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영자의 교단일기(3)] 스위스의 학교를 가다①

▲ 수업시간
5년 전, 나는 삼십 대에 해야 할 일 중의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 배낭여행을 떠났었다. 언어도 서툴고 지도 보는 법도 익히지 못했으면서, 오로지 '해야 할 일'을 해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감행한 자아실현 프로그램이었다. 네덜란드, 영국,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프랑스를 찍고 돌아오는 여정이었는데, 숙소만 예약하고 도착지에서 가이드북을 들고 물어물어 다녔던 기억이 새롭다.

이번 겨울방학에는 열 분의 선생님들과 함께 한 번 다녀온 적 있는 스위스와 독일로 테마연수를 다녀왔다. 단순 여행이 아니라 유럽의 다문화이해교육 실태를 돌아보고 우리 미래교육의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주제탐구 여행이었다. 

나는 지난 마구잡이식 배낭여행으로부터 5년이란 시간이 흘렀으니, 그만하면 꽤 많이 바뀌어 있으리라 짐작했다. 그런데 나를 맞이한 스위스는 복사해놓은 듯 예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식사를 해결했던 수퍼와 아침에 거닐었던 길들, 호숫가에 나직이 엎드려 있는 집들이 고스란히 그대로였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 들 정도였다.

누군가 여행은 ‘남’을 통해서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라고 했다.
이번의 주제탐구 여행에서도 계획했던 목표의 도달보다는 ‘나’와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었던 점이 소득이라면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며칠 동안 단편적으로 훑어본 것을 전체인 것처럼 확대해석하거나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사례쯤으로 받아들여주기를 바라면서 스위스 학교에서 보고 느낀 몇 가지를 소개하려고 한다. 

왜 우리사회나 우리교육은 선진적인 시스템을 갖지 못하는가? 하는 자기반성과 자기연민, 선진적 시스템이 가능하도록 한 사회구조와 그 구성원들의 의식에 대한 부러움 등은 자칫 자기비하적인 모습으로 비쳐질지도 모르나, 내(우리)가 품었던 씨앗이 성숙된 사회로 가는 자그만 밀알이 되기를 바라는 희망도 가져 본다.

▲ 초등학교 교실
스위스의 학교에 대한 짧은 팁
 
스위스의 학교는 여름방학은 두 달, 겨울방학은 1주나 2주 정도 한다. 여름은 놀기에 좋으니 심신수양과 체력단련, 여행으로 삶을 풍요롭게 하고, 겨울은 추워서 돌아다니기에 불편하므로 방학이 그다지 길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학교가 12월 말에 방학해서 1월 초순에 개학하므로, 다행히 우리가 머무르는 동안 학교방문도 할 수 있었고 아이들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스위스에서는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독일과 인접한 북부지역에서는 학교, 거리의 간판, 공공장소 어디를 가나 독일어 일색이며, 프랑스와 인접한 남부지역에서는 어디를 가나 역시 프랑스어가 사용된다. 같은 스위스에 살고 있어도 취리히에 사는 사람은 독일어로 소통하며, 제네바에 사는 사람들은 프랑스어로 소통한다. 따라서 두 지역의 사람이 만나도 정규교육을 통해 두 언어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의사소통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중에 소수의 사람들은 스위스언어를 사용하고 있고, 독일어나 프랑스어를 사용하더라도 스위스식 독일어, 스위스식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실제로 스위스에서 들었던 독일어와 독일에서 들었던 독일어는 확연히 달랐다.

스위스는 영세중립국이면서도 영어를 쓰는 인구는 그리 많지 않은 듯했다. 고등학교까지 정규교육과정을 마치면 대체로 영어회화가 가능할 정도는 되지만, 공항, 버스 등 대중교통에 종사하는 사람이나 세관업무를 보는 사람이 아니면 굳이 영어를 쓰지 않았다. 학교의 교장 선생님도 영어는 하지만 독일어로 대화하기를 원했다. 학생들도 영어교육에 매진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초등학교 4학년 학생에게 궁금한 게 있어 물어보려고 했지만 영어를 할 수 없다고 도리질을 했다. 우리가 보기엔 영세중립국이고 UN본부 및 국제기구가 모두 들어와 있는 나라가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무사태평이었다. 어디를 가도 북부지역은 독일어로, 남부지역은 프랑스어만이 보일 뿐이다.

한글과 영어, 일본어, 중국어까지 친절하게 써놓는 표지판, 우리말을 배우기 전부터 영어를 배우고 학원까지 다녀야 안심되는 한국은 그야말로 다국적 사회인 셈이다. 나는 가끔 국어도 영어로 몰입교육을 하라고 할까봐 겁날 때가 있다.
  

복도는 왜 넓은가

학교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시야를 메우는 것은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게시판이나 정원, 교장선생님을 필두로 죽 배열해놓은 인물현황판, 그림, 조각품 등이 아닌 ‘넓은 복도’다. 우리 학교 복도 너비의 2배는 족히 됨직한 복도에 고운 햇빛이 스며들어 빈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국의 학교와 달리 교실과 복도 사이에 유리창이 없는 데다, 다른 시설물이 없는 복도를 처음 봤을 땐 불필요하리만치 넓게만 느껴졌다.

▲ 복도의 한쪽
복도 한 켠에는 가지런히 아이들의 외투들이 걸려 있기도 하고, 때로는 복도의 중간 중간에 걸려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옷만을 걸어두기 위해 이 넓은 공간이 필요하진 않을 것이라 생각되어, 서양인들은 체구가 크기 때문일 거라 지레짐작 해버렸다.

그런데 수업을 참관하면서 복도가 넓은 이유를 알았다.

복도는 화장실에 가거나 교실을 이동하는 통로만이 아니라, 교실의 또 다른 개념인 학습공간이며 생활공간이었다. 스위스에서는 초·중·고 어느 학교에 가든지 두 사람이 일문일답으로 이루어지는 문답식 학습방법이 행해지고 있었는데, 복도마다 띄엄띄엄 놓여있는 책상은 아이들이 짝지어 질문하고 답할 때 쓰이고 있었다.

▲ 복도에서 공부하는 아이들
스위스에서 나는 사전 찾기 수업을 진행할 때의 일이 떠올랐다. 5명씩 모둠을 구성하고 선생님이 내준 학습지의 단어와 한자성어, 속담 등을 빨리 찾는 모둠에게 왕사탕 하나씩을 주는 사전찾기대회를 열었다. 모둠원 5명 중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모두 학습지를 해결해야만 하는, 협동학습에 의해 승패가 결정되는 게임이었다.

그런데 책상을 붙이고 머리를 맞대서 모둠별 학습지를 해결하던 아이들이 복도에 나가서 하면 안 되겠냐는 것이었다. 자기네 모둠이 찾아서 설명해주는 것을 옆 모둠이 커닝한다고, 보완유지를 위해서는 나가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흔쾌히 허락했다. 복도에 나간 아이들은 교복이 더러워지는 것도 잊은 채 바닥에 벌렁벌렁 배를 깔고 누워 학습지를 해결하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께서 이 광경을 목격하셨다. 그날 나는 교장 선생님께 쓴 소리를 들었다. ‘복도에 나와서 놀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교사의 자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대충 이런 요지였다.
 
교실이나 도서실만이 아니라 학교 내에 존재하는 모든 공간 즉, 운동장, 복도, 계단, 휴식공간, 나무그늘, 수돗가 등이 모두 학습공간으로 받아들여진다면 공부가 덜 지루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참, 그러고 보니 내가 고등학교 때 무용선생님은 늘 옥상에서 무용을 가르치셨다.

▲ 칠판 앞에서 설명하는 교장선생님
나를 사로잡은 몇 가지 시설

스위스 교실에서 나를 사로잡은 건 칠판이었다.
칠판의 크기는 한국의 학교보다 훨씬 큰데, 단지 하나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칠판 뒤에 또 칠판이 있는 복식 형태였다. 물론 한국에도 이런 칠판이 아주 없지는 않다. 간혹 지도가 그려진 칠판이나 모눈종이 칠판이 더 있어서 양 옆으로 밀어내도록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스위스의 칠판은 놀라웠다. 스위스의 칠판은 한국보다 높게 매달려 있는데, 자동 조절기(리모콘)의 단추를 누르면 얼핏 하나처럼 보이던 칠판 하나가 쓱 내려온다. 선생님은 자기 키 높이에서 판서를 한 후, 다시 버튼을 눌러 아이들이 보기에 편한 위치로 자유롭게 이동시켜 준다. 체구가 큰 서양인들은 어떤 필요성에 의해 이런 칠판을 만들었을까. 슥 소리를 내면서 내려오고 올라가는 칠판 앞에서 나는 전율했다.  
 
백묵 칠판이 화이트보드로 바뀌었다가 다시 물백묵 칠판으로 바뀌거나, 교실의 벽을 허물었다가 다시 쌓는 것만이 선진화가 아니라, 정작 수업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유용한 학습도구나 기자재가 무엇인지 반영된 교실이 선진화된 교단일 터이다. 점점 커가는 아이들에 비해 왜소한 동양 선생님들은 왜 이런 칠판을 고안해내지 못했을까 의아하기만 했다.
 
수용자의 입장에서 편의를 도모한 흔적은 사물함에서도 엿볼 수 있다. 
 

▲ 간편한 사물함
스위스 학교의 사물함은 재봉틀을 꺼내서 일하다가 일이 끝나면 다시 들여놓는 것처럼, 자신의 책상을 들어 올리면 책과 학습도구를 보관하는 사물함이 된다. 커다란 사물함은 독립적이어야 하고 일렬로 늘어서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만 버린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비용이 많이 드는 일도 아닐 듯싶다. 책상과 사물함이 동체여서인지 책상에 칼자국이나 낙서가 되어 있지 않은 점도 눈에 띄었다.
 
교실에 소파와 침대가 있는 것도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저학년이 아닌 초등학교 5학년 교실에 소파와 침대가 놓여 있었다. 학습에 흥미가 떨어진 학생, 잠이 쏟아지는 학생, 학습을 수행했을 때 효과가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 학생들은 침대에서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아이들은 휴식시간에 소파에서 쉬거나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학습 부적응이나 교우관계 등 문제가 있을 때 선생님과 상담하기도 한다.
 
한국의 학교에선 선생님도, 학부모도 용납이 안 될 일들이다. 눈 똑바로 뜨고 열심히 배우고, 다시 학원까지 가서 배워야 마음이 놓이는 세상에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 교실에 있는 소파와 침대

▲ 제네바대학에서 필자(빨간색 모자)와 선생님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