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의 책읽기④] 김동선의 「야마토마치에서 만난 노인들」

현재 고령화율 20%를 바라보는 일본은 이미 고령화 사회의 전형이 됨으로써 막대한 비용을 노인복지에 쓰고 있는 나라이다. 고령 사회의 특징은 전기 고령자( 65-74세)에 비해 후기 고령자(75세 이상) 의 수가 크게 늘어나는 데 있는데 후기 고령자는 노화나 질병으로 인한 치매나 전신불수가 될 확률이 훨씬 높다. 일본 또한 세계 최고령 국가로서 고령화에 대처해 왔음에도 일본의 노인들은 길고 긴 노년의 시간을 생각할 때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야마토마치의 노인들은 말년을 자신이 살아온 집에서 살면서 가족 수발에 따른 감정적인 피폐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 그곳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있었던가? 저자는 우리나라도 최근의 경제성장에 따른 가족구조의 변화와 고령화의 문제가 일본과 다르지 않다는 데 주목하고 일본의 노인복지시스템을 연구하였고, 그의 발품을 따라 일본의 복지정책과 복지시스템을 둘러 본 결과 이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아이 하나를 기르면서 직장일과 공부와 육아에 지친 나는 우리 아들을 독자로 만들어 버렸고 여유가 생겨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구나 했을 때는 이미 내 나이가 마흔을 넘기고 있었다. 직장과 공부를 병행하며 생존경쟁의 대열에서 전투적이 된 젊은 엄마에게 아이는 굉장한 짐이 되기도 했었다. 비교적 건강하게 컸다고는 해도 아이를 양육하는 일은 다른 많은 일들에 우선해서 힘들었다. 그런데 대개 직장을 다니며, 거기다가 자신의 발전을 위해 또다른 모색을 하며 아이를 키우는 요즘의 젊은 엄마에게 양가 부모중 어느 부모라도 아프거나 해서 병수발이라는 자식된 도리를 요구한다면 어떠한 결정을 하여야 할까?

친구와 동료들이 조심스럽게 그들이 직면한 고단함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결혼한 친구들은 시댁식구와의 갈등을 가장 먼저 내 놓는다. 그들은 까다로운 시어머니의 병원 입원과 같은 일들이 자신의 생활을 무너뜨린다고 힘들어 하고, 노후에 대한 경제적인 염려 때문인지 자식들의 경제를 모른 척 하는 시부모의 마음을 이해 하기도 힘들어 한다. 사소한 가족의 갈등은 현재의 삶을 피곤하게 한다. 더구나 착한 며느리 역할을 하느라 자신의 공부 따위를 포기 했거나 하는 경우, 남편과의 관계가 소원한 경우에 시댁과의 골은 깊고 깊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들어 준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손바닥 뒤집듯 내 가족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사람 살아가는 세상의 아이러니다. 나에게 이야기 하는 친구가 내 올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내 가족에 대해서만은 이해와 관용이 넘치기를 바라는 건 내가 시누이의 입장만으로 내 부모의 상황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부모는 자식에게 끝까지 효도를 받을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딸인 나의 입장이지 냉정한 입장에서 우리부모와는 혈육지간이 아닌 올케의 생각은 아닌 것이다. 부모님이 노후하시고 보살핌을 받을 연세가 되면 며느리 보다는 딸이 낫겠지 싶어서 여동생에게 부모님은 우리가 모시기로 하자 약속을 했지만 그 약속은 막연한 미래의 일이다. 어떤 갈등이 이러한 효심을 갉아 먹을 지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아들이 아닌 사위는 어떠한 태도를 보일까. 모두 막연한 미래의 일이다. 그러나 곧 닥칠 일이며 주위의 사람들은 곧잘 아이의 양육보다는 부모의 부양을 힘들어 했다. 특히 노후는 어린 세대와 달리 병에 걸리는 확률이 높고 일단 병이 들면 병원의 처방에 따라 환자의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부모가 환자가 되었을 때 우리나라의 병원 시스템은 당연한 듯 가족의 시간을 요구한다. 요양을 요하는 부모를 모시는 가족에겐 가족간 갈등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자칫 '장병에 효자 없다'는 자조를 이끌어 냈다. 우리 부모님이 우리 자식들 때문에 쓸쓸히 노후를 보낼 수도 있다는 것은 생각도 하기 싫다. 그러나 남의 집 딸들도 아들들도 처음부터 그들의 부모를 잘 모시고 싶지 않아 하는 괘씸한 자식은 없었을 텐데….

   
이 책의 저자는 가족이 해체되고 핵가족화 돼 가면서 유목민화 해 가는 현대 산업 사회에서 노인 문제를 '효' 의 관념으로 해결하려 하는 것은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자식들은 부양이 필요한 부모를 시설에 맡길 수 없다. 사설 시설은 비용이 너무 비싸고 심리적으로 부모를 버렸다는 자책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병이 들고 노후한 노인 부모들 또한 자식들에게 계속적으로 짐이 되고 폐를 끼치고 있다는 생각으로 힘이 들 것이기 때문에 노인대책은 이제 사회가 나서서 풀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근간을 이루는 주장이다.

물론 사회적 시스템이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다. 야마토마치의 노인들도 복지의 혜택 속에 있으면서도 나름대로의 갈등을 안고 있다. 대개 젊었을 때 가족간에 유대가 깊지 못했던 사람들은 노인이 되어서 가족으로부터 방기되는 경우가 많았다. 서로 아끼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결과이다. 가족간 정서문제야 개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하더라도 부양해야 할 노인들이 가족의 생활을 담보하지도 않고 또 남에게 폐가 되지 않은 채 온화한 노후를 마련하도록 하는 것은 가족이 아니라 사회가 해결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마지못해 하는 보살핌을 받는 노인이 가장 큰 피해자이므로 누구라도 실천할 수 있는 '효'를 찾아야만 한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일본의 경우를 들어 우리가 당장 직면한 문제를 바라보았다는 데에 이 책은 공헌한다. 부모 자식간의 관계를 효도의 논리로만 보고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결국 노인들과 가족들 간의 감정의 피폐는 깊어지고 커다란 사회문제를 양산할 것이라는 진단은 서늘하지만 들어 둘만한 충고였다. 사회 전체가 납득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려면 가족과, 지역 공동체와 정부의 역할 분담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어떠한 제도든 우리들 또한 노인이 될 것이라는 자각 위에서 세워져야 한다. 사람과 사람간의 정서적 지원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지금 선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일에 정성을 다 해야 하지 않을까. 일본 야마토마치의 복지 시스템 구축이 의사 세 사람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는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들은 의사로서의 직분에 사명감을 가졌고 작은 사랑의 씨앗을 더불어 사는 세상을 위한 나무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가족을 넘어서서 사회로 흘러간 경우다. 어떤 문제가 문제로만 남는 것은 거기에 핵심이 빠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닥친 고령화 사회의 방향은 노인복지를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보는 관점이 아니라 미래의 시간에 우리들 자신이 어떻게 살고 싶으며 어떻게 대우 받고 싶은 지를 묻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일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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