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새미의 '오, 마이 좃'..."공허한 구호를 거둬내자"

- 영새미의 코미디

영새미(김영삼을 경상도식 발음으로 패러디한 것이다) 대통령이 미국엘 갔다.
대통령이 'DANGER'이란 표지판을 보고 '단거'라고 읽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비서가 "각하, '단거'가 아니고 '데인저'입니다. 저 G는 'ㄱ'으로 발음하는 것이 아니고 'ㅈ'으로 발음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Oh, My God'을 '오, 마이 좃'이라고 읽었다.

이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미 색이 바래고도 바랜 얘기다. 그런데 왜 한 물 간 얘기를 끄집어내는가? 이 우스갯소리에 얽힌 내막을, 그 내막이란 것이 도무지 말도 안되는 코미디 같은 일인데, 그것을 지금 되씹어 볼 이유가 있어서이다. 그 내막이란 게 이렇다.

지금은 듣기에도 진부한 '세계화'라는 말이 대한민국의 국정 목표로 등장한 것은 1994년 11월. 그것도 김영삼대통령은 외유 중에, 향후 국정의 가장 중요한 목표를 '세계화'라고 천명했다. 소위 '시드니 선언'에서였다.

그 날 이후 '세계화'라는 개념은 한국 땅에서 '떠오르는 별'이 되어 온갖 정치적 영토와 지적 영토를 장식했고, 급기야 그것만이 한국의 살길인 것처럼 지역마다 '세계화'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잘난 지식인들은, 좋게 말하면 '나름대로', 약간 꼬아서 말하면 '제 멋대로 짜맞추어' 세계화의 개념 정립을 했다. 그 요지는 "세계중심국가를 이루기 위한 발전전략이며, 신한국을 만들기 위한 전략"이라는 것이다.

세계화, 즉 globalization이라는 용어는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당시에 영어공식문서에는 globalization이 아니라 segyehwa라고 표기하는 소동이 벌어진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는 발음도 유창하게 '글로벌리제이션'이라는 영어를 '세계화'로 이해하는데, 정작 영어권에 보내는 문서에는 '글로벌리제이션' 대신에 '세계화'를 발음 그대로 알파벳으로 썼다는 사실 말이다.

왜 그랬을까? 당시 김영삼정권이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던 의미는 도외시한 채 그저 말의 껍데기만 차용하는 장난질을 쳤기 때문이다. '세계화'라는 것,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국민국가가 세계화한다는 것은 국민국가의 경계를, 그 담장을 허문다는 말이다. 시장개방이라는 말이 세계화라는 동전의 뒷면이 되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김영삼정부가 세계화를 떠들어대니, 세계시장에서는 한국시장이 몽땅 빗장을 풀어 제치는 줄 알고, 이런저런 문의들을 해댔던 것이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정부는 부랴부랴 'globalization'을 'segyehwa'로 대체했던 것이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참으로 한 편의 코메디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국제사회에서 우스갯거리가 될 짓을 하고서도, 우리의 정부나 이 땅의 지식인들은 '세계화'가 초래할 암울한 상황에 대한 진지한 고려는 하지 않았다. 지금에야 세계화 이데올로기를, 그 은폐된 이면의 논리를 고려하여 진지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지금까지도 세계화는 여전히 스타급의 용어이고, 여전히 'DANGER'를 '단거'라고 읽는 것같이 세계화라는 용어를 써먹고 있다.

결국 영어 발음으로 대통령을 조롱거리를 삼은 그 개그는 진상도 모르면서 최신 용어를 차용한 김영삼 대통령을 비꼰 셈이다. 우리 경제의 목줄을 죄는 '위험'인 줄 모르고 '단거'(경상도 사투리로 '달콤한 것'이라는 말이다)로 왜곡시킨 대통령을 한껏 조롱한 것이다.

- 공허한 구호들이 넘치는 나라

'세계화'가 약소국에 지나지 않는 한국이 세계의 중심으로 도약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은 그 말이 말해지는 배경을 조금만 성찰하면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아직도 세계화라는 말이 긍정적인 슬로건으로 등장하는 이 땅의 분위기는 도대체 뭔가? 인터넷에는 '한의학과 동양철학의 세계화', '김치의 세계화'등의 사이트들이 있다. 김치나 동양철학을 세계화하겠다는 기획과 의지가 잘못된 것일 수는 없다.

문제는 우리가 '세계화'라는 말을 마치 우리가 주권을 쥐고 있는 것처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동안에, 세계화전략을 구사하는 세계권력에게 우리가 휘둘리고 있는 현실을 망각하게 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세계화'라는 말의 껍데기를 제 옷처럼 우리가 둘러쓰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정작 그 말속에 숨겨져 말해지고 있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하기야 정치 코메디는 '세계화'사건만이 아니다. 경제대통령이라는 이미지로 화려하게 입성한 김대중 대통령도 크게 한 건(?) 했다.

그는 취임 초기에 시장경제원리에 입각하여 빈사의 한국경제를 살리겠다는 포부를 밝히면서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를 자주 차용했다. 그런데 일년 여만에 '한국형 제 3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우리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천명했다. 그러자 이 땅의 언론들은 일제히 '한국형 제 3의 길'을 헤드라인으로 삼았다. '제 3의 길'이란 영국의 사회이론가인 앤서니 기든스가 1998년에 쓴 책이고, 그 책의 핵심은 좌파의 사회민주주의와 우파의 신자유주의를 지양하여, 변화된 사회에 조응하는 새로운 국가 경영 이념의 제시이다. 간단히 말하면 신중도노선을 표방하는 정치철학이다.

그렇다면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일년 여만에 국가정책 기조를 큰 폭으로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이 또한 웃기는 일 아닌가? 국가정책은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라 변할 수 있고, 또 변해야 하지만, 도대체 국가정책 기조가 바뀔 만큼 일년 여만에 우리의 환경이 변화되었는가? 만약 환경이 크게 변화한 것이 아니라면 정부는 출범 당시에 정책기조를 잘못 잡았음을 자인한 꼴이다.

그런데 엄청난 정책기조의 방향선회를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시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었다. 게다가 이런 상황을 진지하게 문제화하는 분위기도 없었다. 다만 가시화된 것은 '제 3의 길'이라는 용어를 발명한 앤서니 기든스가 한국에 초빙되어 왔고, 그를 만나기 위해 정치인들이 줄줄이 줄섰다는 사실이었다.

돌이켜보면 하필 그 때 '제 3의 길'이라는 말이 정책기조로 선정된 것은 그 말이 당시에 세계적으로 '떠오르는 스타'급의 용어였다는 것이고, 정부는 유명스타를 모델로 상품광고 하듯 잘 나가는 '스타' 용어를 차용하여 현란한 말잔치를 벌인 것일 뿐이었다.

우리를 현혹했던, 그리고 지금도 현혹하고 있는 담론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정보화'가 선진국 진입의 티켓인 양 떠들어대면서, 정작 우리가 이뤄낸 것은 지식정보 혹은 정보기술의 선진화가 아니라 인터넷 가입률 세계 1위라는 것이다.

이런 현황이 속 빈 강정이라는 것쯤이야 말해 무엇하랴. 또 '21세기, 문화의 시대'라는 것은 어떤가? 문화의 세기, 문화 강국, 지역문화의 해, 문화상품의 개발 등등 요란한 구호로서 문화를 들먹이는 와중에, 정작 문화는 화폐로 부지런히 교환하지 않으면 안되는 너덜너덜한 걸레쪽이 되고 있다.

사태가 이러니 의미가 텅 빈 말만 무성하고, 유행하는 슬로건과 우리 현실은 겉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거품을 거둬내는 소통의 장을 만들자

우리는 해마다 혹은 달마다 새로운 구호들을 듣는다.
하나의 구호가 뜨고, 그 구호가 유행처럼 번지다가 참신성이 떨어질 즈음에는 다시 새로운 구호를 듣게 된다. 어떤 것들은 반짝 떴다가 잊혀지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구호로서의 생명력을 제법 이어가기도 하는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공허한 구호들(담론이라고 해도 좋고 정치적 슬로건, 이념이라고 해도 좋다)은 이 땅에서만 설쳐대는 것은 아니다. 권력으로 조직화되는 사회에서는 언제나, 어디서나 구호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필자가 이 땅의 정치문화를 걸고넘어지는 것은 이 땅에서 공허한 구호들이 남발되고, 또 그것이 너무 쉽게 먹히기 때문이다.

교육대국인 이 나라에서, 학위로 보증되는 지식이 넘쳐나는 이 땅에서, 텅 빈 의미를 꽉 찬 의미로 착각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말의 의미 혹은 그 진상, 구호의 실천가능성에 대한 고려는 아예 뒷전이고, 경박하게 말잔치를 벌이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너도나도 떠오르는 스타급의 말을 차용하는 꼴이 패션스타일이 유행하는 것 못지 않기 때문이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런가? 왜 우리 사회에서는 일상의 생활공간으로부터 국가정책에 이르기까지 텅 빈 의미들이 이렇듯 횡행하는가?

사실 새로이 만들어지는 말들이 모두 공허한 것만은 아니다. 만약 우리가 그 의미 그리고 말해지고 있는 것의 이면에 숨겨진 진상, 말해지지 않고 있는 것들을 간파한다면, 그것들의 긍정적 의미를 살려내고 얼마든지 창출가능한 현실성으로 바꿀 수도 있다.

우리가 때때로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사회들, 이념과 현실의 간격을 좁혀 가는 사회들은 바로 그러한 실천력을 가진 사회들이다. 단적으로 문화적 저력이 있는 사회이다. 무엇이 문화적 저력인가?
유포되는 말을 다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합리적 사고, 세상을 다각도로 볼 수 있는 비판적인 사고가 문화적 저력이다. 그리하여 서로 다른 의견들 그 다양성이 수용되는 사회, 담론들, 정치적 구호들, 자본의 술책들, 그것들의 힘과 역할, 약점 등을 폭로하는 이들이 있고, 그것이 자유롭게 소통되는 사회가 문화사회이고 시민사회이다.

지금도 다시 새로운 희망의 말들이 유포되고 있다.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라는 말, '투명한 정치'라는 말, '젊은 행정'이라는 말, '국제자유도시'라는 말, '지방분권'이라는 말, 말, 말들이 넘친다. 이런 말들에 현혹되지 않으면서, 말의 의미를 꽉 채울 수 있다면 세상은 좀 통쾌해질 것 아닌가. 통쾌한 세상을 위하여 <제주의 소리>가 공허한 구호들의 거품을 거둬내는 역할을 할 것을 기대한다.

* 이 글은 계간문학지 <다층>에 실린 글을 '통쾌한 세상' 버전으로 고쳐 쓴 것이입니다.
<하순애의 통쾌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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