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15주년 특집-생존수형인 4.3을 말하다] ⑤ 김두황 할아버지 4.3광풍 생사 넘나든 기구한 운명

1948년과 1949년 두 차례 군법회의를 통해 민간인들이 전국의 교도소로 끌려갔다. 수형인명부로 확인된 인원만 2530명에 이른다. 생존수형인 18명이 70년 만에 재심 청구에 나서면서 사실상 무죄에 해당하는 공소기각 판결이 내려졌다. 사법부가 군법회의의 부당성을 인정한 역사적 결정이었다. [제주의소리]는 창간 15주년을 맞아 아직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전국 각지에 거주하고 있는 생존수형인을 만나 당시 처참했던 4.3의 실상을 전한다. [편집자주]

서귀포시 성산읍 난산리 자택에서 만난 4.3생존수형인 김두황 할아버지. ⓒ제주의소리
서귀포시 성산읍 난산리 자택에서 만난 4.3생존수형인 김두황 할아버지. ⓒ제주의소리

"내가 너무나 억울해서 눈을 감지를 못하겠더라고. 죽을 고비 여러번 넘긴 것은 시대가 그랬으니 어쩔 수 없었다 이거야. 그런데 그 누명, 그게 내 후손에게까지 내려간 그 억울함은 지난 70년 동안 응어리로 그대로 남아있어"

구순을 훌쩍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을만큼 그의 기억은 매우 선명했다. 4.3발발 이후 7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며 사건 날짜와 시간, 장소 묘사, 주변인들의 이름까지 앉은 자리에서 줄줄이 써내려갔다. 얼마나 곱씹어왔던 것일까. 떠올렸다기보단 마치 기록해두었던 것을 하나씩 차근차근 꺼내어 확인시켜주는 듯했다. 잊어선 안되는 기억은 그대로 기록이다. 그의 울분이 기억을 각인시킨 셈이다.

서귀포시 성산읍 난산리 자택에서 만난 김두황 할아버지(92)는 1948년 10월 불법 재판에 의해 내란이라는 죄목이 씌워져 목포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한 4.3생존수형인이다. 

어릴적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함께 생활해 온 김 할아버지. 가난한 소작농인 아버지의 일을 도우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웃마을의 간이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는 등 고향에서도 수재로 꼽힌 유년시절을 지냈다.

평화롭던 마을은 4.3의 광풍이 몰아치면서 순식간에 쑥대밭이 됐다. 1948년 10월, 느닷없이 들이닥친 경찰은 마을의 농부 열 사람을 잡아다가 그중 7명을 바닷가에서 총살했다. 

서귀포시 성산읍 난산리 자택에서 만난 4.3생존수형인 김두황 할아버지. ⓒ제주의소리
서귀포시 성산읍 난산리 자택에서 만난 4.3생존수형인 김두황 할아버지. ⓒ제주의소리
서귀포시 성산읍 난산리 자택에서 만난 4.3생존수형인 김두황 할아버지가 눈을 감고 회상에 잠겼다. ⓒ제주의소리
서귀포시 성산읍 난산리 자택에서 만난 4.3생존수형인 김두황 할아버지가 눈을 감고 회상에 잠겼다. ⓒ제주의소리

"아무 이유 없이 농사하는 사람들 잡아다가 죽이니까 난리가 난거지. 공포에 놀라서 산으로 도망친 사람, 마을 외곽에 숨는 사람. 전부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만 했던 것 같아. 나는 집 뒤뜰에 굴을 파서 숨어 겨우 살아남았어"

경찰은 난산리 주민들을 해안마을로 분산시키는 '소개령'을 내렸지만, 당시 성산면장과 난산리장이 경찰을 찾아가 '철통같은 보초를 서서 근무할테니까 난산리 사람들은 분산시키지 말아달라'고 통사정하면서 더 큰 화를 면했다는 것이 김 할아버지의 증언이다. 경찰은 민보단(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지역별 경찰 하부·지원 조직) 창설을 명했고, 글을 잘 쓰고 애향심이 강했던 김 할아버지는 민보단 서무계 일을 맡았다.

이는 4.3으로 굴곡진 70년 세월의 전조에 불과했다. 성곽을 지키던 민보단원을 비롯한 의용대원들이 하루 아침에 경찰에 체포됐다. 단원 뿐만 아니라 단장까지 영문도 모른 채 모조리 잡혀 들어갔다.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해. 정OO. 그이는 국민학교(초등학교) 급사하던 사람이었어. 이 사람이 성 바깥에서 살다가 경찰에 잡히니까 지독한 고문을 당했지. 성 밖에 있었으니 '폭도 아니면 빨갱이다'라는 이유였지. 그러고는 고문에 못이겨 마을사람 중 아는 이름은 다 대버린거라."

황당하기 그지없는 모함으로 잡힌 김 할아버지에게도 모진 고문이 가해졌다. 그의 나이 20세였다.

4.3생존수형인 김두황 할아버지가 젋었을 적의 사진을 손에 쥐고 있다.  ⓒ제주의소리
4.3생존수형인 김두황 할아버지가 젋었을 적 사진을 손에 쥐고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불 떼는 장작개비로 온 몸을, 어디 안 맞은 곳이 없었어. 기절하니까 순경들이 바가지로 물을 떠다가 부으면서 깨워서 다시 때리고. 난 정말 한 것이 없으니까 '할 말이 없다'고 했지. '남로당 가입했냐' 물으니 안했다고 하면 맞고, 기절하고...나중에는 바깥으로 끌어다가 죽이겠다고 총을 목에 겨냥하더라고. '죽어도 좋으니까 나는 정말 할 말 없다'고 했지."

그렇게 매일 고문을 당하다 제주시로 끌려갔고 15일만에 판사 앞에 섰다. 그러나 공소사실을 주고받는 것도 없이 그대로 재판에 들어가 '징역 1년형'이 내려졌다. 

이렇게 씌워진 올무는 그의 청년기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공교롭게도 그가 복역중이었던 1949년 9월 목포형무소 탈옥사건이 발생했다. 1500여명의 제소자 중 400여명이 탈옥, 이중 약 300명이 사살된 것으로 기록된 이 현장에서 김 할아버지는 목공소 제재기 밑에 숨어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이듬해 2월 만기 출소해 고향으로 내려 온 김 할아버지. 몸은 쇠약해졌지만 아버지의 극진한 간호로 힘을 차리던 찰나,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김 할아버지는 '폭도' 낙인으로 또다시 예비검속에 끌려갔다.

다른 지역의 예비검속자들은 모두 계엄군에 의해 총살을 당했지만, 김 할아버지는 '한국판 쉰들러'로 불리는 문형순 전 성산포경찰서장의 관할에 있어 살아남았다. (문형순 서장은 당시 예비검속 총살 명령에 '부당(不當)하므로 불이행(不履行)'이라고 맞서 무고한 대량학살을 막았다. 이 같은 공로로 2018년에는 '올해의 경찰영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죽을 고비만 세 차례. 김 할아버지는 극한의 역사적 현장에서 살아남은 자신이 '운이 좋다'고 말했지만, 애초에 터무니없는 누명이 씌워지지 않았다면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할 이유도 없었을 일이었다.

서귀포시 성산읍 난산리에서 만난 4.3생존수형인 김두황 할아버지가 옛 기록들을 살피고 있다. ⓒ제주의소리
서귀포시 성산읍 난산리에서 만난 4.3생존수형인 김두황 할아버지가 옛 기록들을 살피고 있다. ⓒ제주의소리

목숨은 건졌지만 언제 또 잡혀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김 할아버지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군에 입대했다. 군에서도 김 할아버지의 뒤에는 내내 방첩대(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의 활동 감시 업무를 담당한 군사기구)가 따라다녔다. 같은 군번의 동기들은 모두 진급됐는데도 매번 진급에서 탈락됐고, 의가사 제대 신청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설움의 연속이었다.

마을로 돌아와서는 뭐든 지역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해 육성회장, 기성회장, 개발위원 등 누구보다 앞장서 도맡았다. 지나고 보니 '빨갱이' 꼬리표를 떼기 위한 몸부림 혹은 안간힘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내가 전과자라고 차별을 한다는게 너무 창피스러웠지. 아무리 내가 선두에 나서서 도로 포장하고, 수도관 연결한들 뭐 하겠어. 4.3때 (남로당 무장대 활동 지역인) 산에 갔다 온 사람들도 평범하게 잘 살고 있는데... 산에 가지도 않았고 마을을 지키고 있던 나는 이유도 없이 죄인이 된 거잖아. 왜 내가... "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억울함이 자손들에게까지 되물림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고 했다. 연좌제였다. 명문대 법대 출신인 아들은 취업 당시 서류상의 '빨간줄'에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고, 제주를 오고갈 때마다 경찰서를 드나들어야 했다. 이 '연좌제'가 아무 죄없는 손주에게까지 내려가는 것은 아닐지 전전긍긍했다는 그의 말은 먹먹했다.

최근 4.3희생자로 지정된 김 할아버지는 이제 4.3수형희생자 불법 재판 재심청구 소송에 나선다. 지난 1월 17일 이뤄진 법원의 판결에서 김 할아버지와 같은 불법 재판의 위법성이 인정돼 그 역시 재심을 결심하게 됐다. 4.3 당시 군사재판을 받았던 다른 생존수형인과는 달리 김 할아버지의 경우 일반재판을 받았다는 차이는 있지만 법리적 쟁점은 같다.

"70년간 가슴에 응어리가 아직도 내 가슴에 풀어지지가 않았어. 제일 억울한건 내 후손들에게까지 그 낙인이 내려가는 거야. 법정에 나가면 그것부터 회복 시켜달라고 꼭 얘기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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