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로 다가온 제주의 꽃들(35)
죽음과 삶의 경계라는 것은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하루하루의 삶이 주는 삶의 무게가 만만치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동안 시골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자연과 벗하여 살면서 차분하게 가라앉혔던 속내에서 나도 모르게 쌍말이 튀어나옵니다.
제가 꽃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동네에 퍼지면서 한달 전에 누군가 화단에 자주달개비를 심어놓고 가셨습니다. 늘 곁에 두고 싶은 꽃이었지만 몇 포기 나누어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화원에 들러서 두어 뿌리 사다 심을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거의 뿌리부분만 남기고 윗 부분은 모두 잘린 채 심겨져 있는 자주달개비를 보면서 내년에는 우리 집 화단에서도 자주달개비를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새순이 쑥쑥 올라오더니 내년이 아니라 올해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뽑히고 잘린 아픔을 뒤로하고 옮겨진 땅에 뿌리를 내려 마침내 꽃을 피운 자주달개비를 보면서 생명의 강인함을 보게 됩니다.
성서에 '한 생명은 온 천하보다도 귀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서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한 생명의 무게는 온 천하보다도 무거운 법인데 국익이라는 명목 하에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이 자주국가, 독립국가,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웃기는 소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정말 자주국가인지, 독립국가인지, 민주국가인지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분노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니 부끄럽기만 합니다.
죽음 앞에서 조의를 표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일진데 정치적인 당리당략으로 이용하고, 유산다툼이나 한다면 망자들을 또다시 죽이는 일이겠지요. 그런데 서슴없이 두 번 죽이는 일을 지행하고 있는 현실이니 구역질이 납니다.
뽑히고 잘리워도 다시 새순을 내고, 꽃을 피운 달개비의 생명력에서 희망을 보아야 하겠지요?
마디마디마다에 생명을 안고 있는 달개비.
경이로움을 느끼게 하는 생명력에 비하면 우리 사람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모르겠습니다.
죽었는 줄 알았는데 죽지 않았구나.
제가 장례를 치를 때마다 유족들에게 전하는 위로의 말이 있습니다.
'고인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면 기뻐하실까, 그것을 생각하고 사십시오. 그것이 고인의 아름다운 삶을 나누어 사는 것입니다.'
마디마디마다 생명을 품고 있구나
그 끈질긴 생명
그 끈질긴 희망
우리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는지
모든 것이 끝났다고 할 때에도
'아직 끝나지 않았어!'
소리치듯 너의 몸에서 솟구쳐 오르는
그 하얀 실뿌리들을
우리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는지
[ 자작시 - 달개비 ]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아픔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김선일씨의 영전과 불의의 사고로 운명을 달리하신 할머님의 영정에 달개비꽃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