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 걷는 길(하)

자, 이제 외돌개에 거의 다 왔다. 외돌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가장 오래된 관광코스이고, 제주를 찾은 관광객이라면 한번쯤은 들러본 곳이 외돌개다. 그래서 더욱 잘못 알려진 곳이 또한 외돌개이기도 하다.

어느 바닷가 마을의 아낙이 고기잡이배를 타고 나갔다가 풍랑을 맞은 남편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돌이 되고 말았다는 바위 하나만 보고서 외돌개를 봤다고, 안다고 생각하면 그건 정말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외돌개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솔숲이다. 그리고 솔숲 사이로 보이는, 그 아득한, 바다다. 제주섬이 얼마나 육지와 떨어진, 고립되고 단절된 곳인가를 새삼 일러주는 곳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감옥에서 악화된 신장염 때문에 제주에서 일년쯤 휴양인지 투병인지를 하고 있던 동안에 이곳 바다를 자주 찾았더랬다. 저 멀리 보이는 육지를 언제면 건강해져서 다시 갈 수 있을까, 젊은날엔 바다만 아득한 게 아니라 내 앞날이 아마득했다. 막막하고 헛헛하고 외롭고 쓸쓸한 시절, 바다는 내게 친구이자 애인이자 말벗이 되어 주었다. 그 사랑하던 바다 앞에 나는 중년의 나이가 되어 다시 섰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끊어내지 못한 사회에 대한 관심을, 끓어오르는 욕망을, 솟구치는 분노를! 그 모든 것을 파도는 다 들어주고 내 등을 다독이고 내 마음을 쓸어내렸다. 바다는, 어머니의 품이고 아버지의 등이었다.

   
 
 
촌스럽지만, 또 촌스러운 게 남는다는 일념으로 외돌개에서 몇 여자가 기념사진 한방! 국민사회자 최광기는 카메라 앞에서도 뭔가 떠들고 있다.

   
 
 
외돌개 앞 간이매점에서 모주와 파전 한 접시. 곁들이로 붕어빵! 좁쌀 막걸리는 긴 산보 덕분에 맛을 더했고 부두에서 잔뜩 먹었는데도 파전이 맛있다고 일행은 또 난리였다. 양희은 선배가 가장 감탄한 먹거리는 붕어빵이었다. 뭐 찹쌀을 넣어 반죽해서 쫀득쫀득하고, 속에 든 팥앙금이 진짜 제대로 된 거라나. 한시간 전에 밥 한그릇씩 꽉꽉 채워넣고 파전에 붕어빵까지 먹는 실력 앞에서 먹는 거 좋아하는 나도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했다.

   
 
 
외돌개에서 서귀여고 뒷편까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책길'이 1킬로미터쯤 이어진다. 이곳에선 '돔베낭길'이라고 하는데, 바다를 주욱 곁눈질하면서 해풍에 머리를 휘날리면서 걸을 수 있다. 유채꽃까지 덤으로 조경되어 있다. 푸른 바다, 검은 절벽, 노오란 유채꽃.....그림이 따로 없다. 빨간 머플러의 이 여인은 누구? 상편에서 칼호텔 돌담을 뛰어넘은 여인네도 똑같은 의상이었던 것 같은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전망 앞에서 이번 '서귀포 카미노'를 끝내다. 저 뒤에 배경처럼 보이는 게 섶섬이다. 양희은 선배는 두 시간여에 걸친 서귀포 산책을 마친 뒤에 내게 '명토박아'(이럴 땐 이 단어가 딱 어울린다) 말했다. "명숙아, 너 말년에 서귀포 관광가이드 하고 살아라."

양선배가 어느 나라엔가 갔을 때 전직 대사 부인이 고향에서 관광가이드를 하는데 너무나 자기 마을을을 자랑스러워하면서 보람있게 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면서, 그리고 서귀포처럼 아름다운 고장에서 자라난 사람으로서 그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면서.

허걱, 길을 만들고 조그맣고 소박한 알베르게(묵는 집)을 운영해볼까 하는 생각은 있었지만, 관광가이드까지!
하여간 이번 짧은 여행에 동참한 이들은 저마다 개성만발한 여자들이었지만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사안에 대해서만은 완전한 의견일치를 보았다.

1. 제주도에 걷는 길을 만들면 '산티아고 길' 못지 않은 대박이 예상된다. 3일코스, 일주일 코스, 열흘 코스, 이주일 코스, 입맛대로 골라잡을 수 있도록, 한라산과 중산간 마을과 오름과 바닷가 마을을 주욱 연결시키는 거다. 환경도 보존하고, 머무는 관광으로 '돈도 자발적으로 쓰게' 유도할 수 있어, 값싼 중국 관광으로 위협받고 있는 제주도 관광의 새로운 활로가 될 수 있다. 가파르고 빠른 도시의 속도감에 지치고 휘둘린 현대의 직장인에게 '슬로우 제주'는 21세기판 이어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 서귀포는 일단 길이 다 되어 있는 거나 다름없으므로 1박2일 코스를 만들자. 근데 표지판을 왕창 크게, 균일하게 만들면 또 망한다. '산티아고 사인'처럼 아주 조그맣고, 귀퉁이에, 숨은 그림찾기 처럼, 예쁘게 그려넣는 거다. 갈매기든 밀감이든 서귀포나 제주를 상징하는 로고를 정해서.

아, 걷느라, 먹느라, 제주 관광의 대안을 모색하느라, 무척 생산적인 1박2일이었다.

어때요, 여러분도 서귀포 산책 즐거우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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