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희의 예술문화 이야기] 37. 예술공간 이아의 ‘한국근대판화 아카이브’전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이 외교권을 상실하자 고종의 시종무관이었던 민영환은 왕에게 조약을 거부하고 파기하라고 상소를 올린다. 그는 명문가 민씨 집안 출신에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로 개화기 여러 정치적, 개인적 굴곡에도 불구하고 공직에 올라 승승장구하던 인물이었다. 고종의 명으로 1896년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했고, 1897년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식에도 참석할 정도로 왕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상소를 받은 고종은 이미 쇠락한 국가의 왕으로서 조약을 거부할 입장이 아니었다. 민영환은 자신의 뜻이 관통되지 못하는 비굴한 현실을 슬퍼하며 45세의 나이로 자결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유서 2장을 남겼는데, 하나는 동포들에게 남긴 '경고대한2천만동포유서'이고 또 하나는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그중에서 쇠락한 국가의 동포들에게 남긴 유서는 다음과 같다.

“오호! 나라의 치욕과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서 진멸하리라. 대개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도리어 삶을 얻나니 제공(諸公)은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는가. 단지 (민)영환은 한번 죽음으로 황은(皇恩)에 보답하고 우리 2천만 동포형제에게 사죄하려 하노라. 그러나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 저승에서라도 제공을 기어이 도우리니 다행히 동포형제들은 천만 배 더욱 분려(奮勵)하여 지기(志氣)를 굳게 하고 학문에 힘쓰며 한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어서라도 마땅히 저 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 오호!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죽음을 고하노라.”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민영환(閔泳煥)

그의 자결 소식과 피가 끓는 유서는 언론에 소개되어 국가의 패망을 막지 못한 슬픔을 대변하며 많은 이들에게 절박한 상황을 알리는 촉매제가 되었다. 

그런데 그가 죽은 지 반년 후인 1906년 그가 자결할 때 입었던 군복과 단도를 보관하던 방에 푸른 대나무 네 줄기가 솟아났다고 한다. 이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모여와 ‘혈죽(血竹)’이라고 부르며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고 신문에 기사가 나기도 했다. 

작년 서울의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린 ‘대한제국의 미술-빛의 길을 꿈꾸다’ 전시에는 당시 일본인 사진가 키쿠라 마코토가 찍은 혈죽 사진(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이 소개되었는데, 민영환의 초상과 함께 나무 마루 틈을 뚫고 솟아오른 대나무가  선명하게 보였다. 이 사진이 사실이라면 혈죽 이야기가 단순히 전설이나 신화가 아니었다는 증거가 된다. 

혈죽을 보고 그림을 그린 작가들은 다름 아닌 동양화가인 양기훈과 안중식이다. 그들은 이 혈죽을 수묵화로 남겨 나라를 잃고 비통한 사람들에게 죽음으로 독립의 의지를 보여주었던 민영환의 정신을 전했다. 당시 양기훈이 그린 혈죽 그림은 ‘민충정공혈죽도’(1906)로 막 자란 대나무의 가늘고 힘찬 줄기들이 화면을 채운 것으로 혈죽 이야기의 유명세를 따라 판화로 다수 제작되어 판매되었다. 당시 제작된 판화들 일부가 장서각을 비롯한 여러 곳에 소장되어 있다. 같은 시기에 발간된 대한매일신보(1906년 7월 17일자)에는 양기훈의 혈죽 그림을 판화로 제작하여 신문 한 페이지 전면에 소개되었다. 혈죽을 직접 봤다고 알려진 안중식이 그린 혈죽도 역시 목판으로 제작되어 대한자강회월보(1907) 표제지에 실렸다. 

그는 이 잡지에 이 대나무들은 “광무 병오년 5월 13일에 처음 드러났다. 22일 오전에 방문하여 모사했는데, 가장 긴 가지의 높이는 왕골의 키만큼 3척 5촌이나 되었다. 안중식 삼가 그리고 적다”라고 설명했다. 이후 두 작가의 ‘민충정공혈죽도’는 여러 책에 소개되면서 나라를 잃은 민초들의 슬픔을 표상하는 하나의 신화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제공=양은희. ⓒ제주의소리
양기훈의 민충정공혈죽도. 제공=양은희. ⓒ제주의소리

지금 제주에는 당시 판화로 제작된 ‘민충정공혈죽도’를 직접 관람할 수 있는 귀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예술공간 이아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근대판화 아카이브’전에는 양기훈이 그린 ‘민충정공혈죽도’의 판화와 이 그림을 실은 대한매일신보 등 관련 신문자료 원본과 복사본들이 전시되고 있다. 한국판화 역사라는 맥락에서 대한제국시대부터 해방 이후까지의 자료를 소개하고 있는데, 3.1절 100주년을 맞아 그 의미가 배가되는 것 같다.  

이 귀한 자료를 소장한 사람은 작가 홍선웅이다. 그는 오랫동안 판화 작업을 하면서 판화연구에도 몰두했는데 자료를 수집하고 기록하며 ‘한국근대판화사’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목판화부터 이어진 판화문화를 추적해 온 그의 목판화 개인전을 열면서 자신의 소장품을 소개하는 ‘한국근대판화 아카이브’전을 연 것이다. 홍선웅 작가는 과거 민중미술 운동에 참여했던 작가로 지금은 전라남도에 거주하면서 활동하고 있는데, 2018년 예술공간 이아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이번 전시 기회를 얻게 되었다. 

제공=양은희. ⓒ제주의소리
한국근대판화 아카이브 전시장 모습. 제공=양은희. ⓒ제주의소리

이 아카이브 전에는 그동안 보기 힘든 전시품들이 다수 있다. 그중에는 ‘신찬대방초간독’이 있는데, 이 책은 몽인 정학교, 소당 김석준, 해관 유한익이 소장한 작품들을 판화로 인쇄하여 만든 것으로 당시에 초서, 행서 등 저명인사의 서화를 판화로 만들어 보급하던 문화를 보여준다. 아마도 이런 책을 보면서 후학들이 선배와 스승의 양식과 예술혼을 배웠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 근대 문화가 확산되면서 나온 잡지, 교과서, 신소설 등도 전시되고 있다. 표지에 실린 판화뿐만 아니라 글과 같이 실린 삽화들도 볼 수 있고 신여성이자 여성의 주체적 삶을 글로 쓰곤 했던 화가 나혜석의 글과 삽화가 실린 잡지도 만나 볼 수 있다. 

제공=양은희. ⓒ제주의소리
오른쪽 하단에 나혜석의 글이 보인다. 제공=양은희. ⓒ제주의소리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여러 행사가 열리고 있다. SNS로 여러 나라의 친구들과 소통하고, 월드컵 경기를 보며 우애를 다지고, 외국 예술가의 작업을 흔하게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생산된 식량을 매일 섭취할 정도로 국가 간의 경계가 체감되지 않는 오늘날. 국가를 잃고 독립을 외치던 백 년 전의 상황이 피부로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민영환이 나라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 자결하면 남긴 말 “동포형제들은 천만 배 더욱 분려(奮勵)하여 지기(志氣)를 굳게 하고 학문에 힘쓰며 한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어서라도 마땅히 저 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는 실현된 지 오래다. ‘한국근대판화 아카이브’전을 통해 치열하게 ‘민족’과 ‘국가’를 고민했던 과거 흔적을 보고 귀하게 얻은 자유 독립에 감사하게 된다. 이 전시는 3월 27일까지 열린다.

▲필자 양은희는...

양은희는 제주에서 나고 자라 대학을 졸업한 후 미학, 미술사, 박물관학을 공부했으며, 뉴욕시립대(CUNY)에서 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9 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 <조우: 제주도립미술관 개관 1주년 기념전>, <연접지점: 아시아가 만나다> 등의 전시를 기획했으며, 여러 미술잡지에 글을 써왔다. 뉴욕을 현대미술의 눈으로 살펴 본 『뉴욕, 아트 앤 더 시티』 (2007, 2010), 『22개 키워드로 보는 현대미술』(공저, 2017)의 저자이자 『기호학과 시각예술』(공역, 1995),『아방가르드』(1997),『개념 미술』(2007)의 번역자이기도 하다. 전 건국대학교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 연구교수. 현 스페이스 D 디렉터 겸 숙명여자대학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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