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생존수형인 92세 박순석, 정부 희생자 인정...“사무친 70년 세월 이제는 떳떳”

“가슴에 사무친 70년 세월을 이제는 떳떳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 가도 부끄럽지 않아요. 이런 날을 만나기 위해서 명(命)이 붙어있었나 봅니다.”

92세 박순석 할머니의 목청이 파르르 떨렸다. ‘떳떳하다’, ‘너무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폭도년, 빨갱이...10대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억울하고 무거운 역사의 족쇄는 안타깝게도 70년이 지난, 나이 아흔을 훌쩍 넘기고서야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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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희생자로 인정받은 박순석 할머니가 27일 취재진과 만나 지난 시간을 이야기하는 도중 눈물을 닦고 있다. ⓒ제주의소리

27일 정부가 추가 인정한 제주4.3 희생자와 유족 5081명 가운데 한 명인 박순석 할머니. 그는 1949년 7월 7일 전주형무소 2차 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32·33조를 근거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죄명은 이적죄, 간첩죄다. 

박순석 할머니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중학교 1학년까지 공부를 마치고 해방 이후 고향 제주로 돌아왔다. 일본어 실력을 인정받아 일본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연결하는 제주우체국 교환수로 일했다. 언젠가 꼭 간호사가 되겠다는 꿈도 품었다.

박순석 할머니 인생이 뒤틀린 계기는 짧은 순간이었다.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조선’이란 단어를 그대로 옮겼는데, "왜 '한국'으로 쓰지 않았냐"며 간첩으로 의심받아 졸지에 도망치는 신세가 됐다. 갈 곳 없는 발걸음은 마침 1948년 남한 단독 선거 반대 흐름에 휩쓸려 산으로 향한다. 1949년 2월 토벌대에 붙잡혀 전주형무소로 보내졌고, 1년가량 복역한 뒤에 출소한다.

이후 예비검속으로 형제처럼 서로를 아끼던 친구 두 명은 총살 당했지만, 자신은 알고 지낸 군 인사와의 인연으로 가까스로 살아남아 현재에 이른다. 4.3을 겪은 누구나 그렇듯, 영화보다 극적이고 고통스러운 삶이었다.

박순석 할머니는 자녀들이 장성하고 다시 손자를 볼 때까지 자신의 지난 과거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자녀들은 2015년 제주4.3도민연대가 박순석 할머니를 만나 생존수형인인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야 어머니의 아픔을 알았다. “당신의 일대기는 내가 언젠가 책으로 정리하겠다”고 약속하며 아내의 상처를 보듬던 남편은 지금은 안타깝게도 병상에 누워 있다. 

27일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취재진 앞에서 “난생 처음으로 방송, 신문도 찾아오고 정말 좋다. 오래 살다보니 이런 순간도 온다”면서 소녀처럼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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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자택에서 진행된 인터뷰.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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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미소짓는 박순석 할머니. ⓒ제주의소리

그리고 “지금껏 지난 세월은 가슴 속에 새겨 두고 꺼내지 않았다. 자녀들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행여나 아이들에게 누가 될까봐. 그런데 지난해 4.3 70주년이 됐다고 하니 그제야 용기를 내서 자녀들에게 내 과거를 들려뒀다”고 토로했다.

박순석 할머니에게는 70년 넘게 자신을 옭아맨 ‘폭도년’, ‘간첩’, '빨갱이'란 상처가 있다. 세상 떠나는 날까지 품고 가겠다는 다짐도 했었다. 제주4.3도민연대가 처음 접촉할 때도 몇 번이나 찾아가서야 설득할 수 있었다는 후문이다. 그래서일까, 할머니는 재심 청구로 ‘무죄’를 얻어낸 공소기각이 너무나 기쁘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재판으로 나의 명예는 회복됐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까지 강조하면서 “내 개인의 명예 회복도 감사하지만, 4.3으로 고초를 겪은 우리(수형인과 희생자)들이 법적으로 역사에 남겨졌다는 게 가장 기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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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석 할머니는 이날 취재진에게 "4.3으로 고초를 겪은 우리(수형인)들이 법적으로 역사에 남겨졌다는 게 가장 기쁘다"고 밝혔다. ⓒ제주의소리

어머니를 옆에서 지켜보던 아들 임용훈 씨는 “정부는 하루 빨리 배·보상에 나서야 한다. 사람 인생을 저렇게 만들어놓고 더 이상 조치를 늦춰서는 안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박순석 할머니는 아직 희생자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 “생사를 같이 했던 분들이여, 기운내고 힘내자. 이제 더 이상 우리는 눈치 볼 일도 없다. 모두 떳떳하게 기쁘게 살아가자”고 말했다. 이날 박순석 할머니의 눈물은 더이상 서러움의 눈물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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