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제주의 어느 봄날 풍경들

 
▲ 감자를 심고 있는 아낙들(제주도 종달리)
ⓒ 김민수
 
종일 봄비가 내린다. 나뭇가지마다 비이슬을 총총하게 단 것을 보니 이제 봄비가 끝나면 반짝 꽃샘추위가 온다한들 계절 감각이 무딘 사람이라도 봄을 느낄 수 있을 만큼 푸른 빛들이 여기저기서 올라올 것만 같다.

봄비, 그가 내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제주의 봄날을 떠올렸다. 결코 낭만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었던 제주, 그 제주를 떠난 후에는 어쩔 수 없이 삶이라는 것이 빠져버린 허망한 낭만처럼 그냥 '그 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그 곳에 가면 몇 날 못 되어 다시 이 곳이 그리울 것이다.

 
▲ 오조리바닷가에서 조캐를 캐고 있는 풍경
ⓒ 김민수
 
겨우내 칼바람이 잦아들고 봄바람이 불 즈음에는 물이 빠지면 종종 조개를 캐러 바다로 나갔다. 밭을 갈 듯이 골갱이로 모래를 긁다 보면 무언가 '딱!'하고 걸리는 느낌으로 조개를 캘 수 있었다. 신기했다. 밭을 갈 듯이 여기저기 갈아주어야 바다도 숨을 쉰다는 것이 신기했다.

 
▲ 종다리 앞바다에서 이른 새벽 작업을 하고 있는 어부들
ⓒ 김민수
 
이른 아침 해맞이를 하러가면 더 일찍 바다에 나가 그물을 걷는 어부들을 만나곤 했다. 신기하게도 늘 그자리에 그물을 치고 걷는데도 매일 그 곳에서는 물고기는 올라왔다. 자연이 우리 사람들에게 준 은혜다. 저 깊은 바다는 어떻게 숨을 쉴까? 폭풍우, 태풍이 오면서 뒤집어지고 숨을 쉰다. 감히 인간들이 가까이 할 수 없는 그 시간에 그들은 자신을 새롭게 창조해 가는 것이다.

 
▲ 하도리의 쪽파밭에서 검질을 하고 있는 할망과 유채꽃
ⓒ 김민수
 
밭도 그렇다. 단순히 잡초를 뽑아내는 것뿐 아니라 땅을 골라주면서 딱딱해서 숨쉬기 곤란한 땅들을 고슬고슬하게 해주는 것이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풍경, 아침바다를 거닐다 우연히 검질하는 할망을 만났고 그를 담았다. 그것이 그렇게 내 마음에 오랜 풍경으로 남을지는 몰랐다. 제주의 봄, 유채만 생각하면 그 아침이 떠오른다.

 
▲ 성산일출봉과 빛내림의 풍광
ⓒ 김민수
 
바다는 그날 햇살의 양과 온도와 바람에 따라 시시각각 변했다. 똑같은 바다도 어떤 날은 무섭게 다가오고, 어떤 날은 밋밋하고, 어떤 날은 그냥 '풍덩!' 빠져들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빛깔로 다가왔다. 그 바다가 그 바다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오랜 시간 바다를 지켜보면 여전히 그 바다는 그 바다였다.

 
▲ 종달리에서 바라본 우도의 아침
ⓒ 김민수
 
섬에서 섬을 바라본다는 것은 또 다른 감흥을 주지만 우도는 늘 슬픈 변방의 섬처럼 느껴졌다. 유배지에 온 것도 모자라 유배지의 유배지로 보내지던 이들은 어떤 이들이었을까? 그들은 제주의 동쪽에서 해맞이를 하는 이들보다도 더 먼저 맞이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여전히 척박한 그 곳, 그래도 늘 그 곳은 본토보다 더 일찍 해맞이를 한다.

 
▲ 우도에서 바라본 보리밭과 마늘밭
ⓒ 김민수
 
겨우내 푸르던 마늘이 껑충 자라고, 봄햇살에 보리가 누렇게 익어갈 무렵이면 봄날이 간다. 제주의 봄에는 4·3항쟁이 들어 있다. 지금이야 유채꽃이 흐드러지는 봄이지만 1960년대에 유채가 들어왔다고 하니 그때에는 보리와 마늘이 핏빛으로 붉지는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인지 제주의 봄은 슬프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의 봄, 그것을 다시 그 곳에서 느끼고 싶다. 봄이 시작된 날부터 완연한 여름이 되기까지 바다와 오름과 중산간 숲속을 거닐며 보내고 싶다.

 
▲ 돌담담장에 기대어선 자전거, 돌담사이 유채꽃
ⓒ 김민수
 
돌담도 많이 사라져가고 있지만 모진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던 돌담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곳에 살면서 돌담이 무너진 것을 두 번 보았는데 그야말로 엄청난 태풍이었다.

제주의 흔들거리는 돌담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바람은 바람이 아니라 광풍이었던 것이다. 매미와 루사, 그때만큼 자연의 존재 앞에서 무력한 인간을 직접 경험해 보질 못했었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풍의 날일지라도 그 곳에서 그 바람을 맞이하고 싶은 날이다.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해안가를 돌다 보면 자전거여행을 하는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때론 그냥 제주를 한 바퀴 도는 것을 목표로 하고 페달을 쉼없이 밟아대는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넉넉하게 제주의 품에 안겼다 돌아가는 이들은 자전거여행가 혹은 도보여행가들이었다.

 
▲ 동북지역 한 야산에 있는 무덤가에서
ⓒ 김민수
 
무덤마다 동자석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도굴꾼들에 의해 많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아마 동북지역 어느 무덤가에 있었던 이 동자석도 본래의 동자석들과는 조금 다른 이미지로 다가온다. 후에 만들어진 동자석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올곧게 서 있지 못하고 누워 있다. 그가 누워 있다는 것은 이 무덤이 오랫동안 후손들에게 돌봄을 받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봄비가 내린다. 봄비가 내리지 않았어도 이미 완연한 봄일 제주, 유채밭과 마늘밭과 쪽파밭이 한창일 제주, 봄감자를 심기 위해 정갈하게 돌담밭을 갈았을 제주, 그 제주를 봄이 가기 전에 가고 싶다.

제주의 봄은 아픈 역사들로 채색되어 있지만 여전히 그 아픔에도 불구하고 살아온 이들이 있다. 그 곳을 고향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 이번 봄에는 그들을 만나 바닷바람 섞인 대화를 나누고 싶다.

 
 
이 기사의 사진들은 2004년 3월과 4월에 담은 제주의 풍광들입니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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