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에 대한 문제제기

 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 진보 달라져야합니다.'는 글을 청와대 게시판에 올리면서 대통령과 진보진영간의 상호 비판이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여기에 진보 지식인들의 반론이 이어졌고 일부 친노(親盧) 지식인들이 '주군'에 대한 충성을 과시할 목적으로 다시 진보 진영을 경쟁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대통령이 진보학자들을 비판하는 글 속에는 80년대 민주화를 열망하며 의식화의 텍스트로 사용되었던 사회과학 서적들을 두루 섭렵하던 ‘인권변호사 노무현’과 열악한 대외 환경 하에서 국가의 운명이 달린 중대사들을  결정해야하는 ‘고독한 대통령 노무현’ 사이의 심리적 괴리가 솔직하게 나타났다는 점에서 일단 글의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하지만 대통령의 진보에 대한 인식이 사뭇 실망스럽다는 것도 밝혀두고자 한다.

1. 참여정부와 진보학자들 사이의 논란

▲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에는 신자유주의의 지배하에서 서민 대중의삶을 지켜키면서 경제 발전동력을 키워나갈 대안을 찾기위한 노력의 흔적을 엿볼수 있다
참여정부 출범이후 진보학자들이 참여정부를 비판하는 주된 내용은 ‘참여정부가 신자유주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미국을 중심으로 한 투기성 자본의 이익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이끈 나머지 사회 양극화가 더 심화되었다’는 것이며, ‘정부가 한미FTA 체결을 서두르는 것이 참여정부가 신자유주의 옹호세력임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이다. 그리고 진보학자들은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이 개혁세력임을 자처하지만 국가보안법의 문구 하나 고치지 못한 무능한 세력’이라고 개혁진영을 몰아붙인다. 여기에 ‘진보진영은 참여정부를 반면교사로 삼아, 스스로 단순히 선거에서 표를 많이 얻는 집권전략 말고, 집권했을 시 운영할 운영프로그램을 만들어야한다는 깨우침을 얻었다’고도 한다.

물론 진보학자들의 이런 날선 비판에 대해 참여정부나 열린우리당은 시종일관 ‘개방도, 노동의 유용성도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효용성의 문제’라고 하고 각종 알리바이를 들이대며 ‘우리도 할 만큼 했다’고 주장한다. 또 각종 개혁의제가 좌초된 배경에는 조선,중앙,동아 등의 족벌언론이 지배하는 열악한 언론환경과, 여야 간 대화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의회환경, 그리고 지역구도의 정치 환경에 큰 원인이 있다고도 한다. 그리고 진보학자들을 향해 ‘비판만 하지 말고 대안을 제시하라’고도 한다.

2. 시장(주의)의 과잉

진보학자들과 참여정부 사이의 첨예한 대립전선을 형성하게 만든 배경 중 하나로 시장의 과잉현상을 들 수 있다. 재벌의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안이 나와도 일부에서는 시장경제의 원리에 맞지 않다고 하고, 신문법안이 나와도 ‘시장 원리를 무시하는 언론탄압’이라고 했다. 심지어는 열린우리당의 총선공약이었던 ‘분양원가공개’를 ‘10배 남는 장사도 있다’며 반대 의견을 명확히 한 대통령의 주장도 결국은 시장의 맹신에서 나온 발언으로 보인다.

진보학자들의 참여정부 비판은 이런 시장주의의 과잉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도 아담스미스를 너무나 신봉하는 시장주의자들은 “우리가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양조장, 빵집 주인들의 박애심 덕분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돈벌이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를 열심히 암송하고 있지만, 문제는 우리의 식탁은 이미 양조장, 빵집 주인들이 공급해주는 음식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스타벅스나 맥도날드와 같은 외래종 프렌차이즈 음식이나 대형 할인매장의 원료들로 채워지고 있고, ‘돈벌이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시장에 참여했던 영세 상인을 포함한 많은 자영업자들은 대다수가 시장에서 퇴출될 위기에 놓여있다. 시장이 거대 자본에 의해 지배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사장주의자들은 경제를 시장 자율에 맡겨둬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시장과 자본을 이대로 놔두면 이들의 전횡과 횡포를 막을 수 없어지고 그 결과 서민경제는 결국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외환위기 이후 우리사회가 뼈저리게 체험한 교훈이다. 현재 진보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시장을 폐지하자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공정한 룰을 만들어 시장을 공동체를 위해 복무할 수 있도록 조정해야 하는데 참여정부는 이런 조정자의 역할을 방기했다는 것이다.

3. 신자유주의

외환위기 이후 우리사회는 너무나 많은 변화를 겪었다. 금융시장은 완전히 개방되었고, 은행은 국민경제에 복무해야 한다는 공익적 기능은 폐기하고 자체 수익을 늘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평생 직업은 사라졌으며 직장에서 내 쫒긴 비정규직 노동자나 실업자들 건너편에서는 금융공기업 직원들의 연봉이 1억에 육박한다는 환호성이 울려 퍼진다.

정부나 정권에 빌붙어 공기업에서 한 자리 차지한 신흥 귀족들은 이젠 ‘중소기업 육성’과 같은 구시대의 가치보다는 ‘초일류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냉혹한 정글의 법칙을 반복해서 암송하고 있다. 이들은 아직도 ‘시장경제가 부족하다고’주장하며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한다. 대통령이 진보지식인을 비판하면서 ‘비전2030 전략을 통해 혁신주도형 경제로 성장잠재력을 높이겠다.’고 주장하지만, 그 혁신이라는 것이 초일류기업만이 살아남는 시장의 개혁임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 모든 현상은 물론 이윤을 찾아 돌아다니는 투기자본과 국내 독점 재벌의 구미에 맞는 경제체제를 만들기 위해 정부와 보수언론, 자본들이 합작해서 만든 결과들이다. 해고하기 쉬운 나라, 주주의 이윤이 지상 최고의 가치로 존중받는 사회, 그 것이 정부가 말하는 글로벌 스탠다드이며 기업하기 좋은 나라이다.

대통령은 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복지예산을 조금 더 늘렸다고 생색내지만 도시의 많은 주부들이 생계비를 벌기 위해 노래방 도우미로 전락한 현실에 대해 어떻게 답을 할지 궁금하기만 하다.

그런데 신자유주의가 경제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라면 좋으련만 이미 정치적으로도 신자유주의는 완결되었다.

참여정부가 출범할 당시 많은 국민들이 검찰개혁과 사법개혁에 기대를 걸었다. 대통령이 검찰의 서열을 폐기하고,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검사들과의 대화에서 그들을 압도하는 광경에서 국민들의 기대는 극에 달했다. 하지만 이후의 과정은 너무도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감금실 장관이 많은 개혁과제를 수행하려 했지만 송광수 검찰총장이 사사건건 개혁안을 방해하고 있었고 급기야 송광수 총장의 입에서 ‘검찰을 개혁하려거든 나를 밝고 지나라’는 말까지 나왔다. 대통령이 인사방식이나 국정을 이끌어가는 방식에 심한 문제가 노출되고 말았다.

결국 검찰개혁은 물 건너갔고, 대통령이 검찰을 자유롭게 해 줬으니 그들은 유사 이래 최고의 권력을 누리며 국민위에 군림하고 있다. 오만한 권력을 행사하는 곳이 검찰뿐이면 좋으련만 법원과 헌법재판소 할 것 없이 모든 권력기관이 문민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자신들의 권력을 과시하고 있다.

이 나라의 권력기관이 후한무치하게 자신들이 속한 집단과 계급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활용하는데 대통령을 ‘탈권위적이며 민주적인 지도자’로 칭하는 것이 적당한 것인가? 대통령은 스스로 탈권위적 지도자가 되려 했을지 모르지만 결과는 국민위에 군림하는 권위주의적 권력기관만 키워버린 셈이다.

권력을 누리던 자들에게 더 큰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은 마치 거대자본이 약육강식의 시장 경쟁에서 더 큰 이윤을 쉽게 얻어가는 현상과 같으니 참여정부이후 최근의 권력 재 분배현상은 ‘정치적 신자주의’라고 밖에 할 수가 없다.

4. 진보는 무능하다?

이런 비판에 대해 소위 친노(親盧)측은 즉흥적으로 ‘그럼 비판만 하지 말고 대안을 제시하라’고 응하지만 이런 방식은 적당한 대응이라 할 수 없다. 200조 이상 되는 거대규모의 예산을 집행하고, 고위관료를 포함해서 시민단체 출신 인사들과 일부 진보지식인 등 대다수 인재를 독점하고 있는 정부가 소수의 진보지식인에게 난 서민의 삶에 대해서 모르겠으니 니들이 대안을 만들어보라고 주장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 연봉 1억을 미끼로 많은 지식인들을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인 정부가 얼마 남지 않은 양심적 지식인들에게 ‘니들이 잘나면 얼마나 잘났냐’고 비아냥거리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진보 진영 내에는 새로운 로드맵을 만들기 위한 많은 노력들이 있었고 그런 노력들이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물론 삼성과 정부의 막강한 지원을 받는 삼성경제연구소만 하겠는가만 그래도 신선한 대안 찾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결실들이 만들어진 곳이 손석춘 교수가 소장으로 있는 새사연(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소)가 아닌가 싶다. 새사연에서 작년(2006년)에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이란 책을 발간하면서,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정치경제적 대안을 제시했다.

그 책은 그간 한국의 자본주의 발전단계를 ‘국가중심의 자본주의→주주중심의 자본주의’로 이행했다고 평가했다. 박정희, 전두환으로 대변되는 군부 집권의 시절 국가가 물리적 우위를 점하고 경제를 운용하다가 현재는 금융자본과 주주들의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주주자본주의의 극에 달했다고 규정했다.

금융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 대해서는 노동중심의 자본주의를 목표로 경제 프레임을 전환해야하며, 이를 위해 국가가 어느 정도는 경제에 개입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유한킴벌리 회사의 경우를 예를 들며, 고용의 안정성에 기반을 둔 노동의 창의성이 오히려 기업의 이윤확대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했다.

또 한반도를 아우르는 경제통합이 남한 경제에 부담을 가중시킬 것이 아니라, 북한 내에 산적한 각종 개발수요가 오히려 우리 경제를 한 층 더 부양시킬 것이라는 전망도 제시했다. 또 북한에는 남한에 없는 각종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는데, 특히 철의 경우 20-40억 톤이 매장되어 있어서 남한의 제철산업과 관련시키면 남북 경제를 동시에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했다. 또 북한의 서한만 일대에 430억 배럴 정도의 원유가 매장되어있다고 추정하며, 이는 세계 8대 산유국인 apr시코의 매장량과 맞먹는 수치라고 했다.

따라서 새사연은 우리 경제를 세계 투기자본의 투기에 무한정 노출시키지 말고, 국가가 최소한의 개입을 통해 국민경제를 조정해야한다고 주장하며, 투자처를 찾지 못해 배회하는 자본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제공할 수 있는 코리아 경제공동체를 결성할 것을 주장했다.

5. 노무현 대통령은 진짜 스스로를 진보라고 여길까?

진보학자들을 ‘교조적’이라 비판하는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를 ‘유연한 진보’라고 규정했다.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신자유주의자들의 입에서 나왔던, 누구의 입에서 나왔던 채택할 수 있는 유연성이 있다는 의미라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믿고 있는 것일까? 진보란 낡은 프레임이 사회발정의 발목을 잡는 경우라면, 특히 낡은 프레임으로 인해 서민의 삶이 고통을 받고 있다면 그 프레임을 교체할 용기도 있어야한다. 컴퓨터로 치자면 아무리 소프트웨어를 바꿔도 컴퓨터 운영체계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왔다면 운영체계를 바꿔야하고, 운영체계를 바꿔도 하드의 사양이 떨어지는 경우라면 본체를 바꿔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소프트웨어 몇 가지를 바꿨다고 스스로를 진보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참모들도 그 발언에 대해서는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하긴 진보학자들에 대해 ‘비판만 하지 말고 대안을 제시하라’고 윽박지르는 정부가 어찌 보면 스스로 조선,중앙,동아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증거다. 진보라면 어찌 낡은 프레임에 자신과 세상을 가두고 그 안에서 대안을 찾으려 발버둥 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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