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생명의 은인

내가 태어난 집은 모슬포(상모리와 하모리로 나눠짐)에서도 하모리 가장 윗동네 일곱 채 가옥이 뚝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모두 고부이씨 종친들끼리 모여 사는 곳이었지요.

나의 집에서 바닷가에 가려면 한 참을 걸어서 내려가야 하지요. 어렸을 적 거리감각으로는 꽤나 멀었지요.

당시에는 수돗물이 없어서 모슬포 주민들은 모두 '신영물'이란 수원지에서 식수도 얻고 또 그곳 빨래터에서 빨래도 해야 했습니다. 신영물은 마을 공동체의 중심지였지요. 신영물 깍(끝)에는 상당히 넓은 갯벌이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있어서 뱀장어 숭어 백돔 조개 등의 해물 서식지였습니다. 지금은 그곳 갯벌이 썩은 냄새가 난다고 해서 매립하고 말았고 신영물은 흔적만 남아 있지요. 그 결과가 언젠가는 '대재앙'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밀물 때는 바닷물이 우리 키를 훨씬 넘는 높이로 밀려 와서 식수원은 작은 석회통(시멘트로 만든 사각통)만 남기고 잠기고 말지요. 여름 철에는 동네 아이들의 수영장이 됩니다. 신영물 밖에는 성담을 둘러서 재법 안전한 수영장이었지요.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였나 봅니다. 무더위를 피해서 웃뜨르 촌놈이 겁도 없이 그 수영장에 놀러를 갔답니다. 동네 아이들이 적어도 5~60명은 족히 물장구도 치고 물쌈도 하고 난리법석이었습니다. 나는 그 수영장 상태도 잘 모르지만 헤엄도 칠 줄 몰랐습니다.

빨래터 윗쪽에는 디딤팡(디딤돌)이 있어서 높았지만 그 바로 밑에 수로는 상당히 깊었습니다. 물이 성담 높이로 꽉차 있어서 나는 그것을 구분하지 못했지요.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는데 앗차 실수로 그 수로 깊은 곳으로 헛발을 디디고 말았지요. 안간힘으로 디딤팡 위로 올라 오려고 발버둥 쳐 봤지만 허사였고 목구멍으로 바닷물이 꿀꺽 꿀꺽... 숨을 쉴 수도 없었고 살려달라고 소리를 칠 수도 없었습니다.

내가 물에 빠져 죽어가는 지를 주변 아이들이 아무도 몰랐던가 봐요, 한 참을 혼자 숨박꼭질을 하고 있었는데, 천만다행으로 꼬마 여자아이가 잽싸게 헤엄쳐 와서는 나의 손목을 잡고 건져내 주었어요. 까마잡잡하고 야무지게 생긴 꼬마였어요. 나중에 누가 얘기해주는데 대정초등학교 3학년이라더군요.

'참, 고맙다'고 말도 못하고 부끄러워서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 나오곤 그 여름동안 거기를 두 번 다시 가질 않았답니다. 헤엄을 못 치는 것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어요. 그 꼬마 여자아이가 부럽기도 하고.

나는 그 여름 방학이 끝날 때까지 우리 집에서 동일리 쪽으로 가는 쇠물통(소물 먹이는 저수지)에 가서 혼자 열심히 개구리들과 함께 개구리 흉내를 냈지요. 저녁 무렵에는 동네 쇠(소)들이 거의 모두 몰려와서 물을 먹고 똥 오줌을 싸고 가기 때문에 냄새가 그렇게 썩 좋지가 않았지요. 그래도 그 정도의 '굴욕'은 참고 견디어 내야 했답니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에는 이제 재법 헤엄을 칠 수가 있었답니다.

다음 여름방학 때부터는 큰 바다로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무렵에는 자신도 모르게 '바닷 개구리'가 되어 갔지요.

바닷 개구리가 된 이후에도 나는 바닷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일을 몇 차례 더 겪어야 했답니다. 바다에 대한 '오만'이 문제를 야기했지요.

   
 
 
지금도 그 꼬마 여자아이에게 '살려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은데, 지금은 거의 60을 먹은 할머니가 되었겠네요. 그 아이는 그것을 까마득하게 잊어져 갔겠지만, 나는 바닷물을 바라볼 때마다 그 추억을 되새기곤 하지요.

지금 나를 '환란에서 건질 자' 그 누구인가? 곰곰히 생각하면서 그 보이지 않는 '손길'을 사모하고 기도하고 있답니다.

숨쉬는 나머지 시간 동안 열심히 못다한 할 일을 해야 겠고 여러가지 핑계로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사람들을 더욱 더 사랑해야 겠습니다.

모두의 건안과 건투와 건승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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