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나의 열여덟 일기③] 그대 두려워하지 말지어다.[Delhi-1]
나를 돌아보고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곳. 그곳이 인도였을 뿐

▲ 델리공항

2006년은 내게 굉장히 힘든 한 해였다. 학교를 그만두는 것을 포함한 수많은 변화를 겪었으며, 그 변화의 대부분은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다. 울지 않고 지나간 날이 손에 꼽힐 만큼 힘든 한해였다. 어리다고 해서 힘겨움까지 어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열일곱에 대해 막연한 환상과 기대를 품고 있던 열여섯의 내겐, 너무도 가혹했던 열일곱. 그 열일곱의 마지막 날, 나는 한국을 떠나는 비행기에 올랐다. 인도로 향하는 비행기가 아니라 한국을 떠나는 비행기. 그때의 심정은 딱 그랬다. 2006년, 한국의 사람들이 가장 많이 꿈꿨던 나라, 간디의 나라 인도.

 김 로마나는...

   
 
 
김 로마나(18) 양은 고교1학년 때인 지난해 학교를 자퇴하고 부모님 밑에서 홈 스쿨링(home scooling)으로 검정고시와 대학진학을 준비하고 있는 이 시대 청소년이다.

지난해 12월31일 홀연히 인도로 배낭여행을 떠났다가 지난 2월1일 귀국할 때까지 약 한 달여간 인도의 구석구석을 훑고 돌아왔다. 겨울방학(?) 기간을 활용해 늘 꿈꿔왔던 인도로의 여행이었다.

서귀포가 고향인 섬소녀의 눈에 비친 인도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로마나와 함께 간디의 나라 인도로 떠나보기로 한다. <편집자>

내게 굳이 그곳으로 떠날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인도를 찾은 건 그곳이 간디의 나라여서도 아니고, 샤자한의 나라여서도 아니다. 타즈마할도 비탈라사원군도 강가지도 내가 인도를 선택해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그저 머리를 비우고, 힘들었던 마음도 비우고, 내 천성대로 잘 웃고 잘 놀고 방방 뛸 수 있는 곳, 그렇지만 단지 그 순간으로 끝이 아닌 곳, 나를 돌아보고 내가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좋았다. 그곳이 인도였을 뿐이다. 이유가 아닌 필요. 그렇게 인도를 선택했다.

나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에 사는 섬 소녀다. 제주도에 사는 탓에 비행기를 탈 때의 설렘을 잊은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지하철보다 비행기를 훨씬 더 많이 탔고, 그래서 지하철 차표를 끊을 때가 보딩패스를 발급받을 때보다 훨씬 더 두근거리는 섬 소녀다. 그런 내가 떨고 있었다. 비행기에 오를 땐 '이 비행기가 추락하면 어쩌지?', '인도엘 갔는데 음식이 입에 안 맞아서 살이 쪽 빠지면 어쩌지?' 아니 그건 좋은 건가?', '가서 엄마아빠가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보고 싶어서 매일 울면 어쩌지?' '그럼 돈만 날리는 거잖아!' 따위의 말도 안 되는 생각들로 머리를 꽉 채우고 있었다.

비행시간은 길었다. 비행기를 많이 탔다고는 해도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항공의 편안함에 익숙해있던 내게는 굉장히 불편한 좌석이었다. 그런 좌석에 말 그대로 '낑겨'타서 여섯 시간 이상을 비행해 싱가포르에 도착. 화장실엘 가고 먹을 것도 찾아먹고, 모처럼 싱가포르에 왔는데도 공항 밖으로 나갈 수 없단 사실에 분개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다시 비행기에 오를 시간. 입을 댓발이나 내밀고 비행기에 올랐다.

영화도 보고, 노래도 듣고, 책도 읽다가 잠도 자고. 엉덩이가 배겨서 몇 번인가 앉았다 일어났다 하다 보니 도착한단다. 비행기의 창밖은 이미 캄캄했다. 인도인, 싱가포르인, 한국인을 주로 한 수많은 사람들이 엉망으로 엉켜든 채 델리의 공항에 내렸다. 솔직히 처음의 인상은 '헉'이었다. 아무리 인도가 제3세계라지만 버스 터미널처럼 생긴 허름한 건물. 벽도 시멘트로 대충 마무리 한 게 전부인 이 싸한 공간이 공항이라고? 한국공항의 모던함, 싱가포르의 편안함을 거치고 간 터라 델리의 공항은 더욱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스모그. 12.7kg의 배낭 '철수'를 매고 공항 밖으로 씩씩하게 걸어 나갔지만 검어야 할 밤거리가 회색으로 보이는 것이 심상치 않더라니, 역시 그 어마어마한 스모그란 한국에선, 특히 제주같이 공기가 좋은 동네에선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신경이 한 두꺼움 한다는 나마저도 마스크를 찾기 위해 힙쌕을 짜증스레 뒤적였을 정도이니 그 심각함은 말로 다 주워섬길 수 없을 정도의 것이었다.

그래도 스모그 따위에 지고 한국으로 돌아 올 수는 없는 노릇. 버스를 타고 빠르간지의 메인바자르로 향했다. 사실 가이드북을 가져가며 했던 생각은 '여기 나온 장소만 피해가며 돌아다니면 되겠지.'다. 가이드북에 실용정보로 올라 있는 곳엔 반드시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몰리게 마련이고, 그렇다면 값도 그다지 저렴하지 않을 것이며, 서비스도 예전처럼 좋지만은 않을 것이니 다른 곳을 뚫는 것이 차라리 현명하리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델리의 밤거리를 헤매며 나는 내게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힘겹게 인정했다.

메인바자르에 도착한 시간은 아홉시가 거의 다 되어서였다. 너무 시간이 늦었던 탓에 대부분의 숙소는 만원이었고, 자꾸 말을 걸어오는 인도의 남자들 또한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며, 길거리 곳곳에 지뢰처럼 널려있는 소똥들도 짜증스러웠다. 해골이나 다름없는 강아지들은 몸에 소똥이 묻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곳곳에 늘어져있었고, 그 시간까지도 오토릭샤는 어찌나 시끄럽게 달리는지. 혼이 그대로 빠져나갈 지경이었다.

별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한국행비행기를 잡아타고 싶을 만큼 끔찍한 방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나의 유일한 선택지였던 아눕은 침대 상태도 그럭저럭 괜찮았고, 나름대로 창문도 있었고, 무엇보다 저렴했다. 단 한 군데 확인하지 않았던 곳이 화장실이었는데, 그건 순전히 피로한 몸이 '지금 여기라도 체크인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첫날부터 노숙해야 할 거야. 일단 지르라고!'라며 서두르기를 재촉했기 때문이었다.

▲ 인도에서 첫날 숙소로 잡은 호텔 '아눕'의 욕실. 욕실(화장실)엔 샤워기가 없고 물이 내려가지 않았다. 인도 숙소에서 샤워기가 있는 방을 찾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란다.

확인해보지도 않았던 화장실이지만, 그래도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화장실에 물이 내려가지 않는다는 것과 샤워기가 없다는 것 따위의(사실 인도의 숙소에서 샤워기 있는 방을 찾는다는 건 하늘의 별따기와 엇비슷할 정도로 힘든 일이다.) 사소한 문제를 제외하면 말이다.

호텔 아눕의 화장실엔 로티와 샤워용 바가지가 비치되어있었다. 문득 우스워져 웃음이 터져 나왔다. 로타와 샤워용 바가지는 같은 디자인, 같은 크기를 하고 같은 자리에 나란히 놓여있었다. 인도에 도착한 순간부터 내내 찡그리고 있던 얼굴이 펴졌다. 옅은 하늘색의 바가지 두개. 손잡이엔 새까만 손때가 끼고 물을 담는 곳엔 누런 물때가 잔뜩 끼어있던 바가지 두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지금도 그 작은 바가지 두개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나는 인도에 있었다.

다른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나는 인도에 갔고, 그곳의 음식과 그곳의 공기를 먹고 마셨으며 그곳의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그곳의 새벽을 걸었다. 나는 분명 그곳에 실재했다. 아직도 돌아보면 그저 꿈처럼 실감이 나지 않지만, 일기장을 들춰보면 인도의 땅을 밟고 있는 내가 너무도 생생하다. 때가 잔뜩 낀 하늘색 바가지와 쥐오줌이 누렇게 묻어있는 철제침대까지.

나의 인도는 너무도 실제적인 실체를 그대로 내게 드러냈고, 나는 인도와 악수하는 기분으로 하늘색의 바가지를 잡았다. 인도의 첫인상은 두려움이었다. 인도와의 첫 악수는 샤워용 바가지가 아닌 로타(용변을 본 후 밑을 닦는 물을 담는 바가지)로 샤워를 하는 것으로 대신한 셈 치자. 그래도 깨끗하게 닦여있었을 바가지이니 무슨 문제 될 일이 있는가! No problem! 힘들었던 2006년의 마지막 날, 나는 인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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