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번에 김정부씨는 물론 제주출신 한통련 인사를 만나게 될 줄은 전혀 예상을 못했었다.

제주, 꼭 이렇게 티를 내야 하나요?

제주지역에서 송두율 교수를 위한 귀국추진위를 만들고 있었으나, 정작 이번에 입국하는 해외민주인사 중 다른 제주출신 인사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뒤늦게 이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확인한 결과 이를 알고서는 - 그것도 재일 한통련 인사 30명 중 거의 1/3에 달하는 8명이 제주출신이라는 것을 - 얼마나 놀라고 미안했는지 모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주출신 송두율 교수 및 해외민주인사 귀국추진위'로 명칭을 만들 걸, 뒤늦게 후회가 앞선다.

그래서 현수막을 만들었지만 명의도 없는 현수막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쩌랴. 혼자라도 인천공항에 마중나갈 밖에...

전날 일본에 있는 김정부씨와 전화통화를 한 터, 일단 어떤 모습인지 단순한 궁금증이 앞선다. 전화 통화를 통해, 2세 출신(나중에 알아보니 3세 였지만)이긴 하지만 한국어를 거의 완벽하게 구사하는 분이라는 것, 매우 차분하면서도 치밀한 성격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짐작할 뿐이다.

공항은 북새통이었다. 환영나온 국내 민주인사들과 신문과 방송 취재진이 뒤엉켜 난장판이다. 혼자 현수막을 갖고 간 터라 같이 들어 줄 사람을 찾지 못해, 취재카메라가 진을 치고 있는 정 중앙 라인에 양면테이프로 붙이기로 했다.

범국민위 집행위원장인 임종인 변호사가 주최측 현수막을 걸어야 할 곳이라면서 양보를 부탁했는데, 사진기자들이 현수막을 들고 서면 취재에 방해가 된다면서 비켜줄 것을 요구해 다행스럽게 현수막은 온전히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나중 얘기지만 임변호사는 이때부터 영 마음이 상한 것 같다. 기독교회관에서 있었던 공식환영 행사가 끝나고 이 현수막을 배경으로 제주출신 인사들만 사진을 찍자, 필자에게 "제주...꼭 이렇게 티를 내야 하나요?" 하면서, 얼굴을 찌푸렸기 때문이다. 혹자는 시샘하듯 '지역감정' 운운하는 분도 있었고... 이런 때는 모른척하는 게 상책이다.

나중에 김정부 씨에게도 들었지만 일본 한통련에서도 제주에서만 연락이 왔다고 타 지역출신들이 부러움 섞인 이야기를 했단다.

인천공항에서 11시경부터 기다림을 시작해 공식기자회견이 끝날 때까지 2시가 넘었으니 꼬박 3시간 동안 공항에서 서있던 셈이다. 그래도 필자는 이런 저런 틈을 보며 밖으로 나와 담배 한 개피라도 피우고 들어가곤 했는데, 최병모 변호사(민변회장)은 공식 대표로서 꽃다발을 들고 꼼짝없이 기다려야 했으니... 겨우 공항행사가 끝나고 나와 담배를 물더니 허리를 잡고 주저앉는다. 오랜만에 보는 터라 반가운 인사와 함께 송두율 교수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주최측이 준비한 전세버스는 2대. 1대는 해외 민주인사들과 주최측을 위한 버스로 보이고 나머지는 환영객들을 위한 버스로 보인다. 미친 척 해외민주인사가 타는 버스에 타, 맨 뒷좌석에 앉았다. 마침 김정부씨가 바로 앞좌석에 앉아 계시기에 옆 좌석에 합석을 권유하여 자연스럽게 얘기를 주고받게 되었다(지나보니 버스인터뷰가 자연스럽고 매우 좋은 것 같다).

한통련과 DJ. 그 애증의 관계

김정부 한통련(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기획실장(54세).

본적이 성산읍 삼달리이며, 이번 행사의 일본측 실무책임자다. 공항에서의 기자회견 중 일문일답도 그가 답변했고,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공식환영회장에서도 유창한 연설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3형제(융사, 창오)가 함께 왔기에 더욱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한 인물. 차분하면서도 냉철한 이미지 그러면서도 부드러움을 함께 겸비한 인물로 보인다.

먼저 김대중과 관련한 질문을 던져 보았다.

"김대중씨에게 섭섭하지 않았나? DJ 정권 때 올 수 있을 것이라 기대가 많았을 텐데..."

질문의 배경을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아래 기사를 인용한다

"한통련은 DJ가 박정희 정권에 의해 납치되고 전두환 군사정권이 사형선고를 내렸을 때 DJ를 죽음에서 구해낸 생명의 은인이었다. 하지만 DJ는 1980년 군사재판 과정에서 이 단체와의 관련을 부인했으며, 대통령이 된 뒤에도 한통련에 대한 이적규정을 철회하지 않아 관련인사들의 입국을 불가능하게 했다. 72년 10월 유신정권 출범 당시 DJ는 일본과 미국에서 반독재민주화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일본에서 한통련의 전신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을 결성, 초대의장으로 내정됐다. 이에 당황한 중앙정보부는 한민통의 결성식을 1주일 앞둔 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사건'을 감행했다. 한민통 회원들은 즉각 '김대중선생 구출대책위원회'를 결성해 구명운동을 벌였고, DJ는 납치된 지 6일만에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왔다. 한민통은 예정대로 8월 15일 결성선언대회를 갖고 정식 출범했다. 이후 한민통를 중심으로 국내외 민주화운동세력이 결집하자 박정희 정권은 78년 재일동포 유학생 김정사를 한민통의 지령을 받은 간첩으로 조작했고, 한민통은 '반국가단체'로 낙인찍혔다...(경향신문. 2003. 9. 20. )"

"솔직히 매우 섭섭했다"

당연한 대답이 아닐 수 없다. 우문(愚問)인 셈이다. 자신의 목숨을 구명하기 위해 그렇게 앞장섰던 동지들을 부인하고, 대통령이 된 뒤에도 이들을 몰라라했던 DJ가 아니던가? 그러면서도 DJ는 오늘 공식환영식장에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 심한 배신감을 느꼈을 만도 한데, 그래도 "몸이 불편하시다니 내일 아침 직접 찾아뵙겠다"고 한다. 나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지만, 많은 절제와 초연함이 몸에 배어 있음을 느낀다.

조국에 버림받은 한통련

많은 이들이 '한통련'에 대해 재일 '조총련'의 외곽 조직으로 보통 이해한다. 재일교포 사회에서 '한통련'은 어떠한 위치에 있을까? 송두율 교수가 스스로를 '경계인'이라 표현했던가? 그러나 송교수는 남도 아니고 북도 아닌 의미의 경계인인데 반해, 이들은 분명 대한민국을 국적으로 표방하고 있다.

그렇다면 분명히 '민단' 소속일 법 한데, 민단은 이들을 극단적으로 부정한다. 민단의 역사(歷史)에는 한통련을 "조총련의 앞잡이로서 민단의 파괴를 도모하기 위해 활동하는 집단"으로 묘사되어 있다. 한국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이제 총련과는 만나면서도, 민단은 아직도 이들을 멀리하고 있단다. '한국에서는 '이적단체'로 낙인찍히고... 민단의 개혁과 한국의 민주화와 조국통일을 위해 노력해 온 이들, 분명 대한민국 국적을 고집하는 이들이 30여 년 넘게 그 조국에게 버림받아 온 것이다.

한번은 이웃에 살고 있는 총련 소속 선생이 제주에 고향방문을 갔다 온 후 김정부씨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자기는 인민공화국 공민(公民)인데도 고향을 방문하고 왔는데, 김선생에게 (한국 국적을 고집하면서도 아직도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있으니) 미안하다고...

민단사회 내부에서도 이렇게 철저히 배척되고 소외돼 온 한통련이지만 앞으로 민단과의 관계변화를 기대한다고 김씨는 말했다.

이번 한국 입국도 공식여권이 아닌 임시여권인 '여행증명서'로 입국했으며, 외국에 나갈 때는 일본 법무성에서 발행한 '재입국허가서'를 발급해 다닌다며, 직접 그것을 꺼내어 보여 주었다.

79년부터 한통련 전임활동 시작

그렇다면 고정부 씨는 언제부터 한통련 활동에 참여했을까?

한통련 산하조직인 '한청'에 73년부터 참여하기 시작한 고씨. 79년에는 한통련의 전신인 '한민통' 전임활동가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 활동무대는 오사카다. 그 이전까지 막노동, 운전사, 조리사 등 온갖 궂은 일을 안 해 본 것이 없다.

이후 89년부터는 동경으로 자리를 옮겨 한통련 본부의 '조직국장'으로 활동해 왔으며, 93년부터 2001년까지 사무총장 직을, 2001년부터 현재까지는 조직의 실무총책이라 할 수 있는 '기획실장'을 맡고 있다. 25년여를 한통련 전임활동가로 근무한 셈이다. 필자도 20여 넘게 이른바 '운동'이란 것을 해왔지만, 그 어려운 일본사회에서 꾸준히 한 조직에서 활동해 온 선생을 보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 뿐이 아니다. 동생인 융사 씨는 오사카본부 부대표로, 창오 씨는 오사카본부 사무국장으로 세 형제 모두 한통련 전임자로 활동하고 있다(한통련의 본부는 동경에 있으나 주력은 오사카다. 막내 동생인 창오씨는 87년 6월 항쟁시 오사카 주재 한국영사관에서 시위를 벌이다 체포돼 보름간 구속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살아계신 어머님(한림읍 출신)이 항상 안타까워 하신단다. 형제 중 한사람이라도 부자가 됐으면 했는데 삼형제가 모두 한통 활동을 하니...

한국인인 것 자체가 싫었던, 심지어 부모님이 한국인이었던 것 자체도 창피해 했던 이들이 70년대 후반 한통련을 만나면서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열성 활동가로 변신한 것이다.

어머니 모시고 반드시 제주 방문하겠다

제주에 대한 이미지는 어떤가 물어 보았다.

부친도 어릴 때 조부와 함께 도일(渡日)하셔서, 제주에 대한 얘기는 주로 할아버지를 통해 많이 들었단다. 외할머니가 해녀일(세화리 출신)을 하셨다 하고, 살아 계신 어머니는 한림읍 출신이다. 조부때 일본에 넘어와서 고향인 삼달리에는 가까운 친척은 없는 듯 하다. 그래도 부친이 살아계실 때는 '삼달리 친목회(재일본)'가 있어 고향사람들과 교류를 가지곤 했었는데, 2세대 이르러서는 그 모임도 단절됐다.

이번에 귀국한 8명의 제주출신 한통련 관계자들도 대부분 이와 상황이 유사하다(당초 필자는 이들 대부분이 4·3시기 도피한 인사들의 2세로 추정했었다). 그래서인지, 제주에 대한 이미지가 거의 없고 이에 따라 고향 제주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들 중 한사람(김창수 씨)만이 제주를 찾는 것이라 추측된다.

그래도 "이후 자유롭게 올 수 있다면" 모친이 살아계실 때 반드시 모시고 제주를 방문하겠다고 얘기한다. 김정부씨는 이번의 귀국이 일회성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는 눈치다. 법무부가 입국규제를 풀었다고 공식발표했지만...

그는 지난 90년 7월 노태우정권 시절 잠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판문점에서 열린 범민족대회 참석차 방문했다가,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2박 3일동안.

노무현정부에 대한 평가

노무현정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는 질문에는 대단히 조심스러우면서도 나름대로의 분명한 시각에서 얘기했다. 노정부는 여중생추모 바람, 즉 남북화해와 미국과 대등한 관계를 원하는 국민들의 힘을 업고 등장한 정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기대도 많다. 최근의 이라크 파병문제도 미국과의 역관계가 바탕에 깔려 있다는 점에서 '국민적 힘'을 배경으로 해결해야한다고 강조한다.

시간이 있었으면 제주출신 8인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으나 공식일정이 너무 빠듯하고, 또한 주변에서 '제주출신만...' 운운하는 따가운 시선이 부담되어 따로 만나지는 못했다.

향후 제주에서 반드시 만나자는 약속만 하고 헤어졌다.

자유로운 고향방문이 이루어져, 소주한잔 나누면서 긴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그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
<이지훈의 쓴소리 단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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