대해서는 사법부의 처벌로 이어질 전망이라고 한다. 경찰 조사도중 이루어진 언론의 인터뷰에서 가해 학생들은 '이전에 이 비슷한 사건이 있을 때는 아무 일도 없이 넘어 갔다'고 말했다는 것을 보면 가해학생들은 자신들이 처벌받는 이유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운이 나빴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군사독재시절 고문이 떠오르는 폭력 동영상

사건이 이쯤 되자 방송과 신문은 각종 데이터를 들먹거리며, 청소년 범죄의 위험성에 우려를 나타냈다.

<조선일보>는 24일자 신문 칼럼을 통해 10대 청소년들이 어떻게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을 동영상을 촬영하고, 자랑삼아 친구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지 놀랐다고 했다. 그리고 피해학생이 해당 학교로 전학 온 이후 친구들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몇 차례 교사들에게 호소를 해 보았지만 교사들로부터 아무런 보호도 받을 수 없었다는 점을 근거로, '학교의 무관심이 학원폭력을 키웠다'고 지적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언론의 표현대로 피해학생은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하고, 자살을 하는가 하면 전학을 가기도 하는데, 가해학생은 아무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것이 옳기나 한 일인가? 학교 폭력에 대한 학교측의 대응방식이 너무나 미약다는 지적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청소년 폭력문제에 대해 놀라움과 우려를 표하는 조선일보의 지적에는 어찌 어색함이 느껴진다.

다시 문제의 동영상으로 돌아가 보자.

처음에 4명의 여학생이 재미삼아 한 명의 여학생의 뺨과 머리를 때리면서, 도중에 '맞는 너보다 때리는 내 손이 더 아프다'는 말을 내뱉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들의 폭력에 굴복해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피해 여학생에 대해 일말의 미안함이나 가련함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필자는 문득 '고문을 하는 사람들은 고문을 마치 유희를 하듯 했으며, 고문하는 사람은 고문당하는 사람보다 더 인간성이 파괴되어 갔다'는 김근태의 수기를 연상하게 되었다.

과거 군사독재의 폭력에 의한 인간성 파괴가 공공연히 이루어지던 시절 조선일보는 폭력과 인간성 파괴에 한 번이라도 정면으로 도전해 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을 뿐이다.

문제의 동영상 끝 부분에는 가해 학생들이 피해학생의 상의를 강제로 벗기려고 했고, 그 와중에 피해 학생은 '제발 옷을 벗기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지만, 그런 가해 학생들은 그 애원에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이 역시 1986년 경기도 부천서에서 문귀동이라는 고문경관에 의해 권인숙씨에게 자행되었던 성고문사건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한 대목이다. 당시 부천 성고문사건에 대한 고발장에서 권인숙씨는 '문귀동이 손으로 그녀의 음부를 만지고 자신의 성기를 꺼내 그녀의 음부에 대어 수회 비비는 등 추행했다'고 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일보는 '성기를 고문의 도구'로 사용했던 만행의 피해자를  '성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하는 용공분자'로 둔갑시켜 보도하기까지 했다. 조선일보가 이 사건에 대해 권인숙씨에게 사과라도 했는지, 자신들의 비굴함에 대해 진심어린 반성이라도 한 적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권인숙 성고문사건에 '성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하는 용공분자'라던 <조선>

조선일보는 사회가 빠르게 발전하고, 민주화가 눈부시게 진행되는 시대에 폭력이 사회문제로 등장하게 된 것이 학교 선생님들이 그 책임을 다하지 않아서 청소년들만이 야만을 물려받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 하다.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내안의 유전자가 나를 지배하며 나라는 개체는 유전자의 명령을 받는 생존기계일 뿐'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개체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이지만, 유전자는 생식과 그 결과인 자손들을 통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킨스의 시각을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각종 폭력에 대응시켜 보면, 폭력 역시 유전자를 통해 영생을 시도할 것이고, 자신의 형질을 잘 보존해주고 후대에 전달해 줄 개체를 선택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우리 정가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사건들을 되집어 보면, 폭력 유전자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선택한 '생존기계'가 한나라당이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멀리 2004년 김태환 의원이 골프장에서 접대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60대 종업원을 폭행한 사건은 세월이 지나 묻어두기로 하더라도, 곽성문 의원 대한 맥주병 투척사건이나 박계동 의원의 맥주 투척사건을 필두로 한나라당 발 폭력사건은 올 한해만도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권위주의 시절 국가폭력 묵인한 <조선>, 이제와서...

이런 한나라당발  폭력 사건은 술을 마시면 더욱 더 그 진가를 발휘했다. 최연희 의원이 여기자를 성추행한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박계동 의원이 술집에서 여종업원으로 보이는 여성의 가슴을 만지는 장면이 동영상을 통해 공개되었다.

그리고 지방선거가 끝난 이후에 언론에 의해 공개된 내용에 따르면, 올(2006년) 1월 충북지역 당직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여성 당직자들에게 옷 벗기를 강요해 전 여성들이 상의를 전부 벗거나 혹은 내의만 입고 술파티를 열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수치심에 의해 옷 벗기를 거부하는 여성들은 강제로 옷을 벗기기 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불과 며칠전에는 한나라당의 당원협의회장이 강간미수혐의로 붇잡혀 그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되기도 했다. 과거 그들의 옛 조상의 영화를 잘 기억하는 폭력 유전자는 한나라당의 체내에 잠복해 있다가  가끔 무의식 적으로 자신의 형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학교 폭력은 당연히 근절되어하다는 주장에는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가장 폭력적인 집단인 한나라당을  비호하는 언론이 우리 청소년 폭력의 문제를 걱정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 어찌 앞뒤가 맞이 않아 보인다.

 조선일보가 진정 이 사회에서 폭력이 사라지기를 갈망한다면, 부당한 정치권력의 폭력에 부역했던 자신들의 과거를 반성하고, 폭력 유전자의 생존기계인 한나라당과의 부당한 유착을 스스로 근절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회 기득권층의 폭력에 일관되게 저항할 때만이 폭력에 대한 그들의 우려와 비판이 정당성을 얻을 것이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