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집 창문 너머로 별을 보다⑤] 드디어 흙벽이 올라가다

봄비가 내렸다. 봄이 왔지만 개운치 않았던 맘이 풀려버렸다. 진입로에 심어놓은 잔디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해 질퍽거려 불편하다. 그래도 개운하다. 진정한 봄은 역시 봄비로부터 시작된다.

오늘밤 수많은 새싹들이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겠지. 가만히 눈감으면 생명의 싹들이 기운차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동서남북이 온통 생명의 소리로 가득 차 있다. 인간들도 덩달아 기운이 넘친다. 고마운 봄이다.

▲ 보름달 달빛에 비친 흙집  사진-김용철

들꽃들을 심어놓은 마당에서 호미질을 하다가, 장독대를 만들다가, 텃밭 만들 곳에 장작난로에서 퍼 온 재를 뿌리다가 허리를 펴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간다.

어느새 또 하루가 지나간다. 아궁이로 가 장작 한아름 넣고 불을 지핀다. 굴뚝으로 연기가 피어나기 시작한다.

거실에서 책꽂이로 쓸 재료들에 대한 재단이 끝났다는 드로의 신호가 온다. 드로(막내처남의 애칭이다)는 타고난 눈썰미와 손재주를 가진 이십대의 젊은 목수다.

원형의 거실에서 어떻게 하면 잘 어울리는 책꽂이를 만들까 며칠을 고심했다. 인터넷으로 외국의 책꽂이들도 검색해보았다. 딱히 맘에 드는 책꽂이가 없다. 고민 중에 매주 금요일이면 나가는 ‘모록밭목공교실’에서 답을 얻었다.

목공교실 연 선생님과 의논하던 중에 통나무를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써서 만들어보기로 한 것이다. 마침 시간이 있다며 연 선생님이 직접 흙집으로 와서 기본 틀을 세우는 걸 도와주셨다.

▲ 완성된 책꽂이 사진-김용철

책꽂이의 기본 틀은 자작나무를 썼다. 조경용으로 심어놓았다가 죽은 나무를 얻어다 보관해 오던 것이다. 자작나무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나무다. 거실을 온통 자작나무로 덮어놓아도 싫증날 리 없다. 기본 틀을 만들어 놓은 것에 오늘은 판을 대고 고정을 시켜 마무리했다.

만들고 나니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자작나무 기둥에 삼나무 판과 떼죽나무, 벚나무 가지 등이 쓰였다. 삼나무 판을 제외한 나머지 나무들은 모두 버려진 나무들 중에서 골라낸 것들이다.

아이들이 커가며 내가 가졌던 꿈 중의 하나는 집안을 온통 책으로 덮어놓아 아이들이 책의 바다에서 숨쉬고 뒹굴고 장난치게 하는 것이었다. 책을 읽어도 좋고 읽지 않아도 좋다. 언젠가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세상의 이야기를 손에 잡을 것이니 조급해할 이유가 없다.

집안에서는 책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집 밖에서는 끝간데 없이 펼쳐진 한라산 숲을 휘달리며 자라게 하고 싶었다. 그 첫걸음을 이제 내딛는 것이다. 어찌 보면 별것 아닌 책꽂이 하나 만들면서 괜히 가슴 설레는 건 꿈꾸던 무언가를 이제 시작한다는 기쁨 때문이다.

▲ 삼나무를 반으로 쪼개서 대패질만 해 놓은 문틀

작년에도 꼭 이랬다. 흙집의 설계도를 그릴 때도, 기초를 만들어 나갈 때도 그랬다. 하지만 모든 준비 작업을 끝내고 흙벽을 쌓아 올라갈 때의 환희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뿌듯함이 있었다.

▲ 집안에 달 문은 옛 문들을 수집해 놓았다 .

습기 많은 제주에서도 훨씬 더 습한 산중이라는 조건은 흙벽을 쌓아 올리는 데는 큰 부담이었다. 장마 전에 지붕을 올리지 못하면 바람을 동반한 많은 비에 흙벽이 무너질 가능성이 컸다. 혼자서 흙벽을 쌓아 올린다면 장마 후에 시작해서 얼음이 얼리기 전에 벽을 다 쌓아야 하는데 중간에 다가오는 태풍이 문제였다.

▲ 흙덩이를 이어 나른다. 흙집 짓기는 서로 호흡을 맞추어 작업해야 하는 일이 많다.

나에게는 중장비도 없다. 제주에서 오로지 두 손만으로 모든 과정을 혼자 진행하는 건 나에겐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동네에서 집을 지을 때면 모두가 모여들어 후딱 해치웠겠지. 바람 많고 비 많은 제주는 기후조건 때문에 더더욱 서로 돕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 흙덩이를 모아 놓는 아내

결국 흙벽을 쌓아 올리는 건 흙집을 같이 연구했던 동기생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세 사람이 흔쾌히 제주까지 와 주었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지내다가 서귀포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승범형은 드로와 문틀을 세우고 나머지는 흙벽을 쌓기로 했다.

▲ 드디어 세워진 문틀

햇살 맑은 봄날에 흙벽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미리 준비해 놓았던 두꺼운 삼나무 원목 문틀이 기초 위에 세워졌다. 통나무를 중간 중간 넣고 흙을 다져서 쌓아올리는 통나무 흙담집 방식의 흙벽이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다.

▲ 흙벽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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