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5주년 기획 / 소리 타임라인] 제주해군기지, 강정마을 10여년의 기록

[제주의소리]가 창간 15주년을 맞아 시간 순서에 따라 사건의 흐름을 정리하는 새로운 기획 '소리 타임라인'을 시작합니다. 첫 순서로 강정주민 3.1절 특사에 맞춰 강정마을 편을 준비했습니다. 제주해군기지의 최초 논의 단계부터 최근의 상황까지 전개과정을 살펴보는 일은 주민들의 아픔을 더 생생히 이해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 편집자 주 

 
소리 타임라인

2007~2019 강정마을엔 무슨 일이? 

# 지리한 갈등의 씨앗, 해군기지 잉태

제주에 해군기지를 설치하는 문제는 1993년 국방부 합동참모회의에서 처음 등장했지만 이후 10년 가까이 논의가 없었다. 다시 제주해군기지가 추진된 것은 2002년.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항에 건설을 추진했지만 지역주민 반대로 그해 12월 논의가 중단됐다.

2005년, 해군은 8000억원을 투입하는 화순항 해군기지 건설계획을 발표했지만, 주민들의 거센 반발로 무산됐다. 2006년에는 남원읍 위미1리가 후보로 거론됐지만 마을주민들의 반대로 역시 무산됐다.

김장수 국방부 장관은 2007년 4월 13일 제주도청을 방문해 “해군기지 취소는 있을 수 없다”고 입장을 분명히했다. 김 장관은 당시 항의집회를 하고 있는 도의원, 종교인, 시민사회단체, 지역주민들을 향해 미소와 함께 양팔을 벌려 머리 위에 하트를 그려보여 조롱 논란을 빚었다. 소통 의지는 없어 보였다.

☞ 국방부, "해군기지 건설하겠다" …'일방통보'

# 2007년 4월 26일 / '일사천리' 임시총회

화순과 위미 다음은 강정이었다. 비극의 시작은 2007년 4월 26일 마을 임시총회였다. 당시 마을회장과 어촌계를 중심으로 비공개 임시총회가 열렸고 해군기지 유치 안건이 통과됐다. 1500여명의 주민 중 불과 86명만 참여한 총회였다.

27일에는 당시 윤태정 마을회장이 김태환 지사를 방문해 해군기지 유치 건의문을 전달했고, 3일 뒤인 4월 30일 국방부는 “검토가 끝났다”며 강정마을에 군항 건설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일사천리였다.

정당성을 상실한 마을총회라는 비난이 거셌고, 같은 해 5월에는 주민들이 해군기지 유치 반대위원회를 구성했다. 윤태정 회장은 해임됐고, 2007년 8월 20일 열린 마을총회에서는 해군기지 유치와 관련해 참석주민 725명 가운데 93.8%인 680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그러나 제주도도 국가도 멈출 생각은 없었다. 같은 해 6월 22일 제4회 제주평화포럼 참석차 제주를 찾은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해군기지는 국가 필수적 요소라며 추진 의사를 밝혔다.

☞ 잘못 끼운 첫단추...강정 '10년 비극'의 시작

# 2008년 9월 11일 / 민군복합형 관광미항 공식화

2008년 9월 11일, 정부는 국가정책조정회의에서 “제주해군기지를 최대 15만톤 규모의 크루즈 선박이 기항할 수 있는 민군복합항으로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민군복합항’은 제주해군기지 반대가 거세지자 그 대안으로 2007년 12월 처음 등장했다. 

대형 크루즈 선박의 입항과 정박이 가능한 민항을 건설하되, 군이 이를 공동활용토록 하자는 취지로 받아들인 지역사회는 ‘군항에서 민항으로 기본 성격이 바뀐 것’으로 해석했다. 합리적 해결에 대한 기대감이 조성됐다. 그러나 해군의 예비타당성 조사 요청서에서는 해군기지 내 민항은 보조적인 개념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꼼수 논란이 커지자 정부에서 ‘민군복합항’을 강조한 게 2008년 9월 11일의 일이다. 이후 제주민군복합형 관광미항이 공식명칭으로 쓰이게 됐지만, 껍데기에 불과했다. 크루즈는 완공 3년 만에 겨우 한 대만 입항한 것에 비해 미군 함정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지금 ‘제주해군기지가 민항 중심’이라고 말했다가는 코웃음을 면키 어렵게 됐다.

☞ 떼지 못한 꼬리표, ‘무늬만 민군복합항’ 논란

# 2008년 9월 17일 / "걸림돌 제거" 유관기관 대책회의 파문

2008년 9월 17일 제주시내 한 식당에서 열린 해군-국정원-경찰-제주도정 관계자 대책회의는 불난 민심에 기름을 부었다. 이들은 “반대 주민 구속을 통한 걸림돌 제거가 필요하다”며 소통 없는 강행을 추진했다. 이 사실은 4개월 뒤인 이듬해 1월에서야 제주KBS의 보도로 세상에 드러났다.

유덕상 환경부지사는 보도 이틀 뒤인 2009년 1월 21일 도청 기자실에서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죄송하다”는 두 문장짜리 회견문을 발표하고 자리를 떴다. 그 당시 좀처럼 납득하기 힘든 일들이 연달아 벌어지고 있었다.

☞ 국정원·경찰·해군·제주도, 반대세력 구속 ‘짬짜미’

# 2009년 8월 26일 / 김태환 지사 주민소환 투표

민심이 폭발했다. 2009년 5월 5일 제주군사기지반대 범도민대책위원회와 강정마을회 등 도내 29개 단체로 꾸려진 ‘김태환 지사 주민소환운동본부’가 출범했다. 김태환 지사는 전국 광역단체장 중 최초로 주민소환 청구를 받게 됐다.

김 지사는 직을 유지하기 위해 사활을 걸었다. 관료조직과 관변단체, 자생단체까지 이용해 투표불참을 유도했다. 8월 26일 주민소환 투표가 실시됐지만 결국 투표함은 열리지 못했다. 주민소환투표법이 정한 개표 하한선인 1/3을 넘지 못한 것이다. 갖은 투표방해 행위로 주민소환 투표에 참여한 도민은 4만6076명(11%)에 그쳤다.

☞ '일방통행' 광역단체장 전국 첫 '주민소환'

# 2009년 12월 17일 / 도의회, 강정 절대보전지역 해제

강정 해안에 군사기지 공사가 가능하도록 하는 행정절차도 강행했다. 2009년 12월 17일 제주도의회에서는 해군기지 관련 절대보전지역 해제 및 환경영향평가 협의내용 동의안이 통과됐다.

당시 한나라당 의원들은 수적 우위를 내세워 민주당, 민주노동당, 무소속 의원들과의 몸싸움 끝에 절대보전지역 해제를 의결했다. '모르쇠 진행'은 물론 상임위 심의도 거치지 않은 안건을 의장이 직권 상정하는 등 민의의 정당인 도의회가 도민을 배신했다는 비난이 거셌다.

☞ 국방·군사시설 실시계획 승인…강정, 벼랑 끝 투쟁

# 2012년 3월 7일 / 구럼비 발파

제주해군기지는 당초 2009년 내로 착공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주민 반대가 거세지고 여론이 악화하면서 착공은 미뤄졌다. 당시 지방선거에선 ‘윈-윈 해법'을 내세운 우근민 지사가 당선됐지만 결국 공염불에 그쳤다.

2011년 2월에서야 해군기지 예정지에 해군과 건설업체의 사무소가 들어섰고, 2012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됐다.

그리고 2012년 3월 7일, 아름다운 강정 해안의 상징과도 같았던 구럼비 바위가 폭파됐다. 이 1.2km의 용암단괴는 멸종위기종인 붉은발말똥게의 대규모 서식지였다. 구럼비 곳곳에서 솟아오르는 용천수는 과거 주민들의 식수원이자 제사를 지낼 때 정화수로 사용됐다.

이날 발파는 해군기지 공사 본격화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번에도 저항은 거셌다. 구럼비 폭파 후 3일 간 연행된 주민, 평화활동가, 정당인 등은 총 55명에 이른다. 이날 이후 공사를 막던 마을 주민들이 끌려가거나 경찰들이 상시로 마을에 배치되는 등 공포 분위기가 일상화됐다.

☞ 산산이 부서진 1.2km 구럼비, 강정의 피눈물

# 2015년 1월 31일 / 군 관사 반대 농성천막 행정대집행

2014년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원희룡 지사는 해군기지 진상조사를 공약했고, 주민들은 이를 받아들이는 대신 군 관사 건립을 철회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같은 해 11월 원 지사는 해군참모총장에게 군 관사 건립사업 철회를 요청했지만 해군은 이를 거부했다.

2015년 1월 31일 해군은 행정대집행에 나섰다. 군 관사 건설을 막기 위해 주민들이 설치한 농성천막과 망루를 철거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대구1기동대와 광주기동대 80여명, 광주여경제대 30명, 육지부 용역 100명 등 총 1000여명이 투입됐다.

주민들은 울부짖으며 장장 15시간에 걸쳐 공권력과 맞섰다. 천주교 제주교구 강우일 주교가 현장을 찾아 망루에 있던 주민들을 설득하고 나서야 상황은 일단락됐다.

☞ '진상조사' 약속, 군 관사 강행으로 물거품

# 2016년 2월 26일 / 제주해군기지 준공

걸림돌(?) 하나를 제거한 해군은 공사에 더욱 속도를 냈다. 그리고 2016년 2월 26일 제주해군기지 준공식이 열렸다. 이날 축사에서 황교안 국무총리는 “미국 하와이나 호주 시드니 같은 세계적인 민군복합항으로 발전시키고자 한다”고 말했다. 총사업비 1조765억원의 국가사업은 주민들의 아픔과 숱한 논란을 뒤로하고 마무리됐다.

☞ 제주해군기지, 숱한 갈등-논란 남긴채 준공

# 2016년 3월 28일 / 박근혜 정부, 주민들에게 34억5000만원 구상권 청구

설상가상, 주민들의 비극은 계속 이어졌다. 준공 한 달 뒤인 2016년 3월 28일, 해군은 공사지연으로 손해를 입었다며 마을주민과 평화활동가 등 121명에게 34억5000만원의 구상금을 청구했다. 이미 마을 주민들은 총 3억원의 벌금을 짊어진 상황이었다. 

마을주민, 시민사회, 정치권까지 한 목소리로 해군의 결단을 촉구했지만, 해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 해군→강정 ‘34억 구상권’ 청구 “응답하라! 제주도”

# 2017년 12월 12일 / 문재인 정부, 해군기지 구상권 철회

구상금 소송 철회를 공약으로 내건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2017년 12월 12일, 이 공약은 현실이 됐다. 정부는 “갈등치유와 국민통합을 위한 대승적 차원”이라며 구상권 청구 소송 취하와 이후 민형사상 청구를 하지 않는다는 법원의 강제조정을 받아들였다.

☞ 정부 “법원 판단 존중” 제주해군기지 구상권 전격 철회

# 2018년 10월 11일 / 대통령 사과

2018년 10월 11일, 문재인 대통령은 제주해군기지에서 열린 2018 대한민국 해군 국제관함식 해상사열에 참석했다.

이날 오후 진행된 주민들과의 대화에서 문 대통령은 “국가안보를 위한 사업이라도 절차적 정당성과 민주적 정당성을 지켜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며 “그래서 강정마을 주민들 사이에, 그리고 제주도민들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졌고, 주민 공동체가 붕괴되다시피 했다. 대통령으로서 깊은 유감을 표하고, 위로의 말을 드린다”고 말했다. 현직 대통령의 공식 사과였다. 

☞ 문재인 대통령 "해군기지 절차적·민주적 정당성 못지켜" 사과

# 2019년 2월 26일 / 3.1절 특사에 강정주민 포함

정부는 3.1절 100주년을 맞아 특별사면 명단 4378명을 발표했다. 이중에는 제주해군기지 반대 운동을 하다 범법자가 된 강정마을 주민과 평화활동가들도 포함됐다. 하지만 그 수가 문제였다. 19명에 불과했다. 그동안 해군기지 반대 운동으로 연행된 주민과 평화활동가가 총 696명, 형이 확정돼 특별사면 후보군에 오를 수 있는 이들은 199명이었다. 생색내기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 문재인 대통령, 강정 19명 특별사면..."생색내기" 불만

# 강정의 아픔은 현재진행형

국가 지도자의 공식 사과가 나오기는 했지만, 상처가 큰 만큼 갈 길은 멀다. 공동체 회복과 명예회복이 필요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각론을 두고선 이견이 존재한다. 중요한 건 전철을 밟지 않는 일이다. 제주해군기지는 소통없는 국책사업이 어떻게 한 마을을 철저하게 파괴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됐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강정의 이야기를 면밀히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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