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김영란 제주특별자치도 여성정책특별보좌관

▲ 제주출신 의녀 김만덕
돈이라는 단어는 '많은 사람의 손을 거처 돌고 돈다'라는 말에서 유래 되었다. 그래서 중국이나 일본에는 '돈은 날개가 없어도 날고, 발이 없어도 달린다'고 한다.

그렇게 돌고 도는 돈에 인생을 건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돈, 돈 하는 이유는 가장 기본적인 지불수단뿐만 아니라 어떤 물건 가치를 화폐단위로 통일해 표시하면 아주 편리한 가치척도의 수단으로도 매우 요긴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이 소유한 어떤 것도 화폐로 바꿔서 보관할 수 있는 가치 저장수단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도로 자본주의가 발전한 오늘날 실물 화폐 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전자화폐가 개발·보급되고 있다.

지난해말 그동안 고액권을 만들 수 없다던 재정경제부가 갑자기 고액권 제작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발표함으로써 고액권 제작은 급물살을 타고 있다. 화폐제작의 결정권한을 재정경제부가 갖고 있기 때문에 일부 언론에서는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을 거론하면서 빠르게 소식을 전했다.

그러면 의녀 김만덕의 후예인 제주도민은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나라 화폐는 광복이후 78종이 발행되었고 남성은 무려 서른 아홉 번이나 등장했지만 여성은 단 한번도 실린 적이 없다. 1원짜리 무궁화를 시작으로 거북선, 다보탑, 벼이삭, 이순신, 학, 이황, 이이, 세종대왕에 이르기까지 온통 이씨 집안 남성 어르신들뿐이다.

▲ '여성인물을 화폐에! 시민연대' 대표로 김만덕 초상을 화폐 도안으로 사용하자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김경애 동덕여대 교수.
잠깐 생각해봐도 여성인물이 학이나 벼 이삭 보다 못하고 가치가 없어서 화폐에 실리지 못한 것은 아닐 것이다. 더 더욱 훌륭한 역사속의 여성인물이 존재하지 않아서도 아닐 것이다. 다만 1975년 이후로 화폐를 바꾸지 않았고, 그동안 성 평등에 대한 의식이 높아짐으로써 다양한 영역에 여성의 소외성을 발견하고 해소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로 '화폐에 여성인물을 넣자'는 운동을 여성계는 2004년부터 시작하고 있다. 이 단체에서는 우리의 자부심인 만덕할머니를 고액 화폐를 만들 때 후보자가 되어야 한다고 오랫동안 외쳐왔다. 그러나 정작 이분의 고향인 제주에서는 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김만덕 알리기'에 몇 년째 사업 중심이 실려 온 게 전부이다.

신사임당을 추모하는 지역민과 여성단체는 탄생 500주년을 맞았던 2004년 4월에 이미 서울 등지에서 신사임당을 새 화폐의 모델로 삼자는 가두캠페인을 벌이고 당위성을 한국은행에 제출하며 몇 년째 지속적인 운동을 전국적으로 벌이고 있다. 그런데도 정작 제주도민은 무관심한 채, 서울에서 단체들이 만덕할머니가 새 화폐모델이 되어야한다며 분위기를 상승시키고 있고, 우리는 제주여성이 상을 탈 기회가 줄어든다며 만덕상의 전국화를 반대하다가 작년에야 전국적으로 만덕여성 경제인 상과 봉사상을 나누어 수상하게 되었다. 늦었지만 이제서야 의녀 김만덕의 화폐화의 전국화가 한발 내디딘 셈이다.

화폐에 여성을 등장시키려는 것은 화폐도안이 갖는 상징성 때문이다. 세계 각국이 화폐에 그 나라가 내세우고 싶어 하는 인물이나 사물을 그려 넣음으로써 화폐의 권위를 돋보이게 하고 이를 통해 국가적 자부심을 보이거나 지향하는 바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일례로 대만은 2007년 7월부터 새로 발행하고 있는 1000NT(New Taiwan)달러 지폐의 앞면에 '지구본을 보면서 공부하는 아이들 모습'으로 대체함으로써 '미래를 꿈꾸는 대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 의녀 김만덕을 인물로 한 가상 10만원권 화폐
현재 여성을 화폐에 등재된 나라는 수없이 많다. 중국 2각짜리 지폐에 조선족 여성, 일본은 5000엔 지폐에 여성소설가 히구치 이치요, 프랑스 마리 퀴리, 영국 엘리자베스 2세, 호주 넬리멜바, 미국 수전 앤서니 여성운동가, 이탈리아 몬테소리 등등 여성은 여왕에서부터 의학자, 음악가, 여성 활동가까지 다양한 여성들이 등재되어 있다.

우리나라가 OECD 가입국이며 세계경제 11위임에도 불구하고 늘 여성권한 척도가 60위 정도에 머무는 이유는 유교 문화권의 가부장적 한국 사회구조가 모든 영역에서 성 평등을 실현하는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제주도민은 두 가지 영역의 활동을 전국적으로 벌여나가야 한다.

우선, 여성이 화폐에 등재되어야 하는 이유를 양성평등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반드시 이루어 져야하는 진정한 평등의 첫 걸음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하며, 전 도민의 공감대 형성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둘째는 등재되어야하는 여성 인물 첫 번째에 '의녀 김만덕'을 인구에 회자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녀 김만덕'이 단지 제주 여성이어서가 아니다. 제주도 인구수 감소를 막기 위해 출륙 금지령이 내린 200년 동안 자신이 처한 최악의 조건을 스스로 최선을 다하여 극복하고, 여성으로서 가장 살기 힘들었던 조선시대에 최초의 여성 거상으로 자리매김하여 축적한 재산 전부를 흉년에 굶어 죽어가는 도민들을 위해 썼다는 것은 우리 역사상 보기 힘든 나눔의 실천이요, 돈을 어떻게 써야하는지를 몸소 보여준 실천의 극치이다.

   
 
 
평상시 '재물을 잘 쓰는 자는 밥 한 그릇으로도 굶주린 사람의 인명을 구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썩은 흙과 같다' 는 의녀의 사상은 부의 축적보다 분배에 뛰어난 사고를 갖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 어려운 18~19세기에 독신 여성으로 사회·경제체제를 이해하고 시장경제를 꿰뚫어서 유통업에 참여해 거상이 된, 진취적이고 적극적이며, 역동적이면서 독립적인 삶을 삶으로써, 21세기가 지향하는 여성성을 이미 300여 년 전에 실천한 김만덕이야말로 미래를 살아갈 모든 젊은이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당당히 새 화폐 모델로 '의녀 김만덕'을 추천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지자체뿐만 아니라 지역사회단체, 재경도민회 등이 의녀의 삶을 알리는데 적극적이어야 하며, 의녀가 행한 나눔의 사상과 삶의 행적을 높이 평가받도록 하여 단순한 지역인물로 축소되지 않고 대한민국 21세기 여성들이 지향해야하는 삶의 모습이자 실천자로 돋보이도록 해야 한다.

2007년 정해년이 시작됐다.

남편 보필과 자녀 키우기에 평생을 바친 양반가의 마님보다는 주체적인 생을 살면서 선행과 나눔을 실천한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조 '의녀 김만덕'이 존재했음을 자랑으로 여기고 이를 알리기 위해 당당히 제주도민은 뛰어야 할 것이다.

"새 화폐에 김만덕 얼굴이 새겨질 때 까지"

[ 김영란 제주특별자치도 여성정책특별보좌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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