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섬 숨, 쉼] 진정 잘 사는 삶에 대하여

일요일 늦은 오후 오랜만에 친구들 모임에 갔다. “참석률이 저조해 나 잘릴 것 같아”라고 입방정을 떨곤 했는데 모두 환대해주니 부끄럽고 고맙다. 이미 20여년 이상 만난 사이라 허물없이 온갖 이야기들이 오가다, 한 친구의 말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생각해보난 작년이 직장 생활 30주년이라. 짧지는 않은 세월인데 그 동안 쉬지 않고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들을 생각해봤지. 친정 식구나 가족 빼고.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딱 한 사람 떠올랐어. 동서. 달랑 며느리가 둘인데 제사 등 집안일을 해야 할 때 난 일허노랜 허멍 늦게 갔주, 경해도 동서는 농담으로라도 싫은 소리 안 해. 그래서 30주년을 맞아 작은 선물을 마련해 올 설날에 동서에게 줬어. 이건 인사받기 위한 게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거야. 그렇게라도 해야 내 마음이 편해지니.” 

만약 음악회라면 기립박수가 나올 순간이었다. 모두가 대단하다며 친구를 칭찬할 때 당사자는 손사래를 치며 말한다.

“야 어떵허다보난 말 나와신디 어디강 이 말 곧지 말라, 정말 난 나를 위해 동서에게 준거.”

두 눈을 부릅뜨며 말 퍼뜨리지 말라는 친구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난 이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쓰면서 부끄러워하고 있다. 평소 입으로는 금강경에 따르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가 특히 중요하다며 걸림 없이 주마고 나불거려왔지만 내가 몇 번이나 실천했던가, 남에게 받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내가 준 것은 돌아오는 인사가 없을 때 입 삐죽이며 화 낼 때도 있었는데.

또 내가 친구에게 더욱 감탄한 것은 30주년 이벤트가 바로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것이었다. 허 참. 대단하다 대단해. 아주 오래전에 읽은 책 한권이 딱 떠오른다. 1993년 현암사에서 나온 전우익 선생님의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1993, 현암사)

뒤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기억력으로 책 내용을 떠올려보려 하지만 가물가물하다. 그래도 누군가 책 내용을 정리해 놓은 말미에 쓴 이말 정도는 기억하고 있다.

“혼자만 잘 살믄 별 재미 없니더. 뭐든 여럿이 노나 갖고, 모자란 곳을 두루 살피면서 채워 주는 것, 그게 재미난 삶 아니껴.” 

현명한 내 친구처럼 ‘나’를 정확히 인식하고 걸림 없이 주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전우익 선생님의 말처럼 모자란 곳을 두루 채워 주는 게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정말 살만한 세상이 될 것 같다.

지난 3일 김녕 바다. 봄 햇살 아래 빛나는 바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저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가까이 할 수 있다는 것도 참 감사한 일이다. 생활에서 감사할 일을 찾는 것을 시작으로 나도 걸림 없이 주는 지혜의 길을 가고 싶다. 제공=홍경희. ⓒ제주의소리
지난 3일 김녕 바다. 봄 햇살 아래 빛나는 바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저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가까이 할 수 있다는 것도 참 감사한 일이다. 생활에서 감사할 일을 찾는 것을 시작으로 나도 걸림 없이 주는 지혜의 길을 가고 싶다. 제공=홍경희. ⓒ제주의소리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고, 빨리 쫓아가지 않으면 뒤쳐질까봐 안달복달 하는 사이에 흉흉한 소식들이 넘쳐나고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지금 한 번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남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게 나를 위한 일이라는 생각들이 퍼졌으면 좋겠다. 이 생각들이 씨앗이 되어 여기저기서 잘 자라 꽃도 피고 열매도 맺었으면 좋겠다.

지난 주 강원도 산불을 진화하는 과정에서 영화처럼 전국의 소방차들이 강원도로 향하는 뉴스를 보았다. 이것이 바로 그 씨앗 아닌가. 민들레 홑씨 바람에 날리 듯 이 씨앗이 전국 방방곡곡에 펴져나가는 모습, 생각만 해도 좋다. / 홍경희 제주교재사 대표(http://jejubooks.com)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