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제37회 대한민국연극제 제주예선대회(제24회 제주연극제)

봄기운이 만연해지는 이맘때가 되면 전국에서는 일제히 연극 공연이 열린다. 올해로 37회를 맞는 ‘대한민국연극제’ 덕분이다. 1983년 전국지방연극제로 시작해 1988년부터 2015년까지 전국연극제라는 명칭으로 진행해 왔다.

2016년부터 대한민국연극제로 바뀌었지만, 행사의 성격은 예나 지금이나 ‘전국 경연’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사단법인 한국연극협회 산하 전국 지회들이 각자 예선을 열어 대표작을 선발하고, 그 작품들을 모아 일종의 본선대회를 가진다. 치열한 경쟁 속에 극단과 지역을 대표하는 전국 연극인들의 축제인 셈이다.

한국연극협회 제주도지회(제주연극협회)에게도 대한민국연극제 예선대회는 초겨울마다 여는 소극장연극축제와 함께 대표 행사로 손꼽힌다.

소극장연극축제가 협회에 속하지 않은 극단과 대학동아리, 아마추어 동호회, 타 지역 초청 공연까지 문호를 넓힌 자리라면, 대한민국연극제 예선대회는 협회 소속 극단 간의 실력을 가늠하는 경쟁의 장이다.

때문에 ‘협회를 중심으로 한’ 제주 연극의 현재 역량을 확인하는 중요한 자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단순 예선전을 넘어 각 지회가 지역 이름을 따서 ‘00연극제’로 소개하는 이유도 비슷하다고 본다. (서울연극제는 1977년부터 시작한 별도의 행사라 제외.)

# 울고, 웃고, 섬찟한 올해 제주 예선대회

올해 ‘대한민국연극제 예선대회-제주연극제’는 4월 6일부터 8일까지 오후 7시 30분부터 제주도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진행했다. 참가 팀은 세 곳. 극단 가람(대표 이상용), 극단 이어도(대표 김광흡), 극단 파노가리(대표 문무환)다.

극단 가람은 한윤섭 작가의 2006년 초연작 <후궁 박빈>을 들고 왔다. 연출은 이상용 대표다.

임금이 10년째 자녀를 낳지 못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신하들은 고육지책으로 흥부 마누라를 후궁으로 들인다. 남편 흥부와 아들 15명을 두고 궁으로 들어간 흥부 마누라는 다행히 임금의 아들을 출산하나, 아이는 곱슬머리에 검은 피부색을 띄고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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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가람의 '후궁 박빈' 공연 인사 장면. ⓒ제주의소리

<후궁 박빈>은 초연 이후 최근까지 여러 곳에서 여러 차례 공연한 작품이다. 대한민국연극제 역시 2017년 경남 예선, 지난해 서울 예선까지 등장했으니, 가람은 안전한 선택을 했다고 봐야겠다.

배우들의 연기나 연출은 ‘권력욕 앞에 소시민의 삶이 무너지는 블랙코미디’라는 원작의 느낌을 무난히 살려냈다고 본다. 이동훈(이인문 역), 홍창현(상선 역), 고가영(흥부처 역), 김금희(대비 역) 등 고참 배우들은 역할에 맞는 연기를 소화했고 박세익(임금 역), 이승준(도승지 역) 등 비교적 젊은 배우들도 어색함 없이 작품에 녹아들었다. 무엇보다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관객의 크고 작은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는 사실은 가람의 준비와 기획 의도가 효과 있었음을 증명한다.

다만, 이전 작품인 <힘차게 달려가세>에서도 느꼈지만 녹음한 음악 상태가 고르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중요한 순간에서 손발이 맞지 않은 조명의 집중력도 마찬가지.

엄인희 작가의 1995년 초연작 <그 여자의 소설>을 택한 극단 이어도 역시 가람과 비슷한 여건이다. <후궁 박빈> 만큼이나 많은 연극인들이 무대에 올린 유명 작품으로 2002년 전북 예선, 2006년 대전 예선, 2007년 경북 예선 등 대한민국연극제에서도 익히 소개됐다. 연출은 김광흡 대표다.

<그 여자의 소설>은 일제강점기 시절인 1941년부터 해방, 6.25전쟁, 산업화 시기까지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굴곡진 삶을 살아온 한국 여성의 일상 속 고난을 조명한다. 남존여비 사상을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 위안부를 피하고 가난한 집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녀를 두고 김해 김씨 집안에 씨받이로 들어온 주인공. 자녀를 낳지 못한 첫째 부인과 자매처럼 끈끈한 정을 나누지만 전쟁통에 이별하고, 뱃속의 둘째 아이도 남편의 폭력으로 유산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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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이어도의 '그 여자의 소설' 공연 인사 장면. ⓒ제주의소리

이어도는 이번 작품에서 무대 장치와 소품에 적지 않은 공을 들였다. 커다란 세트로 언덕길을 구현하고, 벚꽃 길을 재현하기 위해 인조 나무 여럿을 설치했다. 큰댁(이선숙 배우)과 작은댁(고지선)의 전쟁통 이별, 사실상 남남으로 살아야했던 작은댁과 딸 조춘이(고수연)의 조우 등 주요 장면에서는 객석이 눈물 참는 콧소리로 채워졌다. 밉상 역할을 제대로 소화한 함창호(남편 역)의 열연은 관객의 반응을 저절로 이끌어 냈다.

검증된 작품은 분명하나 더 도전적인 작품은 선택할 수 없었는지 작은 아쉬움이 남는다.

한동안 제주 예선대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극단 파노가리는 올해 유일한 창작극 겸 초연작을 공연했다. 문무환 대표가 쓰고 연출한 <하얀 초상화>는 공포극을 표방한다.

주인공은 고아 출신이면서 초현실주의 미술작가 겸 사이코패스. 동물을 잔인하게 죽이면서 예술적 영감을 받고, 매수한 여자를 작품 모델로 삼고 살해해 인육으로 먹는 '괴물'이다. 동거녀는 시간이 지나 주인공의 성격에 겁먹고 도망쳤지만, 돌아오는 건 계획 사고로 망가진 두 다리뿐. 그렇게 10년이 지나도 주인공의 수상한 행동은 달라지지 않는다.

<하얀 초상화>는 인육, 살인, 동물 학살 등 현실에서 금기시 되는 행동을 노골적으로 내세운다. 피를 떠올리는 붉은 색 조명, 사람 목이 잘린 섬뜩한 그림, 음산한 음악 등은 모처럼 제주 관객들에게 공포극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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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파노가리의 '하얀 초상화' 공연 인사 장면. ⓒ제주의소리

쉽지 않은 소재임에도 과감히 도전하는 자세는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러나 의도를 관객에게 전하는 표현은 서툴게 느껴졌다. 한 마디로 관객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꽤 어려웠다.

두수(문무환)와 현재의 한수(문재승), 10년 전 한수(문재용)와 동거녀 연지(조재실)가 나누는 텍스트를 줄이면서 공포극다운 비주얼 적인 요소를 더 늘리면 어떨까 하는 사족이 떠올랐다.

# 37년 간 찾아온 관객과 조금 더 가까이

이번 ‘대한민국연극제 예선대회-제주연극제’의 출품작은 관객 입장에서 느낌이 확연하게 나뉜다. 웃고, 울리고, 섬찟하다. 검증된 작품의 비중도 높아 관객 입장에서는 일면 반갑기도 하다. 그러나 정반대로 보면 신선함, 창작과는 거리가 멀다는 의미와도 맥이 닿는다.

<후궁 박빈>과 <그 여자의 소설> 모두 고통 받는 여성이 주인공이자 이야기의 한 축이다. 작품의 시대나 소재가 다르다 하더라도 비슷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주제 선택에 있어서 오늘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시도 역시 미진하다.

참여도를 보면 협회 소속 극단(가람, 세이레, 이어도, 파노가리, 정낭)의 60%인 3곳이 참여했기에 비중은 적지 않다. 그럼에도 절대적인 숫자로 보면 많다고 보기 어렵다. 지난해는 가람, 이어도 단 두 곳만 무대에 오른 바 있다. 제주에서 활동하는 크고 작은 극단을 모두 합하면 20곳에 육박하는데, 협회 외연 확장의 필요성을 제주 예선대회를 통해 절감한다. 창작 공연이 늘어나는 문제 또한 이와 연관돼 있다고 본다. 

무엇보다 도민들에게 극단과 협회의 실력을 공개하는 의미 있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관객과의 접촉이 극히 적다는 사실이 가장 놀랍고 문제다.

공연 시작 전후로 무대 위에서 작품과 예선대회를 소개하는 순서를 가지는 게 큰 무리일까. 더욱이 공연이 날마다 이어가는 일정 상 다음 작품을 알릴 필요는 상식으로도 충분해 보이지만, 3일 공연 모두 말없이 시작해 말없이 끝났다. 더욱이, 연극을 보러오는 적지 않은 관객이 공연 중 핸드폰, 카메라 예절을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자칫 제주연극협회가 '행사를 하던 대로 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물론 제주연극협회는 최근 관객평가단을 모집해 연극 소비층을 늘리는 시도에 나섰다. 총 38명이 신청하면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 제주 예선대회가 열리는 동안 문예회관에는 고등학생 연극부 동아리부터 노년층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37년 간 이어온 만큼 기억하고 찾아오는 소중한 관객이 분명 존재한다.

대한민국연극제 예선대회-제주연극제의 최우수, 우수상은 제주도지사, 제주도의회의장상으로 수여한다. 비중 있는 상일 뿐만 아니라, 제주 연극계의 가장 큰 행사임에도 제주도 문화예술 행정 관계자는 찾기 어려웠다. 연극 예술에 대한 무관심은 아니라고 애써 짐작해본다.

올해 부산연극제는 “희곡부터 연출, 연기까지 총체적으로 열정이 부족했던 것 같다. 기본기를 바로잡고 초심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는 심사위원들의 총평과 함께 최우수연기상을 시상하지 않았다. 일부 심사위원은 "지역 연극계 발전과 나눠주기식 상이 되지 않기 위한 결단"이라는 돌직구를 던졌다. 대전연극제는 극단 15곳 가운데 단 2곳만 참여하면서 경연대회용 행사로 전락했다는 지역 여론의 빈축을 샀다.

제주연극제는 익숙함을 깨고 낯설지만 어렵지만 하나씩 시도하는 노력을 이어가야 한다.

대한민국연극제 제주예선대회 참가자들이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제주의소리
대한민국연극제 제주예선대회 참가자들이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제주의소리

한편, 올해 제주 예선대회 최우수상은 가람의 <후궁 박빈>이 수상하면서 제주도 대표로 대한민국연극제에 참여한다.

우수상은 이어도의 <그 여자의 소설>, 신인연기상은 강명숙(그 여자의 소설)과 조재실(하얀 초상화), 연출상은 이상용, 스텝상은 <후궁 박빈>, 연기상은 고가영(후궁 박빈)과 강종임(그 여자의 소설)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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