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일보 보도 의미] 학살 최고 책임자 단정은 아직 무리

부산일보가 6일자 1면 기자를 통해 발굴 보도한 '부산·대구 좌익수감자 정부지시 집단학살 확인…50년7월1일 미군허락' 제하의 기사는 한국전행 직후 전국의 교도소에서 자행됐던 수감자 집단학살에 대한 중요한 단초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 기사를 보도한 부산일보 김기진 기자는 1년 동안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1950년 미 군사고문단 기밀문서와 미 대사관 상황보고서, 미군 CIC 활동보고서 등 관련 기록 상당수를 입수, '민간학살 시리즈'로 연재할 예정이다.

부산일보는 지금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던 미 군사고문단 롤링스 에머리치(Rollings S. Emmerich) 중령이 작성한 '1950년 한국전쟁 초기의 역사'란 공식자료를 발굴했고, 이를 토대로 부산·대구 형무소 수감자 집단학살이 한국정부의 지시에 의해 자행됐으며 , 미군사고문단은 ''전황이 악화되면 형무소 문을 열고 기관총으로 모두 사살해도 좋다'는 조건부 허락을 해 결과적으로 한국정부의 집단학살을 승인 또는 묵인한 것으로 확인됐다는 점 역시 처음으로 밝혀진 점이다.

미 군사고문단 "기관총으로 모두 사살해도 좋다"허락 사실 처음으로 공개

또 지금까지는 형무소에서 작성한 '재소자 통계보고철' 또는 '재소자연원일표'에서 재소자 인원일 7월에 갑자기 줄어들어 이 시기에 제주출신 4.3관련자와 보도연맹원 수감자가 학살됐을 것으로 추정됐을 뿐 '한국정부의 지시로 7월1일 대전형무소 수감자가 학살됐다'는 보고서가 발견된 사실, 또 '보도연맹원 700명이 희생당했다'고 구체적인 인원을 표기한 것도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되는 사실이다. 

하지만 부산일보가 이날 보도한 '1950년 한국전쟁 초기의 역사'란 자료의 구체적인 내용이 아직 완전히 보도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제주4.3관련 보도연맹 재소자를 포함한 수천명의 인명을 빼앗아간 집단학살의 책임이 과연 어느 선까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제주출신 보도연맹원 700명 희생당했다는 구체적 표기도 이번이 처음

다만 하루에 재소자 1500명씩 처형할 계획을 세웠다는 국군3사단 23연대장 김종원이 비록 관할 구역이 경남지역에 한정돼 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이에 대해 김기진 기자는 "1950년7월이라는 시점이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남한측이 밀리면서 우리 군이 관할할 수 있는 지역이 부산과 대구 등 영남권 밖에 없었다는 점을 볼 때 김종원의 영향력은 사실상 남한 전체로 봐도 될 것 같다"면서 "특히 김종원 연대장이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처럼 총애를 받아왔다는 점도 중요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부산일보가 이날 보도한 내용 중 보도연맹에 가입한 제주도민이 2만7000명에 달한다는 점, 부산과 대구 교도소에 수감중인 4.3관련 재소자 상당수가 학살당했다는 점은, 그리고 학살지휘계통에 정부가 진·간접적으로 개입했다는 증언 역시 일부는 밝혀진 사실이다.

우선 보도연맹에 가입한 제주도민이 2만700여명에 달한다는 사실은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 내용과 일치한다.

'보도연맹원 2만7천명, 주도자 700명 검속'은 4.3 보고서와 일치

4.3보고서는 1950년 8월17일 제주도 현지 상황을 조사했던 주한미군대사관 직원이 남긴 보고서를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등록된 국민보도연맹 회원 27,000명과 과거 반란사건 시기와 그 후에 공산주의자로서 피살된 사람들의 친척 약 50,000명이 제주도에 잠재적인 파괴분자로 존재하고 있다'(4.3보고서 422쪽)

보도연맹원이 2만7000명까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기는 하나 어쨌든 이는 1차적으로 미 대사관의 보고에 의한 것이며, 이 대사관 직원은 예비검속이 이뤄진 직후 이 같은 내용도 보고했다.

'총 1120명의 포로들이 제주도에 억류되어 있는데, 대부분 여러 경찰 유치장에 검속돼 있다…(중략)…경찰은 6월25일 이래 국민보도연맹 지도자 700여명이 체포되었다고 진술하고 있다'(보고서 428쪽)

즉 제주도에만 2만7000명의 보도연맹원이 있었으며, 지도자 700여명이 예비검속돼 있다는 점은 일치하고 있으며, 이점은 주한미군대사관 직원의 보고서를 같이 인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4.3재소자와 예비검속자 집단학살 최고책임자는 추정만 할 뿐 아직도 미제

4.3 재소자와 예비검속자의 집단학살 최종책임자가 누구였느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관련자의 증언·진술만 있을 뿐 아직까지 구체적인 자료로써 밝혀진 것은 없다.

4.3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제주경찰서에 수감된 예비검속자에 대한 총살명령 및 집행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CIC와 당시 제주지역 계엄군인 해병대, 그리고 제주경찰국에 의해 이뤄졌다.

이를 뒷받침하는 문건으로 제주주둔 해병대 정보참모 해군 중령 김두찬이 1950년 8월30일 성산포 경찰서에 내린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의뢰의 건'이 유일하다.

국방부·육군본부가 사살 명령…집행은 주둔지 계염군과 경찰로 추정

'수제건(首題件)에 관하여 본도에 계엄령 실시 이후 현재까지 귀서에 예비구속 중인 D급(*가장 중요한다) 및 C급(중요한자)에서 총살 미집행자에 대하여는 귀서에서 총살 집행 후 그 결과를 내(來) 9월 6일까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 CIC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자이(玆以) 의뢰함'(보고서 429쪽)

이 명령에 따르면 육군본부 정부국에서 총살명령을 내렸고, 실제 이를 집행한 곳은 지역 주둔 계엄군과 경찰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4.3 보고서에는 한국전쟁 당시 해군포항경비부 사령관이었던 남상휘 예비역 준장의 증언도 실었다.

"남상휘 예비역 준장은 1950년 초 자신의 명령으로 경주·포항·영덕 일원에서 예비검속된 주민 200여명을 군함에 태워 바다로 나가 총살한 뒤 모두 수장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독자적으로 총살명령을 내린 게 아니라, 신성모 국방부장관으로부터 명령을 받아다고 하였다"(보고서 430쪽, 제민일보 2000년1월20일 보도)

제주출신으로 현재 미국에서 양민학살 문제에 대해 연구조사를 하고 있는 이도영 박사가 쓴 '죽음의 예비검속'에 따르면 김종필 당시 정보국 제2과 북한반장은 예비검속자에 대한 총살명령이 육군본부 정보국 제4과(방첩대,CIC) 과장 김창룡에 의해 내려졌다는 증언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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