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의회, 정책차롱 통해 “4.3사건 미군 개입에 대한 명확한 진상규명 필요”

한국경비대 미군자문관 Leach 대위가 4.3진압계획을 점검하고 있음.(1948. 5.15. Mootz 촬영, NARA). ⓒ제주의소리
한국경비대 미군자문관 Leach 대위가 4.3진압계획을 점검하고 있음.(1948. 5.15. Mootz 촬영, NARA). ⓒ제주의소리

제주4.3사건 당시 미군이 개입했다는 다양한 자료 수집과 증언 분석을 통해, 향후 미국(미군정)의 책임을 묻는 등의 진상규명 필요성을 제기한 보고서가 나왔다.

제주도의회 정책연구실은 9일 ‘4.3사건 미군이 얼마나 개입했나?’라는 정보소식지 [정책차롱]을 발간했다.

보고서는 “미군이 제주도를 거대한 킬링필드(killing field)로 바꾸어 놓는데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언급한 미국의 사회학자 조지 카치아피카(George Katsiaficas)의 말을 인용하면서 제주4.3 당시 미군 측의 개입에 관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보고서는 4.3 당시 제주도에서 미군의 개입 사례의 유형을 ▲주한 미군사령관과 고문관들이 한국경찰과 경비대(대한민국육군 전신)에게 직접 명령을 하달하고 ▲제주의 미군 고문단들이 실제 공중과 육상작전을 관리 및 감독하는 한편 ▲제주도에 주둔한 미군 부대가 우리 측 진압군에게 군수지원 및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강경진압을 지휘했다고 분석했다.

4.3 당시 제주도에 미군 주둔 병력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 상황.

보고서는 프랑스 파리7대학의 버트랜드 로에너(Bertrand M. Roehner) 교수의 논문과 당시 미군 측의 비밀문건, ‘주한미군사’ 사료 (HUSAFIK), 미군 증언 등을 종합해보면 1947~48년 사이 제주도에는 미군이 최소 100명(중대규모)에서 최대 1000명(연대규모)까지 주둔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또 “당시 한국전 참전미군인 조셉 그로스만(Joseph W. Grossman)씨는 ‘1947년 봄에 6주 동안 20보병연대 제2대대의 500~1000명의 미군 병력이 제주도로 파견됐다’고 증언하고 있고, 당시 상황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며 “제주도에서 그의 부대는 이전에 일본군이 사용했던 목조로 된 1층 막사에서 머무르고 있었다고 했다”고 전했다.

실제 당시 미군의 ‘화재 등 사건 보고서(Reports of fires and other accidents)’ 등에는 미군정 장교의 부양가족 집이 화재로 파손되거나 군정 내 군부대 내의 매점(PX) 건물 파괴사건 등의 사례가 있어 그 진술의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다.

그러면서 보고서는 “미군의 개입 형태와 정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어 당시 제주도에 주둔했던 미군들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소상히 밝힐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현재까지 밝혀진 미군의 지휘책임과 함께 특별히 미군병력이 어느 정도의 규모로 제주도에 주둔했는지를 규명하는 것은 미국의 개입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또 다른 척도가 되는 만큼 반드시 이에 대한 명확하고 체계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문제 제기했다.

정민구 4.3특위 위원장은 “지난 달 파비앙 살비올리 UN 특별보고관이 제주4.3사건 해결을 위한 지원을 약속한 만큼 오는 6월 UN에서 개최되는 ‘UN 4.3 심포지엄’을 계기로 향후 미국을 비롯한 일본, 중국, 러시아에 있는 다양한 역사적 사료들에 대한 체계적인 자료 수집을 통해 4.3 당시 미군의 개입정도를 명확히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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