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음악 무용 등 다양한 장르에 미래 세대 공략...프레젠테이션 발표 ‘눈길’

숨죽인 제주4.3의 목소리를 대신해 거리에서 외친 제주민예총의 4.3전야제. 돌고 돌아 다시 거리에 선 4.3전야제는 한층 더 다양한 예술의 옷을 입고 ‘기억과 전승’이란 핵심에 집중했다.

2일 오후 5시 45분부터 제주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올해 4.3전야제는 최근 몇 년과 비교하면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2014년부터 제주4.3평화재단이 주도한 지난 4년과 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이름으로 어느 때 보다 많은 역량이 투입된 지난해와도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첫 해인 1994년부터 2013년까지 제주민예총이 이끌어온 방식과 일부 유사하나 내용은 한층 더 선명하고 세분화됐다. 요약하면 ‘기억과 전승’이라는 주제를 단단히 뿌리 삼고, 그 위로 다양한 예술 장르와 시도를 꽃피웠다. 

행사의 시작과 끝을 봐도 잘 알 수 있다. 서귀포고등학교 합창단 ‘G-Boys’가 첫 순서를 책임졌고, 어린이합창단 ‘소리풍경’이 피날레를 장식했다. 

까까머리 남고생들이 어색한 표정과 저음으로 부르는 <흔들리며 피는 꽃>, <붉은 노을>, 그리고 뮤지컬 <킹키부츠> 수록곡 <Just be>는 진지하면서 유쾌했다. 쌀쌀한 날씨를 버티며 손수 접은 종이 동백꽃을 품고 노래한 소리풍경은 <고향의 봄> 등으로 끝까지 남은 관객들에게 잔잔한 미소와 감동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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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합창단 소리풍경의 공연. ⓒ제주의소리

2014년 음악 경연 TV프로그램 <슈퍼스타K 6> 준우승자인 가수 김필이 등장하자 많은 여성 팬들은 일제히 카메라 포커스를 맞췄다. 김필은 검은 정장, 넥타이를 차려 입고 “제주 공연은 이번이 처음이다. 무엇보다 이렇게 뜻 깊은 자리에 초청해줘서 감사하다”는 차분한 자세로 박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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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김필의 공연을 보기 위해 많은 청년들이 모였다. ⓒ제주의소리

전야제 무대를 채운 공연들은 다양성을 살렸을 뿐만 아니라 예술성도 빼어났다. 그리고 메시지도 또렷했다.

극예술에 힘을 준 시도는 성공적인 선택이었다고 본다. 눈앞에서 보여주는 프로 배우들의 연기는 다른 어떤 방법보다 4.3의 슬픔을 배가시키고 메시지를 멀리 전달했다.

극단 경험과상상은 지난해 4.3 70주년 광화문 국민문화제에서 선보인 뮤지컬 작품에 <아리랑> 등의 노래를 추가한 <4.3 초혼>을 공연했다. 배우들은 마치 제주 땅 깊은 아래서 눈감은 희생자들을 되살린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두운 색을 칠했다. 유일한 원색은 가슴의 동백꽃뿐이다. 이들은 “우리들의 억울한 상처만이 아닌 용감한 목소리, 통일 조국을 만들고 싶던 희망, 평화롭게 살고 싶던 꿈을 기억해달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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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경험과상상의 '4.3 초혼' 공연. ⓒ제주의소리

제주의 대표 연극배우로 손꼽히는 강상훈, 정민자는 관객들의 눈물샘을 정면으로 자극했다. 4.3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편지를 받아든 80세 노인 순이(정민자 역)가 “아버지는 여기서 기다릴 테니 행복하게 손자들과 잘 살다가 와라. 여기서는 헤어지지 말고 잘 살아보자. 내 딸 순이야”라고 눈물 가득히 편지를 읽을 때는 관객들도 눈매를 훔쳤다.

특히 “이제는 네 행복만, 건강만 생각하며 살아라. 진상규명이니 화해니 상생이니 하는 것은 저기 젊은 아이들이 잘 해줄 것이다”라는 편지 내용은 이번 전야제가 말하고 싶은 적확한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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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자, 강상훈 배우의 공연. 화면 속은 80세 노인 '순이'를 연기한 정민자. ⓒ제주의소리

한층 더 깊고 낮은 감정으로 최상돈의 4.3노래 <애기동백꽃의 노래>를 편곡하며 놀라움을 선사한 퓨전 국악 그룹 ‘잠비나이’, 몽골 음악인 ‘뭉흐진(MUNKHJIN)’의 자작곡 <한라산의 눈물>을 들고 온 국악 그룹 ‘소란’은 전야제 공연의 다양성을 책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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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의 무대.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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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비나이의 공연. ⓒ제주의소리

김영란 민족무용단은 4.3평화공원 설치 작품 <비설> 속 아이와 어머니를 모티브로 한 작품을 선보였다. 진혼곡을 배경 삼아 한국무용과 현대무용의 적절한 조화로 슬픔의 몸짓을 훌륭히 표현했다.

4.3 추모 마음을 담아 부른 <4월>, 객석 안 재일교포들에게 더욱 반가웠을 <임진각>, 그리고 <상록수>까지…. 양희은의 무대는 순서나 비중이나 가장 많은 관객들이 환호하기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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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민족무용단의 공연. ⓒ제주의소리
열창하는 양희은. ⓒ제주의소리
열창하는 양희은.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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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은 무대가 끝나자 큰 박수를 보내는 관객들. ⓒ제주의소리

만약 김동현 문학평론가와 송승문 4.3희생자유족회장의 발표가 없었다면 올해 전야제는 자칫 공연 일변도로 흐를 가능성이 높았다.

김동현 평론가는 절제하면서 핵심을 찌르는 문장과 영상이라면, 송승문 회장은 자신의 어머니·아버지에게 보내는 감성적인 메시지다.

뜨거웠던 8월, 해방된 나라의 태양
그 아래서 우리는 눈이 멀어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해방은 빛이 아니라 또 다른 어둠이었습니다.
그래서 외쳤습니다.
3월의 함성이 8월의 태양이었음을 알았기에 뜨겁게 소리쳤습니다.

3.1 정신 계승, 통일독립 전취

탕- 탕- 탕- 탕- 탕- 탕-

총소리였습니다. 학살이었습니다.
방아쇠는 경찰이 당겼습니다.
총구 뒤에 서 있던 하얀 얼굴 낯선 군인을 향해서 외쳤습니다.

탄압이면 항쟁이다. 그렇게 우리는 들불이 되었습니다.

학살은 집요했습니다. 무자기축 그 토벌의 현장에서
제주사람들은 벌레였습니다. 섬멸, 박멸.
군인과 경찰의 총구 앞에서 우리는 벌레처럼 죽어갔습니다.

그래도 살아야했습니다. 살기 위해서, 살아야 해서
어머니를, 남편을, 아이를 가슴에 묻었습니다.
그렇게 묻힌 사람들은 죽어서 오름이 되었습니다.

제주 오름은 죽은 자들의 눈물입니다.
살지 못해서, 살아야 해서, 살기 위해서 흘린, 우리들의 슬픔입니다.

- 2019 4.3추념식 전야제 김동현 발표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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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문학평론가의 발표. ⓒ제주의소리

겨우 열여덟 살이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시청 대학로에서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으면서 한창 웃을.
그 나이에 제 어머니는 주정공장에서 저를 낳았습니다.
발 한 번 제대로 펼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떨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트럭에 실려 비행장으로 끌려갔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이 나이가 되도록 알지 못합니다.

4.3은 유족들만의 기억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기억입니다. 우리 모두의 아픔입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였기에, 4.3은 봄이 되었습니다.

- 2019 4.3 추념식 전야제 송승문 발표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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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문 4.3희생자유족회장의 발표 모습. 화면 속 인물은 송승문 회장의 어머니. ⓒ제주의소리

올해 전야제는 지난해 LED 동백꽃처럼 눈에 띄는 퍼포먼스는 없었다. 관객들에게 나눠준 촛불 모양 플라스틱 조명은 43초간의 묵념과 공연에서 흔드는 용도로 사용했다. 대만, 오키나와 인사들을 초청해 동아시아 평화 메시지를 낭독한 외연 확장도 없었다. 햇빛이 내려앉고 쌀쌀해진 날씨와 계획된 시간보다 늘어난 행사 시간은 관객들이 끝까지 남아있기 힘들게 하는 요인이었다. 

하지만 ‘기억·전승’이라는 우리 앞에 놓인 가장 큰 4.3의 숙제를 전달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그 전달 방법을 다양하게 고민한 시도는 분명 높이 평가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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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야제에는 어린 자녀들과 함께 한 가족 관객이 여럿 보였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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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관객들. ⓒ제주의소리

이번 전야제는 지난해처럼 김명수 대표(공연기획사 이다)가 기획·연출을 책임졌다. 소리풍경 공연까지 끝나고 의자를 정리하던 김명수 대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부담을 안고 무대를 만들었다”고 소탈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예산을 포함한 여건이 허락된다면 1년 전부터 전야제를 준비하는 상상을 해본다. 관객이나 출연진 모두 다른 지역에서 많이 왔는데, 도민들이 더 많이 노래하고 율동하며 함께하는 자리를 만든다면 4.3 전야제의 취지가 더욱 빛날 것”이라고 소감을 남겼다.

제주민예총이 시작해 10년을 이어간 4.3 전야제는 돌고 돌아 다시 원위치에 왔다. 처음과는 4.3에 대한 인식도, 사회 분위기도, 세대도 무척 달라졌다. 4.3 전야제의 새로운 역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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