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프 카니아의 모험, 어떤 이아 레지던시 작가 이야기
키프 카니아의 모험, 어떤 이아 레지던시 작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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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희의 예술문화 이야기] 38. 현대극장 자료 발굴한 미국 작가 '키프 카니아' 그리고 레지던시 중단

지난 겨울 ‘예술공간 이아’ 레지던시에 참여한 미국 사진작가 키프 카니아(Kip Kania)는 2018년 결과 보고전을 여는 동안 인상적인 설치 작업으로 눈길을 끌었다. 이아 내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 벽면과 바닥에 영화필름 휠 몇 개를 걸고 지난 영화관의 추억, 자신의 과거에서 추출한 단어들로 벽을 채운 것이다. 

키프 카니아의 설치 작업. 제공=양은희. ⓒ제주의소리
키프 카니아의 설치 작업. 제공=양은희, 키프 카니아. ⓒ제주의소리

그 영화필름들은 예사롭지 않은 환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작년 12월 말 현대극장이 소유주의 의사에 따라 철거되기 시작했다. 1944년 첫 문을 연 이 극장은 도내 최초의 극장으로 1978년 폐관까지 원도심의 문화 역사를 증명하는 곳이었다. 도시재생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그 가치를 이어가고자 아라리오 미술관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인수하고자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그러니 철거소식을 들은 이들은 제주 도시재생의 험난한 과정에 심장이 철렁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아트스페이스 C 안혜경 관장은 저녁뉴스로 이 소식을 접하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리고 키프 카니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둘은 그날 밤 이미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현대극장 철거건물 안으로 들어가 혹시라도 건질 것은 없는지 살폈지만 큰 소득이 없었다. 포기할 수 없었던 키프는 그 다음날 낮에 혼자서 다시 건물로 들어갔고 영사실에서 오래된 영화필름 몇 개, 앨범, 영사기 부품 등을 발견했다. 그중에서 낡은 부품과 이미 파손된 필름 등을 가지고 설치작업을 한 것이다. 

지난해 12월 31일 철거된 현대극장.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지난해 12월 31일 철거된 현대극장.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겨울밤 두 사람이 벌인 모험에서 시작된 이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안 관장과 키프는 상태가 좋은 몇 개의 필름을 한국영상자료원에 보냈고 지난 2월 말 그 필름 속의 내용들이 1970~80년대 제작·상영된 대한뉴스, 문화 영화 등으로 일부는 소장가치가 있다는 답을 듣는다. 이 반가운 소식은 낡은 건물을 자세히 연구하고 탐사할 기회도 없이 사유 재산이라는 이유로 신속하게 철거당한 사건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들어간 용기의 대가이기도 했다. 

낯선 이방인과 토박이 문화공간 주인의 만남은 물론 그날 밤이 처음은 아니다. 키프는 1990년대 후반 5년 동안 제주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면서 제주의 작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했고, 안관장과의 인연도 이때 시작되었다. 이후 고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고 그는 다시 제주에 와서 옛 친구들과 재회하며 관계를 이어갔으며 2015년에는 아트스페이스C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그리고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제주의 이아 레지던시에 선정되어 2018년 12월부터 2월까지 3개월간 체류할 기회를 얻었는데, 이 기회가 ‘현대극장 야간 탐사’와 문화자료 발굴로 이어진 것이다. 

아트스페이스 C에서 요리하는 키프. 제공=양은희. ⓒ제주의소리
아트스페이스 C에서 요리하는 키프. 제공=양은희. ⓒ제주의소리

그러나 앞으로 이런 흐뭇한 이야기는 이아에서 나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2017년 시작해서 2018년까지 2년간 지속된 이아 레지던시는 키프의 참여를 끝으로 올해 중단되었다. 주관기관인 제주문화예술재단이 사업비를 확보하지 못한 것이다. 국내외 작가들에게 무료로 작업실과 숙박, 약간의 지원금을 제공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제주나 국내에서 예술가들에게 귀한 기회였다. 그동안의 치열한 경쟁률은 이런 기회가 필요한 예술가들이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2년 동안 45명에 달하는 뛰어난 작가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임흥순, 옥정호처럼 주목받는 작가들부터 고승욱과 같은 제주 작가까지 다양한 작가들이 이아를 터전으로 삼아 창작의 불씨를 피웠고, 최근에는 자신의 판화 컬렉션을 기꺼이 이아 전시에 내준 홍선웅 작가도 있다. 이아 레지던시 결과보고전은 새롭게 창작한 작품을 처음으로 소개하며 여느 미술관 전시가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그동안 이아 레지던시는 공적 자금을 제대로 투자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문화의 질을 충분히 보여준 셈이다.  

2017년 예술공간 이아 개막 날 모습. 제공=양은희. ⓒ제주의소리
2017년 예술공간 이아 개막 날 모습. 제공=양은희. ⓒ제주의소리

올해 이아가 사업비를 확보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전문가 예술인들에게 주는 혜택에 비해 일반인들은 소외된다는 것이다. 도시 재생의 불꽃이 되길 바랐는데 인적이 많지 않다는 것도 지적되곤 했다. 도의회는 인근 주민을 비롯한 일반인이 많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 즉 생활예술을 위한 공간으로의 전환을 주문한 것이다. 

하지만 이아 레지던시는 삼도2동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내의 창작환경, 도내의 스튜디오 프로그램 및 레지던시 지형, 지역 예술가의 소외감, 생활예술의 목적 등 여러 관련 이슈들과 분리해서 볼 수 없다. 당연히 여러 사람의 다양한 의견을 모아야한다. 특히 생활예술은 엘리트미술과 주요 축을 이루며 성장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문화의 전반적인 질적 성장과 만족도를 확대하기 위해 상호간의 유기적 역학을 가동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인공지능부터 가상현실까지 테크놀로지는 우리의 생각과 삶을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생활 예술은 단순히 취미 생활을 이어가는 수준이 아니라 청소년부터 노년까지 세대별로 인간의 창의력을 자극하고 상상력을 접목할 수 있는 자아 표현의 장이 되어야 한다. 반복되는 예술 취향을 거부하고 새로운 예술의 변화를 보여주는 훌륭한 예술가의 작업은 평범함에 익숙한 일반인에게 영감이 될 수도 있다. 

평범함을 거부하고 모험과 실험을 하는 창작인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생활예술 공간이 필요하다. 그들을 자원으로 삼아 제주의 미술 생태계를 생산적이고 건강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미지의 것을 탐구하는 이들을 장려하는 환경을 만들 필요가 있다. 낯선 이방인이 사람이 근접하기 어려운 철거 현장에 들어가 무너진 벽돌 사이를 헤집고 영화필름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모험심을 장려하는 문화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며 그의 모험이 한국영상자료원에 소장할 만한 자료를 찾아내어 우리 문화의 한 페이지를 만들었다는 것에서 교훈을 얻을 일이다.    

▲필자 양은희는...

양은희는 제주에서 나고 자라 대학을 졸업한 후 미학, 미술사, 박물관학을 공부했으며, 뉴욕시립대(CUNY)에서 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9 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 <조우: 제주도립미술관 개관 1주년 기념전>, <연접지점: 아시아가 만나다> 등의 전시를 기획했으며, 여러 미술잡지에 글을 써왔다. 뉴욕을 현대미술의 눈으로 살펴 본 『뉴욕, 아트 앤 더 시티』 (2007, 2010), 『22개 키워드로 보는 현대미술』(공저, 2017)의 저자이자 『기호학과 시각예술』(공역, 1995),『아방가르드』(1997),『개념 미술』(2007)의 번역자이기도 하다. 전 건국대학교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 연구교수. 현 스페이스 D 디렉터 겸 숙명여자대학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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