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116. 무지개 서면 날씨 갠다

* 상고지 : 무지개
* 사민 : 서면 
* 들른다 : (날씨가)갠다
 
시계가 없던 옛 시절에도 시간을 헤아렸다. 잠자다 일어나 졸린 눈 비비며 뒷손지고 서서 하늘의 별자리 이동을 보고 날이 샐 때가 멀지 않았음을 짚어냈다. 북극성이나 북두칠성이 앉은 자리가 흐는 걸 보아 어림짐작했던 것이다. 어림짐작이라 하고 있지만 거의 틀림이 없었다.

날씨를 예측하는 것도 못지않았다. 달이 갓을 써 달무리지면 비가 올 징조라 했다. 한라산이 동네 앞으로 성큼 다가앉으면 우친다고(비 날씨) 짐작했다. 놀라운 예지력이고 통찰력이다. 오랜 세월 살면서 얻어낸 경험법칙이다.
  
비가 멎은 뒤 햇빛이 비칠 때 하늘가에 두 다리 딛고 선 휘황찬란한 게 일곱 빛깔 무지개. 무지개가 섰다는 건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치는 물리적 자연 현상이다. 일단 날씨가 좋아진 것이다. 일기 예보를 들을 수 없던 옛날에는 이런 시각적인 경험의 축적으로 날씨를 점치는 수밖에 없었다. 뼈가 마구 쑤신다거나 몸살기가 심한 것으로도 지레 짐작했다. 그럴 때는 몸이 기상대 구실을 했는데, 거의 적중이었다. 그렇게 알아맞히면서 농사를 짓는 데 큰 지장을 받지 않았다. 여간 지혜롭지 않았다.

그러니까, ‘상고지 사민~’은 예로부터 기상을 예측할 때 쓰던 말이다.

제주지역에는 이렇게 경험칙에 의해 날씨를 예측해 온 속담들이 많다. 농사에 매어 살았던 농경시대인 만큼 날씨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농사는 하늘이 짓는다 한 말이 나왔다. 유사한 속담들이 조금씩 다른 현상을 겪으면서 관찰해 온 것들이라 자못 흥미롭다. 아마 다른 어느 지방에선 이런 속담은 별로 찾아보지 못할 것이다. 울릉도엔 독특한 풍습이나 전통이 없는데, 이 점에서도 제주도는 육지와 전혀 다른 문화를 형성해 온 것을 실감하게 된다. 민요, 무속, 제의(祭儀), 장묘, 밭담, 올레…. 오늘에 이르러 각광을 받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사한 것들 몇을 꺼내 본다.

하나. 구명 나민 마 갇나 (구명 나면 장마 멎는다) 
장마철이면 지하에 스며들었던 물이 수맥을 따라 솟구쳐 마구 쏟아져 나온다. 이를 ‘구명낫다, 구명이 터졌다’고 한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면 오래 끌던 장마가 그치게 된다고 내다본 것이다. 극에 달하면 끝이 보이는 법인가 보다.

둘. 금감곳 피민 마 갇나 (금귤꽃이 피면 장마가 걷힌다) 
금귤(낑깡)꽃은 음력으로 6월말에서 7월초에 핀다. 여름 장마는 대개 5월 중순을 넘어서 6월에 집중되면서 7월로 접어들면 한풀 꺾이게 돼 있다. 이때가 금귤꽃이 피는 시기와 맞물리는 데서 나온 말이다. 농가에서는 이렇게 식물이 꽃 피는 현상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날씨와 연계해 내다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기상관계를 도출해 낸 지혜가 돋보인다 하겠다.

셋. 멩마구리 울민 마 갇나 (맹꽁이가 울면 장마가 걷힌다) 
맹꽁이는 장마철에 목이 터져라 울어댄다. 요즘 녀석들 울음소리를 듣기 힘들다. 밤낮 요란하게 울던 놈들인데, 아마 난개발로 삶의 터전을 잃어 깊이 숨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맹꽁이가 우는 때가 따로 있어 흥밋거리였다. 장대비가 쏟아질 때는 울지 않다가 빗줄기가 소강상태거나 아주 끊겼을 때 소리를 일제히 터트린다. 한꺼번에 세상이 떠나갈 듯 울어 제친다. 큰비에 숨죽였던 맹꽁이들이 곳곳에서 한꺼번에 천지가 진동할 정도로 울면, ‘아, 이제 마가 그치겠구나.’ 했다는 말이다.

넷. 한락산에 번구름 내치민 마 갇나 (한라산에 뭉게구름 내치면 장마 걷힌다)
 
하운기봉(夏雲起峰. 춘향전)이라 했다. 여름철 산봉우리에 하얀 구름이 인다 함이다. 그냥 봉우리가 아닌, 한라산이다. 큰 바람을 막아 주는 등 제주도의 기후에 막중한 영향을 끼치는 산이 아닌가. 한라산에 뭉게구름이 일기 시작할 양이면 장마가 서서히 걷힐 것으로 지레짐작했다는 말이다. 보름 혹은 스무 날을 두고 계속되던 지루한 장마가 그치고 날 들를(날이 좋을) 조짐이니 얼마나 반가웠을 것인가. 더욱이 내다본 일기가 딱히 들어맞을 때는 기분이 좀 좋지 않았으리라. 

‘상고지 사민 날 들른다’
일기예보가 엉망이라고 비난이 쏟아지는 세상이다. 과학적인 모든 기술과 수단을 동원해 치밀하게 예측하는데도 때로 엉뚱하게 가 버리니, 너무 힐책할 일은 아니다. 어긋나기도 하는 거라 ‘예보’ 아닌가. 확실한 것이면 ‘확보’ 아닌가. 기상관측에 종사하는 사람들 덕분에 일기에 따라 활동하는 편리함에 감사하는 마음도 가져야 한다. 옛날 무지개 서는 걸 보거나, 땅에서 물 솟는 것, 귤꽃 피는 것, 맹꽁이 울고, 한라산 봉우리에 뭉게구름 피어나는 것을 보고 일기를 예측하던 시대에도 사람이 살았지 않은가. 긍정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일기를 꿰뚫어 보던 선인들 지혜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요즘 정치판이 우리 선인들의 선경지명을 본받으면 좋으련만. 갈 길이 왁왁한 데가 한국의 정치판이다. 옛 어른들에게서 한 수 배워야 할 게 아닌가.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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