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전세가 역전되다... "우리 각시는 정말 귀엽습니다"

 
▲ 우리집 딸 억지대장 강지운입니다. 코를 잘 흘리는 녀석입니다.
ⓒ 강충민
 
우리 집 아침풍경은 거의 고정되어 있습니다. 새벽 여섯 시 사십 분에 자명종이 울리면 각시와 저는 둘 다 살포시 깹니다. 그러다 서로 눈치를 보며 밍기적거리다 일곱 시가 조금 넘어서야 비로소 이불에서 나옵니다.

저는 냉장고에서 냉수를 꺼내 두 컵을 연속 꿀꺽꿀꺽 마신 후 화장실에 가고, 각시는 욕실에서 먼저 씻습니다. 그 다음 제가 아침 준비를 하는 사이 씻기를 끝낸 각시가 아이들을 깨우고 옷을 입힙니다.

딸인 지운이를 먼저 먹이고 제가 아파트 입구에서 어린이집 차에 태우고 보내는 사이 각시는 원재와 같이 아침을 먹고 저보다 먼저 출근합니다. 지운이를 보내고, 다시 돌아와 후다닥 씻고, 아침을 먹고, 원재와 집을 나서 학교 앞까지 바래다준 다음 걸어서 회사에 출근합니다.

이런 과정들은 하도 익숙해서 톱니바퀴처럼 잘 돌아가다, 제가 간혹 전날 술을 많이 마셔 늦게 일어나면 이탈되게 마련이어서 그럴 땐 각시 혼자서 허둥댈 테지요. 부아가 치밀기도 하겠고요.

그런데 오늘 아침은 이상도 한 날입니다. 어김없이 자명종은 울렸고 이불 속에서 꼬물꼬물하고 있어야 할 각시가 슬그머니 일어납니다. 그리고는 방문을 열고 나갑니다.

채 잠이 깨지 않은 와중에 여기까지는 그런가 보다 하고 비몽사몽 간을 헤매는데 이윽고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칼질하는 소리도 들리고요. 분명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듯 보였습니다. 저는 순간 미안하기도 하고 혼자 이불 속에서 게으름을 피울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 후다닥 일어났습니다.

언제나처럼 냉수를 두 컵 들이마시고 슬쩍 보았습니다. 도마 위에는 채 해동이 되지 않은 고깃덩어리가 있었고 각시는 열심히 그것을 썰고 있었습니다. 압력밥솥에는 이미 밥이 다 되어 압력버튼이 내려져 있었고요. 물에 불린 커트 미역이 싱크대에 놓여 있는 것을 보니 아마 미역국을 끓이려고 하나 봅니다. 원재가 쇠고기 미역국을 참 좋아하거든요.

화장실에서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거사를 치르고 깨끗이 손을 씻고 부엌으로 나가니 갑자기 제가 할 일이 무엇인가 혼동이 됩니다. 각시가 이미 제가 할 일을 먼저 하고 있었으니까요.

고기 썰기를 다 끝냈는지 냄비에는 깍두기 정도 크기의 고기가 참기름에 볶아지고 있었습니다. 그걸 보고 각시에게는 먼저 씻고 애들도 씻기라고 하고는 재빨리 가스레인지의 불을 껐습니다. 깍두기 크기의 고기를 보고 기겁을 한 것입니다.

그것들을 집게로 꺼내 일일이 다시 잘게 썰었습니다. 물에 불린 미역도 같이 썰고는 새 냄비에 참기름을 붓고 그것들을 넣고 달달 볶은 다음 국을 끓이기 시작했습니다. 커트 미역이 아니었다는 것을 각시는 알았을까요?

 
▲ 돼지고기미역국입니다. 그래도 꽤 먹을 만 했습니다. 나중에도 종종 만들어야 겠습니다.
ⓒ 강충민
 
 
▲ 만 40세의 생일케익입니다.
ⓒ 강충민
"원재야. 너 좋아하는 소고기 미역국이다. 빨리 나와."

방에서 늦장 부리는 원재를 재촉하였고, 먼저 먹은 지운이는 아파트입구에서 어린이집 차에 태웠습니다.

다시 집에 들어오니 원재가 혼자 알림장을 보며 책가방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침도 안 먹고 갔어. 월요일이라 빨리 가야 된대."

각시가 평소보다 이십 분 정도 서두른 덕에 아침이 상당히 여유가 있습니다. 참 별일이다 싶더군요. 물론 제대로 빛을 발하진 못했지만….

재빨리 씻고 원재와 마주앉아 식탁에 앉았습니다.

"엄마가 너 좋아하는 미역국 끓이려고 일찍 일어났나 봐."

원재에게 한마디 해 줬습니다.

"그럼 이거 엄마가 끓인 거?"

원재는 맛있게 미역국을 먹으며 동그랗게 눈을 뜨고 저에게 물어봅니다.

"응. 시작은 엄마가 했어."

간이 맞았는지 제대로 확인하며 원재에게 말해주었습니다.

"근데 아빠 소고기가 왜 이렇게 비계가 많아."

평소 원재는 음식을 가리지 않는데 자꾸 비계를 식탁 위에다 골라냅니다. 그러고 보니 고기를 잘게 썰 때에도 비계가 참 많다는 생각은 얼핏 들었습니다. 쇠고기 맛도 안 나고요.

원재의 말에 순간 고기의 출처도 의아했습니다. 음식재료를 구입하는 것은 거의 제 담당인데 요즘 쇠고기를 구입한 적은 없었으니까요. 냉동실에 있는 고기는 명절 때 산적을 하다 남은 덩어리 돼지고기밖에 없는데….

아! 그랬습니다. 각시는 랩에 쌓인 돼지고기를 쇠고기로 착각을 하고 미역국을 끓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냉동실에 오랜 기간 두어서 색깔이 선명하지 않아서 그럴 만도 했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침밥을 먹는데 자꾸 웃음이 나왔습니다. 좀 전의 깍두기 크기의 고기가 생각났고, 커트 미역인지 확인하지도 않은 각시가 생각나 웃음이 나왔습니다. 더구나 돼지고기를 쇠고기로 착각하는 센스까지….

"아빠 왜 웃어?"
"아니 그냥…. 원재야. 엄마 참 귀엽지…."

혼자 키득거리다 원재에게 생뚱맞게 물었는데 녀석은 뜻도 모르고 그 말에 동의합니다.

"맞아. 우리 엄마 참 귀여워."

그렇게 돼지고기 미역국을 곁들인 아침식사를 끝냈습니다. 원재와는 교문 앞에서 헤어졌고 걸어서 회사에 출근했습니다. 늘 그런 것처럼요. 각시는 이마저도 먹지 못하고 출근했고요.

평소보다 조금 바쁜 월요일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열 시가 넘어서 공항에 갔다 오고, 점심 무렵 여직원이 한마디 합니다.

"아, 맞다. 아침에 실장님 전화 왔었어요. 오늘 아버님 삭망(朔望)이어서 늦게 출근한대요. 아까 팀장님 공항 가실 때 전화 왔었는데 상담받느라 바로 말씀 못 드렸네요."

작년 10월에 직원들 다 같이 조문한 기억이 납니다. 매월 음력 초하루가 삭망일이니 그때마다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을 떠올리며 다시 슬퍼지겠지요.

그때 순간 제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습니다.

 
▲ 각시가 휴대폰 문자를 보낸 내용입니다. 제가 돼지고기라고 말하기 전까진 까마득히 몰랐답니다.
ⓒ 강충민

"아, 맞다! 내 생일이다."

그렇습니다. 오늘이 음력 2월 1일 내 생일입니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내 생일이었습니다. 비로소 오늘 아침 서둘러 이불을 박차고 나가 밥을 안치고 미역국을 끓인 의문이 풀렸습니다. 그것도 돼지고기 미역국으로요.

점심도시락을 먹으면서도 혼자 킥킥 웃음이 나왔습니다. 허둥댔을 각시가 자꾸 생각났고, 미역국을 끓일 생각을 했으면 점심 도시락까지도 책임졌어야지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한편으론 그런 와중에도 돼지고기인 줄도 모르고 바쁘게 출근한 각시가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점심을 끝내니 한 통의 문자가 와 있습니다.

"생일 축하해. 미역국 끝까지 완성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각시의 문자였습니다. 저는 재빨리 화답했습니다.

"돼지고기 미역국 이벤트 끝내줬어. 짱이야."

이렇게 화답을 하니 바로 핸드폰이 울립니다.

"돼지고기였어? 정말? … 미안해… 어떻게 해. 삐졌어?"

전화기 저편 각시의 목소리는 평소답지 않게 상당히 흥분되어 있었습니다. 정말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아니."

저는 퉁명스럽게 한마디만 했습니다. 은근히 약 올리는 재미도 생깁니다.

저녁때 다시 통화하자고 핸드폰을 끊는데 순간 전세가 저에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돼지고기미역국 사건은 각시와 맞장 뜰 때 두고두고 수세에 밀릴 때 유용할 것이라고요. 그리고 평생을 같이 살아가면서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겠지요.

그러고 보면 우리 각시는 정말 귀엽습니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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