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108. 대접에 든 물맛이나, 물 항아리에 든 물맛이나

* 물헝 : ‘물 항아리’의 제주 방언
* 물 : 물(水)이 아닌 ‘물맛’임

실제 그렇다. 같은 물인데 그걸 대접에 따랐든 항아리에 채웠든 그 맛은 한 가지일 게 아닌가. 팔팔 끓여 따끈해진 물이나 얼음을 채워 차가운 물이나 그 물이 그 물일 뿐이다. 담는 그릇에 따라 물맛이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달라질 리가 만무하다. 혹여 달라진다면 그릇의 빛깔이나 물을 마실 때의 기분에 따라 느낌이 다를 수 있을지 모른.

똑같은 것이 자리를 바꾼다고 그것이 지니고 있는 본래의 모습이나 성질까지 변할 수 없다는 의미다. 설령 그것의 겉모양이 달라 보일 수 있을지 모르나 그 본바탕, 그러니까 원래 지니고 있는 본질은 불변(不變)한다.

본래의 바탕과 그것의 성질은 언제, 어디서나 변할 수 없는 것임을 빗댐이다.

물론 성선설과 성악설이 대립하듯, 사람의 타고난 바탕도 선과 악으로 대비해 내세울 수는 있다. 그렇게 타고 났지만 교육에 의해, 또 후천적인 노력이나 연마에 의해 달라질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리라. 하지만 아무리 훈육을 해도 안에 들어 있는 선천적‧선험적인 것, 천성(天性)만은 근본적으로 고칠 수 없다고 보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출생이며 가문의 이력을 보는 게 아닐까.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실력이 출중해 발군(拔群)이어도 인간성에 문제가 있다면 어떤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심각한 흠집이 될 수 있다. 기업마다 입사 시험 때 면접에서 인성(人性)에 큰 비중을 두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후일을 도모할 인재를 찾으면서 그 아버지의 평판이며 직업을 살핀다든지, 며느리 감을 고름에 그 어머니를 본다든지 하는 게 다 그런 관점에서 나온 것일 테다. 부계니 모계니 하는 혈통은 곧 유전자라 중요시할 수밖에 없다. 혈통을 보는 것이라, 운세를 알아보기 위해 점을 치는 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갓 두레박으로 길어 올려 철철 넘치는 우물물은 벌컥벌컥 입 들이대고 마셔도 그 청량함이 온몸을 시원하게 해 준다. 그 물을 고운 그릇에 담는다고 물맛이 더할까. 하얀 대접에 담든, 머그잔에 따르든 물맛은 그 맛이 그 맛으로 한가지다. 다를 수 없는 게 정한 이치다.

물은 물로서 그 맛이 있고, 사람은 그 사람으로서 자질(資質)이 있는 법이다.

그 물을 고운 그릇에 담는다고 물맛이 더할까. 하얀 대접에 담든, 머그잔에 따르든 물맛은 그 맛이 그 맛으로 한가지다. 다를 수 없는 게 정한 이치다. 사진은 제주시 도두1동 오래물(남탕)의 분출 장면. [편집자] 출처=고병련. ⓒ제주의소리
그 물을 고운 그릇에 담는다고 물맛이 더할까. 하얀 대접에 담든, 머그잔에 따르든 물맛은 그 맛이 그 맛으로 한가지다. 다를 수 없는 게 정한 이치다. 사진은 제주시 도두1동 오래물(남탕)의 분출 장면. [편집자] 출처=고병련. ⓒ제주의소리

‘최고의 자질’은 어떤 것일까. 이런 얘기가 있다.

한 유명 빵집에서 ‘자질’ 있는 제빵사를 뽑는다는 광고가 나왔다. 유명 제빵사 밑에서 기술을 배우고 싶던 한 가난한 집 청년도 광고를 보고 지원했다.

그런데 그 빵집 제빵사는 빵을 만드는 방법이며 기술 이외에도 기본적인 지식과 자질을 미리 갖추고 있어야 한다면서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르게 했다.

빵은 제법 만들었지만, 그에 반해 지식은 별로 없었던 그 청년은 최선을 다해 시험을 보았으나, 합격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래도 모자란 점이 많다고 스스로 생각이 된 때문이다.

한데 얼마 뒤, 빵집에서 청년에게 연락이 왔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내일부터 나오라.” 

합격통지가 아닌가. 청년은 내심 말할 수 없이 기뻐하면서도, 자기가 뽑히게 된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다음날 빵집으로 첫 출근을 한 그 청년. 제빵사에게 곧바로 자신이 뽑힌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제빵사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면서 청년에게 말했다.

“내가 낸 시험의 마지막 질문이었는데, 빵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게 기억나는가?” 청년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기억납니다.”

제빵사가 말을 이었다.

“자네는 ’정성‘이라고 썼더군. 바로 그것이네. 그래서 자네를 뽑은 것이야. 기초 지식이 중요하긴 하나 정성을 다하는 자세가 돼 있으면, 지식이든 실력이든 그걸 얻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거든.”

세상의 어떤 밥보다 어머니가 해 주신 밥이 최고로 맛있는 법이다. ‘어머니 손맛’이라 하지 않는가. 그것은 단순히 식재료나 실력이 아니라 사랑과 정성으로 지은 밥이기 때문이다.

문득 장성해 가정을 갖고 있는 두 아들이 오랜만에 집에 오면 다짜고짜 찾는 게 있다. 라면이다. 고기 몇 점에 쪽파 송송 썰어 넣어 어머니가 끓여 주는 라면이 그렇게 먹고 싶단다. 젓가락을 들며 한 옥타브 올려 하는 말이 있다. “어머니표 라면!”

사랑과 정성 없으면 낼 수 없는 맛이다. 

어느 분야에서도 매한가지가 아닐까.

최고가 될 수 있는 자질 가운데 가장 으뜸인 것은 바로 이 ‘정성’이다.

‘대접에 든 물이나, 물항에 든 물이나.’
 
이 또한 딱 부러진 빗댐이다. 사물도 그렇지만 특히 사람의 성품이나 성정 곧 타고난 인성은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니다. 설령 한때의 분위기를 타면서 달라져 보일 수는 있으나 본바탕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제대로 보려면 마음의 눈을 뜨고 보아야 한다. 매의 눈으로 들여다볼 일이다. 상대의 자질을 정시(正視)할 수 있는 그 눈, 심안(心眼)!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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