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15주년 기획-3.1운동 100주년 제주항일史] ③ 조천만세운동...제주 항일운동 기틀 다져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해 온 민족이 들고 일어난 3.1운동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다. 3.1운동은 나라 안팎의 민족의 독립 의지를 보여줬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을 체계적이면서 조직화하는 계기가 됐다. 제주에서도 3.1운동 전후로 일제의 탄압과 수탈에 맞선 항쟁이 이어졌다. 제주의병항쟁과 법정사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 해녀항일운동 등이 대표적이다. 창간 15주년을 맞은 [제주의소리]가 제주 항일운동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고 추가조사를 비롯해 유공자 선정 및 처우개선 등 과제를 짚어본다. [편집자 주]

매해 3월 1일 제주시 조천읍 조천만세동산에서 열리는 3.1운동 기념식.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매해 3월 1일 제주시 조천읍 조천만세동산에서 열리는 3.1운동 기념식.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해마다 3월이면 제주시 조천읍 미밋동산에는 태극기 물결이 일렁인다. '조천만세운동'이라고 일컬어지는 제주 3.1운동의 정신은 꼬박 100년을 뛰어 넘어 후세들에게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제주지역 3대 항일 운동 중에서도 대표적으로 손 꼽히는 조천만세운동은 제주 항일 운동의 선구적인 위상을 갖는다. 이 조천만세운동을 기점으로 민족교육운동이 활성화됐고,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각종 사회단체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의병항쟁과 법정사항일운동이 제주 항일운동사의 서막을 열었다면 기미년(己未年, 1919년)의 조천만세운동은 항일항쟁의 기틀을 다졌다는데 의의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서울·평양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서서히 퍼져나갔던 3.1운동이 당시만 하더라도 변방의 섬에 불과했던 제주에서 발발했다는 점도 의미를 더한다.

◇ 품 속에 숨긴 독립선언서, 몰래 태극기 제작하며 '만세운동' 결의

당시 휘문고보 4학년인 조천 출신 김장환은 경성(서울)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한 후 시위자 색출 작업이 시작되자 품 속에 독립선언서를 숨긴 채 제주로 귀향한다. 3월 16일 숙부인 김시범을 찾아 3.1운동을 전후로 한 각지의 사정을 알렸고, 이튿날 김시은 등 조천면 유지들과의 밀회를 통해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조천만세운동이 당시 번화가였던 제주읍이 아닌 조천리에서 전개됐다는 점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단편적으로 접근하면 조천 출신 유지들이 중심에 섰기 때문에 조천에서 발발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으나, 당시 조천읍이 제주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점, 제주 상업의 발달을 주도한 지역이었다는 점, 이로 인해 자연스레 신흥세력이 성장했고 이들의 자제들이 일본·서울 등지로 유학을 떠나 민족의식·계급의식을 흡수했다는 점에서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갖는다.

육지부 대부분의 지방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시위 움직임을 은폐할 수 있는 장날을 이용한 반면, 조천만세운동은 3월 21일을 거사일로 택했다. 이 날은 당시 제주도내 유림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던 김시우의 기일이었다.

이들의 동지 규합은 매우 조심스러우면서도 체계적으로 진행됐다. 뜻을 함께한 김시범, 김시은, 고재륜, 김형배, 김연배, 황진식, 김용찬, 백응선, 김장환, 박두규, 이문천, 김희수, 김경희, 김필원 등 14인의 동지들은 대형 태극기 4본과 소형태극기 300여장을 제작하는 등의 준비를 마쳤다.

조천만세운동을 결의한 14인 동지. 왼쪽부터 김연배, 김시은, 고재륜, 김형배, 황진식(이상 윗줄), 박두규, 백응선, 김필원, 김희수(이상 아랫줄). 그외 인물들은 사진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조천만세운동을 결의한 14인 동지. 왼쪽부터 김연배, 김시은, 고재륜, 김형배, 황진식(이상 윗줄), 박두규, 백응선, 김필원, 김희수(이상 아랫줄). 그외 인물들은 사진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제주시 조천읍 제주항일운동기념관 내 설치된 조천만세운동 기념탑.
제주시 조천읍 제주항일운동기념관 내 설치된 조천만세운동 기념탑.

◇ 태극기 꽂힌 조천 미밋동산...네 차례에 걸친 '대한독립 만세' 함성

우리는 오늘 우리 조선이 독립국이며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를 세계만방에 알려 인류 평등의 큰 진리를 환하게 밝히며, 이를 자손만대에 알려 민족의 자립과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와 강권주의의 희생이 되어 유사 이래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의 압제에 뼈아픈 고통을 당한 지 이미 십 년이 지났다. 그동안 우리의 생존권을 빼앗겨 잃은 것이 그 얼마이며, 정신상 발전에 장애를 받은 것이 그 얼마이며, 민족의 존엄과 영광에 손상을 입은 것이 그 얼마이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운과 독창력으로 세계 문화에 이바지하고 보탤 기회를 잃은 것이 그 얼마이겠는가.

우리는 오늘 떨쳐 일어났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함께 나아가고 있다. 남녀노소 없이 어둡고 답답한 옛 보금자리로부터 분연히 일어나 삼라만상과 함께 기쁘고 유쾌한 부활을 이루게 되었다. 억만대의 조상들의 신령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새로운 형세가 우리를 밖에서 호위하고 있으니, 시작이 곧 성공이다. 다만 앞길의 광명을 향하여 힘차게 곧장 나아갈 뿐이다.

-3.1독립선언서 중 발췌-

1919년 3월 21일, 조천 미밋동산에는 '대한독립 만세' 구호가 울려퍼졌고, 곧 인근 군중들도 시위에 동참했다. 첫날 만세운동에는 14인의 동지를 비롯해 조천리 주민과 서당 생도 등 150여명에 이르는 인원이 집결했다. 

오후 3시 시위대는 미밋동산에 태극기를 꽂고, 김시범이 대표해 3.1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행진은 신촌리까지 장장 2km에 걸쳐 진행됐다. 시위대는 제주성내를 향해 행진을 강행했으나, 신촌리에 다다라 경찰의 저지로 멈춰섰고, 주도자 13명이 연행되기에 이르렀다.

만세운동은 3월 24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연속적으로 전개됐다. 지역도 신좌면 조천리에서 함덕리, 신흥리, 신촌리로 점차 확산됐다.

2차 시위는 22일 조천장터에서 김필원, 백응선, 박두규 등의 주도로 전날 검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전개됐고, 3차 시위는 23일 백응선, 이문천, 김연배 등이 조천리에서 함덕리에 이르는 사이의 군중들과 함께 했다. 이 시기에는 지역 청년들과 주민들의 합세로 시위대 규모가 800여명으로 불어났다.

4차 시위는 24일로 마침 조천지역 오일장날과 맞물렸다. 장날은 사람이 많이 모일 수 있는 이점이 있어 시위를 벌이기가 용이했고, 김연배를 중심으로 약 1500여명의 시위군중이 검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 4차 시위로 김연배 등 4명이 체포되는 등 핵심적인 인물 14인이 모두 검거되면서 시위운동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제주시 조천읍 항일운동기념관에는 당시 조천만세운동에 동참했다가 형무소로 끌려간 수형기록부 등이 전시돼 있다.
제주시 조천읍 항일운동기념관에는 당시 조천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형무소로 끌려간 수형기록부 등이 전시돼 있다.
제주시 조천읍 제주항일기념관 내 '애국선열위패봉안재단'에는 애국지사들의 위해가 봉안돼 있다.
제주시 조천읍 제주항일기념관 내 '애국선열위패봉안제단'에는 애국지사들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 제주청년 항일운동 촉매 역할...턱 없이 부족한 역사기록

조천만세운동의 결과 1심에서 기소된 자는 총 19명으로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형을 선고받았다. 항고했지만 주요 인물들 모두 형량이 확정돼 복역했다. 이중 2~3차 시위를 주도했던 백응선은 출옥 후 옥고 후유증으로 숨을 거뒀다.

조천만세운동에 참여한 운동가들은 옥중에서의 노동 대가로 받은 약간의 임금을 모두 독립운동기금으로 모으고 '미밋동산 동지회'라는 의미의 동미회(同味會)를 구성, 독립의 의지를 이어갔다.

조천만세운동은 제주의 민족교육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측면에서 그 의의를 지니고 있다. 3.1운동 이후 꾸준하게 제주의 청년들이 문맹퇴치와 계몽운동 차원에서 각 지역별로 야학운동을 전개했다. 연경야학회, 노동야회, 상도야학회, 북촌부녀야학회 등이 대표적이다.

또 3.1운동의 계승이란 차원에서 전개된 제주학생들의 항일운동을 이끄는 촉매제가 되기도 했다.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지역적 단위에서 끝나지 않고 제주출신 유학생들과 연계하며 전국적으로 번져나가기도 했다.

이처럼 조천만세운동은 제주 민족해방운동의 모태가 됐지만, 지역 차원에서 이를 규명할만한 자료는 턱 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그나마 명문화 된 자료를 찾으려면 무려 20여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상황을 정리한 공식적인 자료는 1996년 제주도정이 발간한 '제주항일독립운동사' 정도 뿐이다.

김동전 제주대학교 사학과 교수(제주연구원 원장)는 "제주의 경우 항일역사가 온전히 기록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 더 늦기전에 남아있는 독립운동 당시의 자료 발굴이 중요하고, 현장 보존·관리도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김 교수는 "해방 전 실질적으로 항일운동의 최전선에 섰지만 이후 사회주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해방 전 북측으로 가거나 일본으로 넘어가 거주하고 있다는 이유로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해 이념을 뛰어넘는 결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