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15주년 기획-3.1운동 100주년 제주항일운동史] ②제주 최대 무장항일·종교계 최대 항일투쟁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해 온 민족이 들고일어난 3.1운동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다. 3.1운동은 나라 안팎의 민족의 독립 의지를 보여줬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을 체계적이면서 조직화하는 계기가 됐다. 제주에서도 3.1운동 전후로 일제의 탄압과 수탈에 대한 항쟁이 이어졌다. 제주의병항쟁과 법정사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 해녀항일운동 등이 대표적이다. 창간 15주년을 맞은 [제주의소리]가 제주 항일운동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고 추가조사를 비롯해 유공자 선정 및 처우개선 등 과제를 짚어본다. [편집자 주]

제주 법정사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제주 법정사지에는 1911년 창건 이후 법당과 부속 건물이 있던 곳에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려주는 건물터만 남아있다. 제주 최대 무장항일운동이자, 일제시대 종교계가 주도한 국내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이었던 제주법정사항일운동의 역사적 의의에 비해 너무 초라한 모습이다.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빈약한 역사인식을 보여주는 단적인 현장이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1918년 무오년 제주법정사항일운동을 주도한 김연일, 강창규, 박주석, 방동화, 정구용 스님(왼쪽부터)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1918년 무오년 제주법정사항일운동을 주도한 김연일, 강창규, 박주석, 방동화, 정구용 스님(왼쪽부터)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김연일(金連日) 징역 10년, 강창규(姜昌奎) 징역 8년, 박주석(朴周錫) 징역 7년, 방동화(房東華) 징역 6년, 정구용(鄭九鎔) 징역 3년…. 이들을 포함해 66명이 검거되고 이들 중 주모자와 적극 가담자 46명에 형(刑) 선고. 

무오년(戊午年, 1918년)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을 주동했던 승려들에 대한 당시 1심 판결 결과다. 이후 전국에서 일어난 3.1운동을 주도했던 참여자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무거운 형을 받았다. 이 점은 일제가 법정사 항일운동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 인식의 수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보다 5개월 앞선 1918년 10월7일 제주도 도순리 법정사 일원에서 일어난 무장항일운동이다. 당시 법정사 승려들을 중심으로 인근 마을 주민 등 총 700여명이 일본인의 축출과 국권회복을 주장하며 일으킨 제주도내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이자, 종교계가 일으킨 전국 최대 규모의 무장 항일운동이었다.  

서귀포 도순리 법정악 깊은 계곡의 법정사에서 승려들을 중심으로 지역주민들이 일본제국주의를 이 땅에서 몰아내고 나라의 독립을 이루겠다는 항일의 기치를 힘차게 내걸었던 사건이다. 

 “우리 조선은 일본에 탈취 당해 괴로워하고 있다. 1918년 (음력)9월 3일 오전 4시 하원리에 집합하라. 그래서 (음)9월 4일 대거 제주향(濟州鄕)을 습격하여 관리를 체포하고 보통 일본인을 추방하라” - 당시 법정사 항일운동 격문 중에서 - 

제주 법정사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제주 법정사지 본당터에 살포시 내려앉은 동백 꽃송이가 이곳에서 100여년 전 조국의 독립을 꿈꾸다 고초를 겪은 수많은 독립지사들의 희생을 암시하는 듯 했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제주 법정사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도내 최대 무장항일운동이 일어났던 제주 법정사지로 가는 길에는 낮게 세워진 표식이 이곳이 항일운동의 발상지인 법정사로 가는 길임을 알려준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법정사 항일운동의 가치를 재조명하게 하는 계기가 됐던 정구용 판결문.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법정사 항일운동의 가치를 재조명하게 하는 계기가 됐던 정구용 판결문.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이 일어난 지 올해로 101년을 맞는다. 100주년을 맞은 3.1운동보다 한 해 앞선 1918년 10월에 제주에서 일어났던 무장항일투쟁이다. 일제의 탄압이 서슬 퍼렇던 시절, 잃어버린 국권회복을 표방하며 중문경찰주재소를 불사르고 일본인을 구타하는 등 적극적인 항일투쟁의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에 크게 당황한 일제가 대대적으로 무력 진압에 나서면서 무장투쟁은 이틀 만에 막을 내린다.  

당시 무장항일운동 거사 이전, 법정사에서는 거사를 위해 사용할 물건들을 약 보름 동안 제작했다. 마을에 배포할 격문과 깃발, 투쟁에 당장 사용할 곤봉과 화승총 3정 등을 준비했다. 

법정사 주지였던 승려 김연일 이하 승려들을 중심으로 한 주도세력의 지휘 아래, 신도들과 지역주민들을 규합하면서 무기와 격문 등 각종 항일투쟁 도구를 마련하기까지의 약 6개월여의 사전 준비 기간을 거쳤지만, 거사가 단행될 때까지 비밀이 절대 유지되는 등 참여자들의 항일의지는 절대적이었다. 

일제의 즉각적이고도 대대적인 무력진압으로 법정사 항일운동은 이틀만에 진압되고 현장에서 66명이 체포된다. 현장에서 검거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일제는 지속적으로 체포에 나서 총 4차례에 걸쳐 구속이 이뤄진다. 

이들 명단이 당시 ‘형사사건부’로 남아있다. 이 ‘형사사건부’에 따르면 당시 도순리, 하원리, 월평리, 영남리, 대포리, 상예리, 서흥리, 법환리, 중문리, 회수리, 덕수리 등에 주소를 둔 사람들이 다수 검거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들 중 총 46명이 형을 선고 받았고, 연령대별로는 40대가 17명으로 가장 많았다. 뒤이어 30대 15명, 20대 14명 순으로 20~40대의 청년들이 중심이었다. 

이들에게 재판은 단 한차례만 열렸고, 66명이 검거된 참여자들 중 일부 옥사자가 발생했으며, 31명이 최고 10년에서 최하 6개월에 이르는 징역형을 언도받는 등 형량에서 보더라도 운동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모든 판결은 항쟁 발발이후 채 4개월만에 모두 종료될 만큼 당시 일제가 법정사 항일항쟁의 확산을 철저하게 차단했다. 

법정사 주지 김연일이 징역 10년형을 선고 받았고, 강창규·박주석·방동화 등 중심을 이뤘던 승려들에게도 징역 6~8년 등 매우 엄중한 형이 선고된다. 소요 및 보안법 위반이 주로 적용됐고, 방화죄와 상해죄, 총포 화약 취급령 위반죄 등 다양한 죄목이 따라붙었다.  

이들에 대한 판결과 구속이  이어지는 동안 이듬해인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면서 일제는 법정사 항일항쟁을 1920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사교(邪敎)의 민중선동 사건으로 왜곡·폄훼하기 시작한다. 

법정사 항일운동 이후 3.1운동 등 항일투쟁이 전국적 확산 양상으로 나타나자, 이를 우려한 일제가 항일독립운동을 개인의 영달을 위한 사교도들의 혹세무민하는 행태쯤으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법정사 항일운동의 성격과 전체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정구용 판결문’ ‘강창규 가출옥 관계 서류’ ‘폭도사 편집자료 고등경찰요사’ 등이 있다. 신문자료로는 당시 ‘매일신보’의 기사 3꼭지도 있다. 이들 자료를 시기적으로 비교 검토하면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에 대한 일제의 시각과 의도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참여자 규모에 대한 왜곡이다. ‘매일신보’는 1920년, 1923년, 1938년에 걸쳐 총 3번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을 보도했다. 최초 보도였던 1920년 기사에는 총 700여명이 이 사건에 참여했다고 보도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1923년 기사에는 총 400여명, 1938년에는 약 300명이 참여했다고 보도했다. 

무장항일운동이 일어난지 무려 1년 6개월이나 지나서야 첫 보도가 이뤄진 것도 정상적이지 않지만, 자사(自社) 보도에 대해 매번 참여자 숫자가 축소되는 모순을 보였던 것은 당시 일제의 의도적 왜곡이 아니고선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항일항쟁의 성격 역시, 법정사 승려들이 중심이 됐던 사건이었음에도 이후 보천교도의 난 또는 무극대교도 사건 등으로 언급돼 사교(邪敎) 또는 사교도(邪敎徒)들의 혹세무민 사건으로 전락시켰다.   

제주작가회의(회장 이종형 시인) 회원 30여명은 지난 3월1일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제주 최대 항일운동이 일어났던 법정사 터를 찾았다. 법정사 터에서 '대한민국 독립만세'를 외치는 모습.  ⓒ제주의소리
제주작가회의(회장 이종형 시인) 회원 30여명은 지난 3월1일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제주 최대 항일운동이 일어났던 법정사 터를 찾았다. 법정사 터에서 '대한민국 독립만세'를 외치는 모습. ⓒ제주의소리

 

제주 법정사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제주 법정사항일운동을 기리고 법정사 항일운동에 참여한 독립지사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의열사 전경. 법정사지 인근에 지난 2004년 건립됐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제주 법정사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제주 법정사항일운동을 기리기 위해 법정사 성역화 사업 과정에 세워진 상징탑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제주법정사항일운동’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한금순 박사(남녕고 교사, 제주대 강사)는 “제주법정사항일운동이 벌써 100주년을 넘겼다. 이제 우리가 할 일만 남아있다”며 “조국독립을 위한 신념을 굽히지 않고 스스로 고난의 길을 선택했던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자들을 기억하는 일, 그 신념과 노력으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과연 오늘 무엇을 해야 할지를 우리들이 고민해야 할 차례”라고 말했다.   

특히 단순한 종교적 차원의 운동이 아니라 일제의 경제적 침탈에 대한 제주도민의 항일투쟁이며, 국권회복운동이었던 만큼, 66명 가운데 독립운동을 인정받은 34명 외 아직도 32명은 애국지사나 순국선열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 이에 대한 관심도 필요하다    

제주 최대 무장항일투쟁의 공간이 된 ‘법정사’ 창건에 적극 앞장선 것은 근대제주불교의 중흥조로 평가받는 비구니 승려 안봉려관과 제주의병항쟁의 주역이었던 승려이자 제주의 대표적 지식인이었던 김석윤 등이다. 역시 우리가 잊어선 안 될 인물들이다.

최근에는 제주 관음사를 창건(1908년)한 안봉려관 스님이 1911년 법정사를 창건한 까닭이 처음부터 독립운동 내지 항일투쟁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유의미한 일부 증언이 나오고 있어, 법정사 항일운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재평가가 반드시 이뤄져야 할 것이다. 

항일 역사에 대한 우리들의 무관심이 이어지는 동안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벌써 101주년을 맞았다. 일제의 탄압과 수탈에 저항하면서 일어난 3.1운동 100주년을 재조명하자는 전국적인 관심과 노력에 비하면 목숨을 내건 무장항일투쟁이었던 법정사 항일운동에 대한 관심은 한없이 민망하고 부끄러운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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