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영의 참회록: 사랑과 용서만이(4)]

자랑스런 내 조카 미자에게

서울에 있는 한 동지로부터 나의 <6학년을 맞이하여>라는 글에 대한 소감의 하나로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란 곡을 보내어 왔더구나.

추억이란 어떤 냄새나 색깔 또는 소리와 함께 강한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즉 '연상'(association)이라는 학습기제에 의해서 뇌의 표면으로 부상하는 것인가 봐.

'엘리제를 위하여'란 곡은 너희들 중3 클래스에서 많이 듣던 곡이었지. 나는 영어를 가르치다 말고 지루해 하는 너희들을 일깨우기 위해서 이제 막 피아노를 배우는 너의 급우들 중 자원자를 골라내어서 교실앞에 놓여 있는 피아노를 치게 했었지. 그러면 어김없이 모두들 이 곡을 선택하고는 정말로 열정적으로 치곤했지. 나는 지긋이 눈을 감고 열청을 하는 총각선생이었고...

가끔 라디오나 TV를 통해서 이 곡을 들으면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가곤 하지, 요즘도 말이다.

나의 어머님이 병석에서 기동을 자유롭게 못하게 되었을 때(1996년 봄) 아버지에 대한 궁금증을 많이 물어 보곤했지.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진 1950년 8월(음력 칠월 칠석)은 내가 만 세살 하고 반년 정도 지난 상황이었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나에겐 '토마토'밖에 없어. 얼굴은 전혀 기억하질 못해. 단지 남겨진 아버지 사진 유품들을 챙겨 보면서 익혔을 뿐이야.  토마토는 우리 말로는 '일년감'이라고 불렸지.

제주농업학교 축산과를 나온 아버지는 모슬포 집으로 돌아와서 오로지 농사일에만 매달렸어. 아마도 농촌 개혁을 자신이 배운 새로운 기술로 시작하려고 했던 것같아. 우영팥(=집뒤에 딸린 텃밭) 주변에 숙대나무를 둘러서 심었고 또 비파나무와 하귤 몇 그루가 심어져 있었어. 그리고 상당 부분은 토마토로 꽉차 있었다.

그해 8월은 정말로 토마토의 빨간색으로 우영팥을 물들였던 기억이 나. 나는 그 토마토 밭에 들어가서 헤집고 다녔어. 마치 강아지 새끼 모양. 나의 목적은 커다란 토마토는 느끼하고 맛이 없어서 요즘 많이 보는 것 같은 '새끼 토마토'(=방울 토마토)만을 따 먹었어. 참 맛있었다. 아버지가 애써 세워놓은 지지목을 모두 쓰러뜨리니까, 야단맞던 것 밖에 기억이 없는 것 같아.

아버지는 군경에 의해서 연행되기 바로 전날 저녁 모슬포 절간 옆 바당(=바다) '석회통' (일제 때 식수를 얻기 위해서 시멘트로 만들어놓은 사각물통)이란 샘물에서 목욕을 하면서 사진관(경우 사진관)하는 친구에게 부탁을 했다고 하더군, '우영팥에 토마토가 건사하게 익어서 보기가 좋으니 카메라를 메고 와서 가족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더군. 그 친구분이 뒷날 아침 일찌감치 카메라를 메고 집에 와 보니 친구가 어젯밤 무장한 군경에 불려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그래서 그냥 사진도 못 찍어주고 돌아갔다고...그 분이 아버지 제삿날에 와서 나에게 어릴 적에 전해준 얘기야.

어머님은 그해 토마토 판매 대금을 내가 대학 입학할 때(1965년)까지 고이 간직해 두었단다.

병석에 있는 어머님에게 물어 봤지.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데도 나는 찾지도 않았는 지? 나는 몇날 며칠 동안 울고 불고 했던가봐...그리고는 까마득하게 잊혀져 간 거라고...

너의 어머님은 어릴 적 우리 아버지 심부름을 하면서 주로 우리집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고 하더구나. 수확한 토마토를 제주성내에 있는 시장 아줌마에게 배달하는 임무를 맡았었다고 회상하더라. 심부름한 대가로 용돈을 받았는데 그것을 너의 외할머니가 모두 챙기는 바람에 어린 마음을 꽤나 섭섭하게 만들었었다고 ...

내가 고2때(1964년) 생물 학과목 담당으로 김병언 선생님이 부임해 오셨어. 한 번 교실 복도에서 단 둘이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너의 아버지와 농업학교 동창이고 동기다. 공부 열심히 해라"고 하시더군.

세월이 한참 많이 흘러서 2000년 봄 어느 날 그 선생님을 다시 찾아갔었지. 두툼한 제주경찰국 비밀문서(1950년) 뭉치를 들고...그 속에는 그 선생님도 나의 아버지가 연행되던 그 무렵 성산포 경찰서에 '예비검속'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서였지. 1947년 3월 11일 '총파업'에 가담한 이유로 구속되었었다고 하더구나. 그 선생님께 나의 아버지가 학생 시절 소위 '운동권'에 속했었나고 물어봤었지. 전혀 그런 경력이 없다고 하더구나. 그 때 당시의 "삶은 삶이 아니었다..."고 하시면서 목메이고 말더구나.

그 선생님은 1990년 초반에 이제 막 '제주4.3사건 진상규명' 운동이 일어날 무렵 유족회 회장을 맡게 되고 우리 아버지 공동묘역(상모리, 백조일손 지지)에 '위령비'를 재건하는 일을 하셨다고 들었어. "나의 친구도 여기에 묻혀 있다..."는 기념사를 했다고...

집에서 농사만 짓고 있었던 나의 아버지는 김상화 대정면장의 간곡한 권유로 공무원이 된거야, 대한민국이 막 탄생할 무렵인 1948년 8월 15일 경이야. 아버지는 극구 사양했다고 하더군. 김상화 면장 동생인 김우필씨가 있었는데 그 분하고 아버지는 절친한 친구. 같은 동료 직원이 된 거야.

이 두분은 모두 4.3때 허욱(육군대위)에 의해서 체포되고 '대촌'(오무라)병사에 끌려가서 고문 끝에 김우필씨는 영락리 속칭 '도꼬못' 근처에서 총살되었다.  김상화 면장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대구형무소로 간 기록이 있더군.  그리고 1950년 7월 27일 "군에 인계"되었다는 대구형무소 기록이 발견되었어. 군에 인계되었다는 것은 곳 총살을 의미하는 거다.

너의 어머님 말로는 모슬포 경찰서에 못된 이북출신 형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자가 우리 아버지를 찾아와서 늘 괴롭혔다고 하더구나. 그러면 아버지는 뭘 자꾸 집어 줬다는 거야. 그러던 어느 날 또 그 형사가 찾아 왔었는데 '푸대접'을 하고 돌려 보냈다고 하더군. 그 형사가 돌아가면서 '두고 보자'고 벼르더라는 거야.

아마도 사적 감정을 악용, 나의 아버지는 소위 '반관감'(경찰에게 안 좋은 감정을 품는 것)을 포지한 자로 낙인 찍혔나봐. 당시 '예비검속' 관련 서류들을 면밀하게 분석하다 보면 이런 분류가 종종 등장하거든.

나의 아버지는 대정면사무소 '사령원부'에 보면 1950년 8월 19일까지 근무한 기록이 나와. 그 기록은 너의 외사촌 맹철이가 찾아 줬어. 최근까지 대정읍사무소 총무과에 근무하고 있었지. "사무형편에 의해서 면직함" 이렇게 되어 있었어.

아버지 동료였던 서림에 거주하는 문형옥(전 대정읍장)씨도 찾아가서 장시간 인터뷰를 했었지. 그 분 얘기로는 당시에 대정면사무소에 서북청년단 출신 면서기가 한 사람 파견나와 있었다고 하더군. 주로 호적계 보조일을 했다고 하면서...'아주 고약한 자'라고 하더군. 대정면사무소 직원들은 당시 '절간창고'에 예비검속된 사람들을 위해서 방역활동을 했었다고 하더군. 나의 아버지와 함께 연행된 좌용운(면서기)씨도 하룻 밤도 구속된 적이 없었다고 하더구나. [문형옥씨는 나와 인터뷰를 하고 난 후 몇 개월 안되어서 돌아가셨어. 마치 내가 찾아오기를 평생동안 학수고대하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야. 깊이 간직해 뒀던 비밀을 모두 나에게 얘기해주고 떠나셨어.]

당시 대정면장이었던 허만필씨도 제주시 그의 큰아들 집에 찾아가서 만났었지.

"너의 아버지와 좌서기가 군에 끌려가서 단 하루라도 구속되어 있었더라면, 내가 찾아가서 살려낼 수 있었지..."라고 회상하더구나.

[이 분도 나를 만나고 얼마 안되어서 저 세상으로 떠나 가고 말았어. 다 끊겨 토막이 난 필름을 다시 붙여 상영하듯이 간간히 얘기가 이어졌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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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겨울 대정 초등학교 운동장에 함박눈이 가득 내렸다. 수업하다 말고 쉬는 시간에 나아가서 아이들과 어울려 눈쌈박질을 했다. 내가 단단하게 손바닥으로 굴려서 만든 눈볼을 한방 날렸을 때 한 학생의 얼굴에 명중했다. 두 방도 아닌 단 한방이야. 그 아이는 앙앙 울면서 달려가서 자기 담임선생에게 고자질했다. 그 학생 담임 선생이 나를 교실로 불러들여서 모든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호통을 쳤다. [그 학생의 이름과 얼굴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 그의 아버지는 모슬포 농협의 조합장이었고...당시 모슬포에서는 잘 나가는 유지급이었단다.]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진 그 선생님 앞에  불려간 나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서 고양이 앞에 선 쥐새끼 모양 벌벌 떨었어. 그렇게 당황해 본 적은 처음이야.

"아버지 이름이 뭐야?"

"아버지 없습니다"

"호로자식이구먼!"

'호로자식?' 그것이 홀어머니 자식이란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그 순간부터 '아버지'를 잊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왜 우리 곁을 떠나셨나요?'

좀더 커서는 아버지가 그리울 때는 달밤에 '백조일손지지'를 찾아가곤 했다. 캄캄한 밤에는 무서워서 찾아가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애타게 물어봐도 이름을 큰 소리로 불러봐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나의 어머니는 평소에 "너네 아방은 꿈에도 시꾸지 않더라"고 했다. 꿈에라도 나타나서 왜 죽임을 당했는지 말해 주었으면 했더란다.]

그후 나는 아버지란 존재의 형체만이라도 있었으면 하고 바랬었지. 고등학교 때는 안현필 선생이란 제주출신이 영어 참고서 씨리즈를 만들어 내놓았어. 참으로 인기가 있었지. 나도 그 참고서로 영어를 많이 배우고 또 거기에 까십으로 실린 좋은 얘기들을 열심히 눈여겨 익혔어. 그 선생의 이름자는 나의 아버지의 이름자와 한자로도 똑같았어. 참 드문 이름이였거든. 내 아버지가 일본으로 잠적했다가 성을 고치고 변신해서 서울에 나타난 줄로 알았어. 찾아가서 만나보고 싶었어. 그랬기를 오랫 동안이나 바랬어. 고려 패망 때 왕건의 후예들이 옥(구슬 옥)씨도 되고 전(밭 전)씨도 되고...한 것처럼 착각도 했었어. 이(오얏 이)씨는 나무 밑에서 놀고 있는 남자아이라면 안(편안 안)씨는 집에서 일하고 있는 여자아이? 이렇게 쉽게 변신할 수 있잖겠어...그게 나의 상상이자 착각이었지. 착각이 진실이길 절실하게 바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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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할아버지의 평생 사업도 아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이었지. 할아버지가 다 못한 그 유업을 내가 물려받았어. 제주에 다시 돌아간 1997년부터 시작하여 지금 10년째 그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꺼야. [할아버지는 내가 대학교 4학년때 돌아갔다. 1969년 5월. 할아버지는 1956년 5월 모슬포 섯알오름 백조일손 유해발굴을 기점으로 돌아가실 때 까지 유족회를 대표했었지. 탄압도 많이 받았다. 백조일손은 할아버지가 고안하고 유족회에 제안하여 붙여진 묘비명이었어. 1960년에 세워진 묘비는 그 뒷해 5.16 군사 깡패들에 의해서 산산조각이 났단다. 그 잔해는 내가 귀국해서 성담속에 묻혀진 것을 도로찾아 놨다. 왜곡된 역사도 바로 잡았고...]

2000년 1월 NHK 서울 지국장과 이 아무개라는 여기자를 서울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나에게 붙여준 별명이 있었지, "외로운 투사"라고...나는 그 별명을 나의 할아버지에게 붙여드렸던 것인데...나의 학위 논문 프로롤그(서문)에서. 그들이 나에게 도로 돌려주더구나. 참말로'외로운 투쟁'이야. '투쟁'이라고 하기 보다는 '진실추구'라고 해야겠지. 투쟁이라고 하면 싸워야 할 상대가 있어야 하거든. '고독한 진실추구'란다. 말이 되나 모르겠다. 어떨 때는 '아빠 찾아 십만리'란 생각이 스쳐가, 문득 문득...

서울의 박도 선생님(현재 강원도 홍성 거주)은 나의 스토리를 듣고는 "섬소년이 민간인 학살 추적자가 된 사연"이란 글을 <오마이뉴스>에 올린 적이 있다. 그 선생님은 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 추적을 위해서 메릴랜드 소재 미국정부문서 기록보존소에 찾아와서 만나서 함께 활동한 적이 있어. 오늘 현재 그곳에 세 번째 답사를 오셨어. 물론 다른 주제(한국전쟁)를 가지고 오셨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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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랗게 익은 감귤을 보면 서귀포 옛 애인이 연상되고...[겨울 방학 때 그녀의 집을 찾아가면 감귤을 한 바구니씩 나에게 대접하곤 했지].

지금도 나는 빨갛게 익은 토마토를 보면 나의 아버지를 연상한다. 지난 여름 나의 농장에도 토마토가 빨갛게 주렁주렁 달렸었다. 올 봄에도 날씨가 풀리면 그 토마토를 심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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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건강상에 '노랑' 경고등이 켜졌다. 어제 주치의로부터 혈액검사결과 '정밀검사'를  다시 받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어제 저녁 뉴욕에서 일주일 동안 짧은 휴가를 보내고 메릴랜드 농장으로 돌아왔는데 오는 목요일 다시 뉴욕으로 come back하란다.

▲ 이도영
지난 일요일 밤, 뉴욕에 있는 한인들끼리 모임인 한 테니스 클럽에서 대회가 열렸는데, 거기에 더불로 출전해서 '2007년 참피언'을 먹었다. 그 정도로 나는 건강한데 말이다...그러나 아직은 '집행유예'기간이란다. 명심해야지. 항상 건강에 유념하며 열심히 살고 있다.

장성하여 이제 국군이 된 승환이와 승진 그리고 두 아들을 애쓰게 키워서 군대를 보낸 너의 타는 맘을 안위케 해 주시라고 '높은 분께' 날마다 기도하마, 그들이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2007. 3. 6.

메릴랜드에서 도영 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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