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의 강령 위에 군림하는 정치인의 유명세

한 때는 밤의 대통령이라 불리었다는 권노갑의 이름이 언론에서 자주 보인다. 긴급체포된 지도 스무날 남짓인데, 그 이름이 자꾸 거론되는 것은 아무래도 그가 연루된 돈의 액수 때문인 모양이다. 이백억원만 해도 놀랄 일인데, +β라 한다. β가 또 얼마만큼의 돈이 될 지 누가 알까.

돈의 액수만 모르는 게 아니다. 사실 우리 같은 소시민은 권노갑을 모른다.

이름 석자나 얼굴이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정치인으로서의 권노갑을 모른다는 얘기다. 정치인이라면 정치적 색깔이 있어야 하는 법, 하지만 그의 색깔을 우리가 어떻게 알 것인가?

그가 모시던 김대중 전대통령이 다섯 번이나 신당을 창당했으니 그도 같이 움직였을 터이지만, 그 많은 당명에서 드러나는 공통된 강령이 무엇인지는 소시민으로서 헷갈릴 따름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이 땅의 정치인이라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걸핏하면 이합집산으로 정당을 만들어댔다는 것이고, 그 중에서 그가 변함없이 김대중씨와 행보를 같이 한 끝에 권력실세 노릇
을 했다는 정도만 알뿐이다.

- 돈이 말을 하는 정치판

그런 그의 별명이 '권보스'란다. 하필이면 조폭을 연상시키는 별명일까?

스스로는 돈이 들어왔다 나가는 '정거장'이라고 했다는데, 보통 정거장이 아니라 중앙역의 역할을 하였던 걸까? 하기야 뇌물수수로 구속된 전력도 그렇고, 또 거액이 들고난 것만 해도 보스의 위엄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보스가 검찰 조사를 받으며, 어떤 생각을 할까?

모르긴 모르되, 자신의 행위를 후회할 것 같지는 않다. 그가 받은 것은 뇌물이 아니라 정치자금이었고, 자신이 돈에 매수된 것이 아니라 정당 발전의 초석이 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돈이 말을 하는 한국의 정치판에서, 돈이 많아질수록 힘이 실리는 한국의 정치풍토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자신의 역할은 불가피하고 또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쯤 그는 후회가 아니라 불운을 탓하고 있을는지 모르겠다. 정치자금거래야 우리 정치사의 공공연한 비밀인데, 또 어느 정치권력도 비밀스런 돈과 결부되지 않은 권력이 없는데, 왜 하필 자기인가라고 말이다.

- 돈을 사용하는 방법이 '검은 돈'을 만든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할 사람이 단지 그 뿐일까? 푼돈이나 잔돈이 오가는 피라미 정치꾼으로부터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유력 정치꾼에 이르기까지 권보스에게 돌을 던질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요컨대 그들에게는 세상에서 말하는 '검은 돈'이란 없다. 돈으로 연결되는 사람들이 있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돈의 흐름이 있을 뿐일 게다. 그들에게 돈은 서로 다른 관계를 하나로 묶어주는 강력한 조건이었을 뿐일 게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도 생각을 달리 했으면 좋겠다. 정치권력이 사정기관을 장악하던 시절이 막을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돈의 본질적인 속성이 비밀성이고 익명성이지만, 일단 들통나면 돈의 모든 장점보다 잃는 것이 더 크다는 것을 실감했으면 좋겠다. 돈으로 사람들을 움직이게 할수록, 더 많은 정치패거리들이 돈 때문에 형성될수록, 정치꾼 노릇이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뒤가 구리게 돈을 긁어모아야 했던 것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치졸한 정당정치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돈에는 본래 색깔이 없지만, 그 돈을 손에 쥔 사람의 사용방법 때문에 '검은 돈'이 된다는 것을 자인했으면 좋겠다. 이 정도만 되어도 우리 사는 세상은 훨씬 통쾌하지 않겠는가!

** 이 글은 한라일보 9월 5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하순애의 통쾌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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