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적 요인의 영향을 받는 성역할

언젠가 동료들과 '한능력', '한똑똑' 하는 여성들이 자신의 직업이나 직장에서 최고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아직도 많은 여성들은 우리 사회 여러 분야에서 구조적인 '유리천장'에 막혀 현실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다. 
 

▲ 고산중 교사
누군가 이 문제는 여자들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면서, 엄밀히 말하면 교육의 한계에서 기인한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지속적으로 학습된 성역할 개념이 대다수 사람들의 인식의 틀을 형성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올해 들어 처음 실시한 계발활동 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여자다움'과 '남자다움'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우선, 축구에 대해 전혀 상반된 태도를 가진 '지우'와 '현수'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지우는 운동을 못하고 축구라면 질색인 아이다. 점심시간에는 구슬로 핸드폰 고리를 만들거나 십자수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특별활동도 십자수반에 들었다. TV에서 만화를 할 시간에 축구시합 중계방송에 열을 올리는 아빠에게 늘 불만이 많다.
 
현수는 미국에서 생활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한국에 들어온 아이다. 축구를 매우 좋아하는데, 친구들이 자기와 놀아주지 않아서 불만이다. 축구를 싫어하는 지우는 억지로 팀에 끼우면서도 자기는 따돌리는 게 맘에 안 든다. 자신은 축구경기중계를 보고 싶은데 엄마는 드라마만 봐서 밉다. 자신의 방에 붙여 놓은 베컴 사진을 할머니가 떼버려서 울기도 한다.
 
지우는 남학생이고 현수는 여학생이지만 성에 대한 어떤 정보나 언급도 주지 않고 이야기만을 들려준 후 지우와 현수의 아바타를 그리게 했다. 
 

▲ 지우와 현수의 아바타 밑그림
예상했던 대로였다. 이름에서부터 지우는 여성, 현수는 남성으로 인식되고, 축구가 남자의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한국 문화의 선입관이 작용했던 탓인지 많은 학생이 지우를 여학생으로, 현수를 남학생으로 그렸다.

   
 
 
아바타가 완성된 후 지우를 여자로, 현수를 남자로 인식하게 된 원인이 무엇일까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동안 어른들이 남자라서, 혹은 여자라서 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던 것을 서로 이야기하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남자답거나 여자다운 모습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적어보도록 하였다.
 
남자가 하면 안 된다고 하는 일에는 '도우미 아줌마(아저씨), 옷장사, 간호사, 인형놀이, 소꿉장난, 아바타 옷 입히기, 설거지, 음식 나르기, 화장, 바느질, 머리 길러서 묶기, 우는 것, 울고 삐지는 것, 치마 입기, 청소, 요리, 목걸이 만드는 사람, 피부관리, 무릎 꿇어서 앉기, 주방에 들어와서 일 거들기, 다리 꼬고 앉는 것, 봉숭아물들이기' 등을 적었다.
 
여자가 하면 안 된다고 하는 일에는 '집 짓는 일(건축), 유리 수리공, 자동차 만드는 일, 싸움, 다리 벌려서 앉는 것, 칼·총 장난, 뛰어놀기, 저녁에 돌아다니는 것, 소리 지르기, 아빠다리 하는 것, 담배 피기, 몸싸움, 군대 가기, 아무 남자랑 놀지 않기, 택시기사, 버스기사, 헬기·비행기 조종사, 군인, 경찰' 등을 적었다.  
 
다음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남자다운 모습과 여자다운 모습에 대해 써보도록 했다. 학생들이 말하는 남자다운 모습은 '씩씩하고 믿음직함, 힘이 세고 무식함, 용기 있고 자기주장이 강한 모습, 운동을 잘함, 활발하고 씩씩함, 카리스마 있음, 울지 않음, 여자보다 활발한 모습, 언제나 듬직해야 함, 물건을 나르고 절대 울지 않는 것, 울지 않고 참음' 등을 적었다.
 
학생들이 말하는 여자다운 모습은 '얌전하고 청순함, 섬세하고 품위 있고 교양 있음, 지식이 있고 깔끔함, 섬세하고 여성스럽고 차분한 모습, 조용히 있는 것, 다리 모아 앉기, 머리 기르고 얌전하기, 조신하고 바른 태도, 얌전하고 조신하고 섬세함, 내숭 떨면서 얌전하게 있는 것, 집안 일 잘하기, 치마 입기' 등을 적었다.
 
학생들의 고정관념 속에 여성은 감성적이고 의존적이고 소극적인 인물로 생각되고, 남성은 이성적이고 독립적이고 적극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었다. 남자는 울면 안 되고 용감하며 씩씩해야 되고, 여자는 얌전하고 옷차림이 단정하며 조금 크게 말하거나 웃으면 조심스럽지 못하고 덤벙댄다고 한다. 여자가 큰 소리로 자기의견을 말하거나 주장이 강하면 '드세다'고 한다.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남자다움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키가 커야 하고, 근육이 발달한 건장한 체격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사내대장부가 그래서 쓰나?', '사내는 울어선 안 돼', '남자는 과묵해야 돼'라든가, 남자는 강하고 대범하며,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고 성공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다.

은연중 사내대장부가 될 것을 강요받는 사회적 풍토는 주먹 센 학생이 우상이 된다든지, 학년에 따른 서열이 중시되어 선생님에게는 인사하지 않는 학생이 한 살 위 선배에게는 깍듯하게 인사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자들은 착하고, 곱고, 순한 여자여야 사랑받는다고 인식되고 있는 탓에 여성들은 상대편의 기분에 맞추어 원하는 것을 해주고 거세게 자기주장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착한 여자로 살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얽매여 항상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면서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혹자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진 여자들을 가리켜 '착한여자 콤플렉스(Good girl Complex)'라고 명명하였다. 
 
학생들은 은연중 남성과 여성에게 적합한 것으로 기대하는 인성 특성이나 태도, 가치관, 행동양식 등의 성역할을 학습해 온 셈이다. 남자아이는 태어나자마자 푸른색 옷을 입으며, 방은 푸른색 벽지를 바르고, 자라면서 블록, 자동차, 병정놀이세트, 운동기구를 갖고 논다.

여자아이는 분홍색 옷을 입으며, 분홍색 벽지를 바르고, 인형, 소꿉놀이 세트, 꽃무늬 레이스가 달린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갖고 논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서로 다른 성 역할을 배우게 된다.
 
아이가 자라 학교에 들어가면 어려서 학습한 고정관념은 더욱 심화된다.

남학교의 경우 '자주·창조·협동', '자강·자율·자립', '지·인·용', '면학, 정진, 발전' 등 진취적이고 건설적이며 유능한 인물양성을 표방하는 교훈을 내세우고, 여학교의 경우 '성실·근면·창조', '맘씨를 착하게, 말씨를 참되게, 솜씨를 멋있게', '참되고, 착하고, 미덥게', '지성' 등 희생적이고 순종적이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여성교육을 지향하는 교훈을 내세운다.

남녀공학이 늘었으나 기존의 성역할 고정관념은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심화되면서 여전히 차별적인 성역할을 길러주는 사례는 적지 않다.
 
대중매체에서 학습되는 성역할의 영향력은 더욱 크다. TV 드라마에서 남자는 적극적이고 건설적이고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여자는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인물로 사건 전개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사람으로 비춰질 때가 있다.

간혹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성이 등장한다 하더라도 괴팍한 노처녀나 이혼녀로 등장하거나, 건방지고 이기적인 성격을 띠는 부정적인 이미지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남자들에게는 자율성과 성취, 경쟁, 감정 통제를 강화하고, 여자들에게는 의존성이나 다소곳한 태도, 타인에 대한 배려를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의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파푸아뉴기니 부족의 연구에서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에 대한 문화적 관념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다. 챔불리족은 남자는 약하고 정서적으로 여자에게 의존하며, 여자는 강하고 통솔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고,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은 문화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며 가정·학교·사회에서 문화적 규범을 내면화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성역할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유전적·생물학적 요인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요인이다. 여성의 성격, 남성의 성격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여자의 직업, 남자의 직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환경에 의해 길러질 뿐이며 자신의 능력과 흥미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꾸민 아바타를 보면서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의 성역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