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로당 역할만 집중 부각, 군경에 의한 방화와 주민학살 일체 언급 않아
'6.25 전쟁사'에서 제주4.3을 '무장폭동'으로 규정해 도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4.3에 대한 표기 왜곡뿐만 아니라 4.3사건의 많은 사실들을 왜곡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군사편찬연구소는 국방부 장관이 위원으로 참여해 정부의 공식 문서로 확정한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는 철저히 외면했으며, 4.3을 시종일관 남로당과 군·경의 대립한 사건으로만 몰아가 결국 4.3이 남로당에 의한 '무장폭동'이라는 결론을 유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군경토벌대에 의한 방화와 주민학살은 일체 언급을 하지 않아 다시 한번 4.3관련 단체들은 물론 도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군사편찬연구소는 지난 6월23일 발간한 '6.25전쟁사①-전쟁의 배경과 원인' 중 제주4.3사건을 28쪽 분량을 할애해 서술하면서 4.3의 직접적인 발발 원인이 된 1947년 3.1사건부터 왜곡하고 있다.
3.1 발포사건 "시위대가 경찰관서를 공격하려고 하자 자체 방위상 발포했다" 왜곡
'6.25 전쟁사'는 3..1 사건에 대해 "(중략) 경찰의 발포 상황을 놓고 '시위대가 경찰관 내지 경찰관서를 공격해 오려고 해 자체 방위상 발포하였다'는 경찰측 주장과 '평화적인 군중 내지 관람군중을 향하여 발포하였다'는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고 서술했다.(424쪽)
3.1사건 때 경찰 발포로 희생된 사람은 국민학교 5학년 학생과 젖먹이를 업고 있던 21세의 여인 등 모두 6명으로, 의사 검안결과 모두 등 뒤에 총을 맞은 관람군중이었으며, 이는 당시 언론은 물론 박경훈 도지사도 인정한 사실(4.3보고서 109~113쪽)이었으나 '6.25전쟁사'는 이 같은 사실이 단지 남로당만이 그런 주장을 한 것처럼 호도해 3.1사건과 4.3의 배경을 왜곡했다.
"3.10 총파업으로 연일 폭력시위 끊이지 않아"…검거선풍 정당성 확보 의도
6.25 전쟁사는 또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지령에 따라 3월10일부터 진행된 총파업에는 행정기관, 학교, 회사, 은행 등 약 16개 단체 4만여명이 참가해 제주도의 행정기관이 마비되고 연일 폭력시위가 끊이지 않았다"며 당시 독립신보를 인용했다.(431~432쪽)
그러나 4.3보고서는 이에 대해 3.10총파업은 경찰발포사건에 항의해 벌어진 것으로서 제주출신 경찰까지 참여한 사상 유례없는 관민합동 총파업이었으나 연일 폭력시위가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 '6.25 전쟁사'가 인용한 1947년 4월 5일자 독립신보에는 우도와 중문리에서 경찰과 충돌한 사건이 보도되긴 했으나 주요내용은 ▲경찰 발포의 부당성 ▲제주출신 경찰의 파업참가 ▲유가족돕기 모금행사 ▲3.1사건 피해자가 시위군중이 아니라 관람 군중이었다는 도지사의 발언 등이 기사화 됐다. 그러나 군사편찬연구소는 이 같은 사실은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6.25전쟁사'는 3.1사건과 그 이후의 3.10 총파업을 남로당의 계획에 의한 폭력시위로 왜곡·과장해 이후 벌어지는 검거선풍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
"선무공작으로 하산한 양민 전원 귀향조치"…고의적 역사왜곡·초토화작전 '미화'
군사편찬연구소는 또 군·경의 초토화작전에 대해서도 "2연대는…(중략) 적극적인 주민 선무활동을 전개한 결과 산에서 내려온 주민이 1,500명에 달하였다. 연대는 이들을 갱생원(피난민 집단수용소)에 수용하여 구호물자를 배급하는 한편 포로가 된 인민유격대를 처형하지 않고 사상계몽을 통하여 선량한 국민으로 갱생 시켰으며, 양민으로 인정된 자는 전원 귀향 조치하였다"(447쪽)라고 초토화작전의 결과를 미화했다.
그러나 이는 군사편찬연구소의 의도적이고도 고의적인 역사 왜곡이다.
당시 토벌대의 초토화작전을 피해 산으로 피신했다가 군의 선무공작에 의해 1949년 봄에 하산한 도민들은 제주시 주정공장에 수용됐으며, 이들 대부분이 숱한 고문과 폭력에 시달리다가 정상적인 법적 절차도 받지 못한 채 전국의 형무소로 이송됐다가 6.25전쟁이 발발하지 군경에 의해 집단 학살당했기 때문이다.
이 때 전국의 형무소로 보내진 사람들에 대한 이른바 '수형인명부'가 발굴된 바 있으며, 최근에는 제주4.3유족회원들이 소위 '행불인'들의 억울한 죽음을 추념하기 위해 전국의 형무소 터나 학살터를 순례하며 눈물의 위령제를 매년 지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6.25전쟁사'는 "전원 귀향 조치하였다"고 왜곡 기술했다.
80명 주민 학살한 '의귀리 사건'…"주민협조로 인민유격대 소탕했다" 왜곡
또 이 책은 448쪽에서 "한편, 2연대는 잔여 인민유격대에 대해서는 주민들의 협조로 1949년 1월 31일 남제주군 남원면 의귀리에서 30여명을 사살하는 등 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2월말까지 소탕작전을 계속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당시 남원면 일대는 군경에 의해 중산간 마을이 깡그리 불타는 등 그야말로 초토화 돼 주민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리저리 피신생활을 했던 상황으로 '주민 협조' 운운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토벌대는 1949년 1월 12일 주둔지를 습격해 온 무장대를 물리치기는 했으나 전사자 4명이 발생하자 이에 대한 화풀이로 주민 80여명을 집단학살 했었다.
소위 '의귀리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의 희생자 80여구의 시신은 나중에 마을 주민들에 의해 합장되었으며, 현재 의귀리에는 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는 '현의합장묘(顯義合葬墓)' 비석을 세워 매년 제사도 지내고 있으나 이 같은 역사적 사실도 왜곡했다.
6.25 전쟁사 '4.3=무장폭동' 보고서 확정·대통령 사과 불구 여전히 극우 시각
특히 '6.25 전쟁사'는 4.3사건을 '무장폭동'이라고 왜곡·정의했다.
'4.3 특별법'은 제주4.3사건에 대해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또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국방부 장관도 참여하고 있는 '제주4.3사건위원회'에서 2003년 10월 15일 공식 채택한 '진상조사보고서'는 제주4.3사건에 대해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같은 결론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10월 31일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제주도민에게 사과했으나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전혀 무시한 채 제주4.3을 '무장 폭동'으로 매도한 것은 제주도민은 물론 대통령과 전체 국민에 대한 도전으로 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