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영의 참회록 : 사랑과 용서만이(3)]

미자야.

승환이 승진이 모두 청년이 되어서 군대에도 가도 그러는구나...그 애들하고 너희들이 뉴욕에서 함께 지내던 때가, 한 15~6년 됐나 봐,  엊그제 같은데...나는 그때 40대 초반(?)...걔들이 나더러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니까 참으로 쑥스러웠는데...'젊은 할아버지'였지. [너의 외할머니와 나의 아버지는 13살이나 차이가 났다. 나의 아버지는 '이제 대를 이을 자식이 없겠구나'하고 내 할아버지가 포기했을 때 태어났어.]
 
근데, 이제 '진짜 할아버지'가 된거야. 허~ 참.

'군입대...'하니까 너무도 감회가 깊다. 너의 타는 맘도 한편으로 조금은 이해할 수 있고...

내 동생 도식이는 육군 하사관으로 요행히도 전방근무를 했다. 동생은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나보다 먼저 군대갔다온다면서 입대를 했고, 나는 대학에 다니고 있어서 연기를 할 수가 있었지...동생이 제대하고 오면 내가 간다고...그 동안 홀어머니를 내가 모시고 있겠다고...그런데 동생이 돌아오기 전에 나도 가야했었어. 너의 어머니가 우리에겐 고종사촌 누님이지...동생이 군에서 고생하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누님은 논산훈련소에도 찾아가고 일선전방에도 찾아가고, 참으로 열성적으로 돌봐줬어. 너희 아버지는 육군 헌병 상사였고...그 때는 이미 이 세상사람이 아니었지...강원도 어느 산골에서 교통사고로 순직했다고만 기억해. 제주도에 근무할 때는 아버지와 꿩사냥을 함께 좇아 다닌 추억도 있고...

[제주에서 교편을 다시 잡을 때, 제주4.3 때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추적하기 위해서, 1950년 '6.25 사변'(=한국전쟁) 당시 대구형무소에 복역하다가 10년 만기로 풀려나온 양 아무개씨(안덕 화순거주)를 만나서 장시간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그 분으로부터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잠깐 들었어. 형무소 작업장에서 헌병인 아버지를 만났다고 하더군. 검은 안경을 쓴 제주출신 헌병이 다가오더니만 "휴가로 고향엘 가니 집에 편지를 쓰면 전해주겠다"고 하더란다. 그래서 그 분은 자신이 대구형무소에 복역 중인 사실을 고향 식구들에게 알릴 수가 있었데...4.3때 영문도 모르고 육지 형무소로 끌려가서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었던거야. 대부분의 제주출신 수형인들은 그 때 거의 모두 목숨을 잃었어...김상화 대정면장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어...아버지가 지금 살아 계신다면 많은 '진실'을 말해 줄 수 있을 텐데...]

1969~1970년 나는 대정고와 대정여중을 오가며, 대정고에서는 윤리와 독일어 대정여중에서는 너희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참 잘나가는 총각선생이었지.

한 4~5년동안 공부하느라 미루고 미루던 군입대 영장을 69년 12월 초엔가 받았어. 진짜로 일본으로 도망치고 싶었어. 그러나 나에겐 여권발급도 신원조회를 해야되고 또 군미필자는 해외여행도 안되는 그런 시절이었어. 밀항선이라도 타고 싶었다. 오사카에 가면 자수성가한 작은할아버지가 계셨고...조총련 오사까 '대빵'이라고만 들었어. 나의 할아버지가 생존시에는 일본으로 보내는 편지를 내가 많이 대필을 해서 잘 알아.

그냥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가야하는 판이었지. 그것도 졸병으로 말야. 나는 아버지 사건으로 대졸자들에게만 허용되는 장교시험도 못 봐. 만약에 시험에 패스하더라도 신원조회에서 '연좌제'로 떨어지거든. [중등학교 교사임용시에도 연좌제로 인한 사연이 깊어. 군에 가서도 비참하게 당했어.]

그게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당해보지 안한 사람은 말할 자격이 없지.

그리고 내가 한 3년 동안 사귀던 '진짜로 사랑하는 애인'이 서귀포에 있었다. 그녀는 제주교대(당시 2년제)를 나와서 일찌감치 국민학교 선생을 하고 있었고, 나는 4년제 사범대를 나와야 하니까 69년도 가을에야 선생이 된거야.

그때는 월남전이 한창...군대에 가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월남으로 팔려가던 때...나의 모슬포 동창 한 사람(사계리 광욱)은 해병대로 월남 참전했는데 재가 되어서 돌아왔어...그러니 앞서 말한 '도살장' 표현이 과언은 아니야.

그녀는 내가 군대에 가서 썩는 3년을 못 기다린데...그녀와 나는 동갑네기였거든...말 못할 고민에 빠졌어. 그렇다고 군대가기 전에 약혼도 결혼도 할 수 없는 일이고...

아마도 그녀는 집에서 중매하는 또 다른 좋은 남자가 있었나봐. [언젠지 모르지만, 나에겐 청첩장도 아무런 통보도 없이 결혼하고 말았어. 그리고 육지로 갔다는 것은 누군가 나중에 전해줘서 알았다.]

70년 4월 초순 (13일로 기억해)...그녀와 나는 '결별식'을 갖기로 했어. 어디서?

한라산 성판악에서...그녀는 여자친구 한 사람, 나는 남자친구 한 사람 데리고 왔어. 합이 넷. 아마도 내 친구가 이별주로 포도주 한 병을 사고 왔던 것 같아.

포도주 한 잔씩을 나눠 마셨는데, 그리고 별로 할 말도 없고....서귀포로 내려가는 막차가 끊어질 시간이 되어서 저들은 먼저 내려가야 한데...제주시로 내려가는 막차는 이미 끊어졌고...그녀들과 나의 남자친구도 모두 서귀포에 살기 때문에 남쪽을 향하고 나는 나홀로 북쪽을 향해서 등을 돌렸다. 한잔 포도주가 나를 얼마나 취하게 만들었는지(원래 나는 알코홀에 약해, 못 마셔)...내 발과 다리에 힘이 빠졌어. 정신은 말똥말똥한데...

뒤돌아 보지 않고 한라산을 밤새 내려갈 작정을 했어...결코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오리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

그런데, 조금 내려가다가 헛발을 디뎠는지 나는 구렁에 빠지고 말았어. 그리고 잠들었던 것 같아...누가 나를 흔들어 깨웠어...눈을 뜨고 보니까 그녀가 돌아왔어...아마도 북쪽을 향해서 걸어가는 나의 뒷모습이 심상치 않아서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나봐...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되...아마도 내가 꿈을 꾼 것 같았어...

"왜 돌아왔어? 얼른가! 나 괜찮아, 나 걸어서 내려갈 수 있어..."

"잘 가, 잘 있어, 잘 살아...Forever I love you! Forget me not!"   'Forget-Me-Not'은 '물망초'인 것 잘 알지.

나는 일어나서 다시 북쪽을 향해 걸었고, 그녀는 다시 남쪽을...

내 애간장이 다 녹아 내렸다...눈물이 하염없이 내려서 앞길을 분간못하고...어둠은 갑자기 몰려오고...춥기도 하고...아, 이대로 세상을 끝내고 싶다...이런 생각도 ... 별이별 생각이 다 들었어. 취기도 언제 없어졌는지 맨정신이 돌아왔어...

젊은 꿈을 이대로 접을 수는 없지...가야 돼...그리고 살아남아야 돼...

꼬불꼬불 산 길을 나홀로 맥이 빠져 터덕터덕 내려오고 있는데, 왠 짚차가 급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등뒤에서 섰어. 혼자 운전하던 분이 내려와서 나를 부축했어. "왠 일로 혼자 산길을 걸어서 내려가냐?"고 물었어...

그러면서 차를 타라고 하는거야. 나는 정중하게 거절했어..."나는, 내일 아침이면 제주항에서 목포로 가는 배를 타야하오, 광주 훈련소로 들어가야 한다오...밤새 걸어서 가려고 그래요. 놔 두세요. 감사합니다만..."

"얼어서 죽어요, 큰일 나요. 안돼요...타세요."

"정말로 죽어버리고 싶어요. 여기서 끝났으면 좋겠어요."

그는 나를 억지로 끌어당겨서 그의 옆자리에 앉혔다. 잠시 후에 나를 칠성통 나사로병원 옆 삼다미락(나의 외숙모가 경영하는 일식집)앞에 내려다주고 "군대 잘 갔다 오라"면서 그는 떠나 버렸다.

나의 기억으로는 그 짚차는 제주도청 사회과 소속이라고 들었던 것 같아...신이 내려준 나의 '수호천사'였나 봐.

내가 만약 그 '천사'를 만나지 않았으면, 한라산 그 어느 자락에서 동사한 시체로... 제주신문 한 귀퉁이에 ... '군입대 비관 자살' 이렇게 났을거야.

...

내가 1997년 제주도에 귀향해서 교편을 다시 잡았을 때, 그녀를 수소문해서 찾았어.

마침 그녀의 서귀포 후배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언니 찾지 마세요."  "???"

"왜요?" 그녀의 얼굴에 말 못할 슬픔이 지나갔다.

"..."

"참 이쁘고 좋은 언니였는데...그 언니 이 세상사람 아네요..."

...

   
 
 
"무덤이라도 알려줘요"

"찾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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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환이에게 특별히 '건강하고 잘 다녀오라'고 꼭 좀 전해줘라.

너희들을 위해 늘 기도하마. 특히 너의 건강회복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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