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적 인간] 22. 빌어먹을 세상 따위 (The End of the F***ing World, 2017)

드라마 ‘빌어먹을 세상 따위’의 한 장면(자료-넷플릭스)
드라마 ‘빌어먹을 세상 따위’의 한 장면(자료-넷플릭스)

넷플릭스가 없던 시절에는 동네에 있던 비디오 가게가 넷플릭스였다. 화신비디오. 내가 주로 빌려보는 영화를 꿰차고 있던 그 비디오 가게 아주머니는 내게 맞는 영화를 골라주곤 했다. ‘델리카트슨 사람들’을 반납할 때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를 알려줘 장 피에르 주네의 세계에 빠질 수 있었다. 같은 감독의 영화뿐만이 아니었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플라이’가 좋았다고 말하자, 그녀의 안내를 받고 ‘내추럴 본 킬러’, ‘더치맨’, ‘파고’를 보게 됐다.

그리고 ‘키노’라는 영화 잡지가 있었다. 나중에 ‘씨네21’이 있긴 했지만 영화에 대한 이해와 미지의 세계에 있는 영화를 접하게 한 것은 순전히 ‘키노’ 덕분이었다. 음악은 ‘핫뮤직’, 영화는 ‘키노’가 네트워크를 형성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영화나 음악 리뷰를 읽으며 문장을 익혔다. 친구 집에 가서 카펫 위에 키노를 펼쳐놓고 영화 이야기를 했다. 

‘내일을 향해 쏴라(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 1969)’는 우리 마음의 고전이 돼 세상을 향해 인상 찌푸리게 만들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지나 ‘크래쉬’, ‘엑시스텐즈’를 지나 ‘초록 물고기’, ‘파이란’을 거쳐 ‘폭력의 역사’로 정점을 찍었다. 그리고 잠시 좀비 영화에 빠져있던 나를 구원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좀비 영화의 고전 ‘고무 인간의 최후’였다. 그 사이 ‘키노’도 ‘핫뮤직’도 폐간됐다. 하지만 나의 영화 세계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복수는 나의 것’, ‘똥파리’, ‘무뢰한’-‘킬리만자로’에 이어 14년만에 돌아온 오승욱 감독의 느와르인 이 영화는 상처의 사막화를 보여주는 하드보일드 수작이다.-등을 거쳐 ‘버닝’까지 왔다. 

그리고 이젠 식물인간처럼 침대에 누운 채 ‘빌어먹을 세상 따위 (The End of the F***ing World, 2017)’를 본다. 화신비디오 가게의 주인 아주머니나 ‘키노’가 없어도 내가 본 영화를 빅데이터로 알아내 내게 영화나 드라마를 보여준다. 빌어먹을 세상 따위 참 좋아졌다. 내가 다음에 어떤 영화를 클릭할 것인지 넷플릭스는 이미 알고 있다. 재미없는 아재 개그나 날리는 아버지에게 펀치를 날리고 가출하는 제임스는 점점 아버지의 소음을 이해하게 된다. 나 역시 아버지로부터 생겨난 연관검색어이기에 아버지의 고독을 연민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 끝장에 섰다고 두려하지 말자. 사실 이 세상은 다 연결돼 있다. 1970년대 팝송이 BGM으로 깔리는 들판에 서 있으면 또 어떤가. 클릭이 역사가 된다. 망설일 필요 없다. 청춘은 끝나지만 시즌 2가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아무리 인생 다 산 듯 한 대사를 쳐도 졸귀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현택훈
고등학생 때 비디오를 빌려보며 결석을 자주 했다.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해 처음 쓴 소설 제목이 ‘중경삼림의 밤’이었다. 조조나 심야로 영화 보는 걸 좋아한다. 영화를 소재로 한 시를 몇 편 썼으나 영화 보는 것보다 흥미롭지 않아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한때 좀비 영화에 빠져 지내다 지금은 새 삶을 살고 있다. 지금까지 낸 시집으로 《지구 레코드》, 《남방큰돌고래》,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가 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