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 제주인]이길신 회장의 ‘저팬드림’
가정교육으로는 한글교육 한계·…특별도·대학 지원 절실

제주대신문이 지난 겨울방학 동안 '재일제주인'의 삶과 문화, 그리고 미래에 대한 모습을 기획 취재했습니다. 이번 기획취재에는 이경주 기자와 김희선 기자, 김화영 기자가 참여했습니다. 일본 동경에서 살고 있는 재일제주인의 모습을 총 10회 걸쳐 제주의 소리에서 연재합니다.

저팬 드림의 상징이 되고 있는 이길신 회장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리가 고향인 이길신 회장(68)은 14세에 맨손으로 일본에 건너가 온갖 궂은 일을 하며, 돈을 벌어 지금은 일본 동경 일대 빠칭코 사업체 8곳을 운영하는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재일동포의 ‘저팬 드림’ 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이 회장은 일본에서 살고 있던 13살 터울인 형과 함께 살기 위해 도일했다. 당시 제주는 형편이 매우 어려워 끼니를 걱정해야 할 시절이었고, 학업을 계속 이어나가는 것도 무리였다.

형은 일본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그의 학비를 대주었고 그 덕에 일본 학교에서 중, 고교 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하루하루를 눈물로 보냈다.

# 한때 숨겨야했던 고국

그의 친구들 대부분은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 가정교사와 같은 일을 하기도 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장학금을 받기도 하며 학업을 마쳤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 역할을 해 오던 형이 어느 정도 잘살았기 때문에 학업을 마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고등학교까지 나온 내 친구들은 한국이름을 부끄럽게 생각했어요. 그 시절에는 대부분 한국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살았고 일본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와서 우리가 한국인임을 알게 되었을 때는 곤란한 부분이 있었지요.”

그러나 그는 일본 학교를 다니면서 일본의 한국인에 대한 차별과 관련,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는 차별에 대한 느낌은 대부분 한국인이라는 열등감에서 오는 것이라고 봤다.

“조센징이라는 단어의 존재 자체가 차별의 의미를 가지기는 하지만 일본 사람들은 한국인 앞에서 대놓고 조센징이라 칭하지는 않았고 한국인 앞에서 사람을 봐가면서 조심하는 부분도 있기는 했지요.”

# 빠칭코로 일군 저팬드림

   
 
 
흔히 재일동포 사회에서는 빠칭코, 음식점, 사채놀이를 ‘3대 사업’ 이라고 부른다. 이 회장은 돈 가진 사람만 즐기는 ‘빠칭코’ 가 아니라 재일동포를 위한 건전한 오락실을 표방했다. 이 회장의 빠칭코는 재일동포가 밀집해 있다는 지역적 이점과 서비스 정신으로 번창했다.

이 회장은 처음 이 사업을 준비할 때 지인들로부터 500만원을 빌려 오락 기계들을 들여놓고 시작했다.

 “빠칭코 사업을 하게 된 것은 현금장사라는 이점도 있지만 당시 한국인들은 직업적으로 차별을 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나서서 하지 않는 빠칭코 사업이 아니고서는 다른 일을 해서 먹고 살 길이 없었어요”

“지금은 빠칭코가 하나의 기업처럼 인정이 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빠칭코 사업을 시작할 때 가족들의 반대도 있었죠. 이 일을 처음 시작하였을 때, 이것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길이 없다는 일념으로 최선을 다해 일했다”고 말한다.

그는 손님의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그가 운영하고 있는 이곳에 오게 할 것인가를 계속 생각하여 서비스를 개선해 나갔다고 한다.

“내가 구입한 가게 근처에는 노무자가 많은 지역이었어요. 술을 많이 마시는 그들을 보면서 내가 술을 마신 다음날, 국을 마시면 몸이 풀리는 느낌이 들어 아침 6시면 된장국을 무료로 제공하였죠. 그 사람들 덕분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내가 운영하는 빠칭코가 활성화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오히려 그들에게 감사합니다.”

“저는 모든 직원들에게 빠칭코는 서비스 사업이므로 손님한테 봉사하라는 것을 항상 강조합니다. 또 지역마다 환경이 다르니 주변 환경의 상황에 따라 8개의 각 빠칭코 간부들이 서비스의 내용을 달리하죠. 빵과 커피를 대접하기도 하고 추운 날은 따뜻한 음료를 제공해요”
이러한 서비스 때문인지 아침 10시에 문을 여는 그의 빠칭코 가게 앞에는 항상 사람들이 줄을 이루고있다.

 “무엇보다도 살려고 하다 보니 자연히 좋은 경영방식도 나오게 된 것이죠. 빠칭코업계에서는 최초로 종업원들에게 제복을 입혔어요. 저는 다른 곳에서는 잘 시도해보지 않는 서비스에 대해 철저히 손님들의 입장에서 보고 하자는 생각입니다.”
 
# 재일동포 2·3세 귀화 대세

이길신 회장의 슬하에는 두 형제가 있다. 장남은 일본 와세다 대학 이공계열을 졸업하여 미국회사에서 5~6년 동안 일을 했었다. 지금은 아버지의 사업을 도와주기 위해 빠칭코 회사에서 전무이사를 맡고 있다.

이 회장의 장남은 일본여자와 결혼을 했다. 이 회장은 “한국여자와 결혼하기를 바랐는데, 뜻대로 안돼 섭섭한 마음이 조금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들의 뿌리를 찾는다는 의미에서 우리말을 가르쳤어야 아이들 인식이 달라질 수 있었는데 한국의 전통, 습관을 잘 가르치지 못한 것이 부모로서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원하는 일본사람과의 결혼을 무조건 반대할 수는 없었어요.

아들이 귀화를 선택하더라도 반대는 하지 않을 겁니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일본에서 태어나 그 속에서의 생활이 익숙하여 교포사회, 일본사회에 동화될 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었다.

 “재일동포 2세이지만, 일본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일본인이 된 거죠. 장남에게도 작년에 태어난 자녀가 있는데 일본 여자와 결혼한 사람일 경우, 자녀의 호적을 부인 밑으로 넣는 것이 보통이므로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어요.”

# 어머니 생전 날마다 눈물

   
 
 
그는 도일 후 1965년도에 처음으로 고향을 방문했다. 민단에서 해방 20주년을 기념하는 경축단을 만들어 방문하게 되었다.

 “2,3주 제주에서 머물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때 어머니는 자식 앞에서 눈물도 보이지 않는 강인함을 보이셨어요. 하지만 일본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탔을 때, 멀리서 흰 손수건에 얼굴을 묻은 채 눈물을 흘리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저도 아주 많은 눈물을 흘렸어요.”

그는 고향 제주를 다녀온 사람들에게서 제주의 성장과 변화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특별히 갈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일본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다진 후에 갑자기 나타나서 잘난척하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 싫다고 한다.

 “부모님 산소의 벌초는 제주에 있는 동생들이 하고 있는데,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아들이 부모님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 제주에서의 차별, 그 아픔

제주 사람들이 그들을 같은 제주도민으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에 대화가 단절되고 그 관계가 소원해진 것 같다고 한다. 그는 제주에서의 차별, 일본에서의 차별, 여러 가지 상황이 있으므로 현상만 볼 것이 아니라 실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희선 제주대신문 기자
이 회장은 “재일제주인 1세들의 시대는 이미 끝났고, 이제 곧 2세에서 3세가 주류가 될 것입니다. 이때 교포사회에서 자손들이 민족의 뿌리를 알고 또 선배들이 어떻게 살았느냐를 가르치는 것은 돈을 들여서라도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우리 후세대의 아이들이 우리말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다는 민단의 고민에는 공감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이어나갈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자신의 명예보다 후손을 생각해야겠지요.”

재일동포들은 고국의 정치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민족의 자부심을 가지고 고향을 위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식을 가져야 해요. 남과 북이라는 사상적인 문제로 인해 국가적으로 갈등이 많았지만 앞으로는 민족적인 자긍심을 가지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