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100주년-창간15주년 특집] (2)한국독립투쟁사 상징이자 정신적 좌표 백야 김좌진

지난해 4.3 70주년을 맞아 4.3의 세계화·전국화에 역량을 함께 모았던 제주작가회의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지난 1월 역사기행을 다녀왔다. 중국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안중근 의사와 김좌진 장군을 비롯한 항일독립투사들의 발자취를 따라 약 3000여 km에 이르는 7박8일의 여정이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3.1운동 100주년과 창간15주년을 맞아 12명의 제주작가들이 만주지역의 겨울날씨만큼이나 혹독했을 항일독립운동사의 궤적을 따라 새로운 결기를 다지고 돌아온 만주 항일유적지 기행 과정을 네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 편집자

/ 사진제공=제주작가회의 ⓒ제주의소리
목단강시(무단장시)는 중국내에서 연변자치주에 이어 가장 많은 13만명의 재중동포(조선족)들이 거주하는 도시이다. 곳곳에 한글 간판이 정겹다. 한글 디자인이 눈에 띄는 조선민족백화점 / 사진제공=제주작가회의 ⓒ제주의소리

# 목단강시, 발해유적 그리고 김좌진 장군

<1회에 이어> ‘만주가 과연 넓긴 넓은 땅이구나!’를 실감한 건 엄청난 이동거리와 그에 따른 소요시간이었다. 아침식사하고 한 곳을 다녀오면 점심때가 되고 다시 한군데를 방문하고 나면 저녁이었다.

하얼빈에서 전용버스로 4시간, 흑룡강성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 목단강시에 도착한 건 어둠이 짙게 깔린 시간. 목단강, 현지발음으로는 무단장이라 불리는 이 도시는 2차 대전 당시 일본 관동군의 주요기지가 있던 지역으로 중국과 조선인을 주축으로 한 항일투쟁이 끊임없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현장이 주변 도시와 마을 곳곳에 산재하고 있어 이번 여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었다.

/ 사진제공=제주작가회의 ⓒ제주의소리
무단장시 곳곳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한글간판들. 고향집 주인 임월순(64, 재중동포 3세)씨는 자신도 제주도를 여행한 적이 있다며 제주작가회의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기도 했다. / 사진제공=제주작가회의 ⓒ제주의소리

 

색색의 조명이 환하게 켜진 시내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정겨운 한글간판들. 연변자치주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13만 명의 재중동포(조선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도시답게 우리의 지치고 언 몸과 마음을 단숨에 녹여주는 풍경이었다.

‘고향집’이라는 식당에서 맛본 음식들은 여정 사흘 째 계속된 강행군에 다소 지친 일행들에겐 집 밥과 다름없었고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이곳에서 재배된 쌀과 좁쌀보다는 조금 크게 가공된 찰옥수수 알갱이 쌀을 섞어 지은 윤기 자르르 흐르는 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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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함께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발해 왕국의 흔적도 찾아볼 수 있었다.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의 성곽 일부와 궁성 주춧돌 등 유구들이 보존되고 있다. / 사진제공=제주작가회의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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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지난 1961년 발해 상경용천부 유적을 제1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했다. 발해의 역사를 당나라 때 말갈족과 다른 민족이 세운 소수민족국가의 역사로 둔갑시키고 있다. / 사진제공=제주작가회의 ⓒ제주의소리

 

여정 나흘 째 아침, 발해의 유적이 남아있는 닝안시(영안)로 향했다. 고구려와 함께 한때 만주대륙의 주인이었던 발해. 닝안시의 보하이진에는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의 성곽 일부와 궁성의 주춧돌 등 고대국가의 자취가 일부 보존되어 있었다. 하지만 중국정부가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기획하고 추진해 온 동북공정의 숨은 의도를 체감할 수밖에 없는, 유적안내판을 읽는 순간 왜곡된 역사의 현장이라는 느낌이 더 강해서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남았다.

이날 마지막 기행지는 백야 김좌진 장군이 짧은 생을 마감한 순국 장소. 산시역 부근의 작은 마을에 있는 옛 금성정미소 터였다.

/ 사진제공=제주작가회의 ⓒ제주의소리
백야 김좌진 장군 구지 정문. 이곳은 김좌진 장국이 순국한 옛 금성정미소터가 있는 곳이다. / 사진제공=제주작가회의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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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장국이 순국한 옛 금성정미소터. 독립투쟁사의 상징이었던 김좌진 장군은 이곳에서 암살자 박상실의 총탄에 서른 살의 짧고 굵은 생을 마친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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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김좌진 장군은 1930년 1월24일 암살로 마흔 두살 나이에 생을 마친다. 김좌진 장군의 순국 장소를 알리는 비석 ⓒ제주의소리

 

암살되기 1년 전인 1929년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 개간, 문화 계몽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하던 그가 마지막으로 몸을 의탁한 장소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기사는 하얼빈 출신으로 그도 우리처럼 이곳이 낯설기는 매한가지여서 부정확한 내비게이션 안내에 의지하며 달리다가 한 시간여 길을 잃고 헤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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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김좌진 장군(1889~1930년) ⓒ제주의소리

 

차창 밖으로 끊임없이 펼쳐지는 풍경은 드넓은 벌판과 자작나무들만 서있어서 마치 정지된 화면을 보는 느낌이었다. 항일투사들이 오직 두발로 걸어 다녔을 백 년 전의 이 길은 어땠을까.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순국 장소이자 지금은 소박하게 조성된 기념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아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다.

그가 북로군정서 사령관 직책을 맡은 것이 1919년. 그 다음해인 1920년 6월에 홍범도 장군이 이끌었던 봉오동 전투와 더불어 독립투쟁사상 최대의 승리로 기록되는 10월의 청산리 대첩을 거둔 이후, 그의 삶은 일본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서 만주 곳곳을 옮겨 다니면서도 독립투쟁의 의지를 결코 꺾지 않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1930년 1월 24일 이 정미소에서 암살자 박상실의 총탄에 쓰러져 마흔 두 살의 짧고 굵은 생애를 마쳤으나 그는 분명 한국독립투쟁사의 상징이자 정신적 좌표로 추앙받기에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었다.

마침 우리가 방문한 날은 장군의 여든 아홉 번째 기일을 열흘 남겨둔 시점이라 감회가 새로웠고, 이미 어두워진 기념관 마당 장군의 흉상 앞에서 깊이 허리 숙여 추모의 예를 올린 후 다시 무단장시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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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투쟁사의 상징이자 정신적 좌표로 추앙받는 김좌진 장군의 흉상. 제주작가 일행은 이곳에서 한참을 허리숙여 추모했다. / 사진제공=제주작가회의 ⓒ제주의소리

 

여정 닷새 째, 아침부터 버스를 달려 3시간 반 거리에 있는 삼차구 수분하시로 이동했다. 수분하로 가는 도중 스쳐지나간 무링시(목릉)는 행정구역상 무단장시 산하에 있는 4개의 도시 중 하나로 안중근 의사가 신부가 되길 원했던 큰 아들 안분도(당시 5세)가 일본에 포섭되어 낚시꾼 복장을 한 조선인이 권한 과자를 먹고 독살된 아픔이 있는 도시다.

안 의사 순국 이후 가족들은 일제의 추적을 피해 이곳 무링시로 피신하여 생활하게 되는데, 이때 안중근 가족의 도피를 도운 이가 도산 안창호였고 하얼빈 거사 3인방 중 하나인 류동하의 여동생 류동선이 어린 생명의 최후를 목격한 증인이었다고 전해진다. <3회에 계속> / 이종형 시인, 제주작가회의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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