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31) 주디스 슈클라, 《일상의 악덕》, 사공일역, 나남, 2011.

주디스 슈클라, 《일상의 악덕》, 사공일역, 나남, 2011. 출처=알라딘.
주디스 슈클라, 《일상의 악덕》, 사공일역, 나남, 2011. 출처=알라딘.

인간혐오의 시대

도처에서 자신과 다른 입장의 사람들을 마치 인간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인 양 폄하하는 표현들이 난무한다. 자신과 종교적인 신념이나 관습이 다르다는 이유에서, 정치적인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에서, 성적인 특성이나 취향이 다르다는 이유에서, 사는 지역이나 출신지역이 다르다는 이유에서,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입장의 사람들에게 잔인한 말들을 쏟아낸다. 그리고 점점 모두가 인간이란 원래 혐오스러운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다.

인류의 역사에서 도덕적 진보란 아마도 물리적이거나 정신적인 폭력을 감소시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노예를 자유롭게 하고, 여성을 동등한 인간으로 인정하며, 경제적인 약자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쪽으로 나아감으로써 인류는 도덕적으로 진보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종교적인 교리와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종교와 정치는 인간적인 고통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종교와 정치는 거대담론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구원, 정의, 진리, 자유, 평등 등등의 거대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인류의 역사에서 벌어진 다양한 전쟁 과정에서 우리는 이미 인간이 대의를 위해서 얼마나 잔인한 행동을 할 수 있는지 목도했다. 이 과정에서는 잔인한 행위를 자행하는 가해자와 그런 잔인성에 의해 고통 받는 희생자가 발생한다. 이 땅에서 도덕적인 진보가 완성되지 않는 한 그런 가해자와 피해자는 계속해서 발생할 것이다. 인간적인 고통을 없애기 위한 인간의 행위가 오히려 인간적인 고통을 낳는 아이러니가 생기는 셈이다.

종교적인 믿음을 위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사회적인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개인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장려할 만한 일인가? 이것은 매우 미묘한 문제이다. 희생자의 용기는 분명히 도덕적인 진보를 가져오지만 고통의 악순환을 불러올 수도 있다.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희생자의 용기를 요구하는 일은 그 자체로서 잔인하다. 가해자의 비겁과 잔인성을 목격하게 되면 우리는 인간 자체에 대한 혐오에 휩싸이게 된다. 인간의 잔인한 폭력성 앞에서 인간이 여전히 도덕적으로 저열한 상태에 있음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혐오의 감정은 세상을 더 나은 쪽으로 바꾸고자 하는 의도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거대한 구원이나 선을 실현하고자하는 인간의 행동이 잔인성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스스로의 가치 체계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큰 것만 염두에 둔 나머지 작은 것을 간과한 것은 아닌지. 그리고 우리가 간과한 그 작은 것이 사실은 우리가 더 인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잔인성에 대한 자유주의자의 태도

오정희의 <새>라는 소설은 우리가 간과한 그 작은 것을 매우 섬세한 정서로 담아낸 소설이다. 작가는 언젠가 자신이 경험했던 ‘상담 어머니’의 역할이 잔인성에 의해 희생당한 피해자를 더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아닌가 하는 괴로움 때문에 이 소설을 썼다고 말한다. 소위 결손 가정의 불쌍한 어린이를 돌보는 선한 역할 속에 그 어린이를 고통에 빠뜨리는 악의 요소가 없는지 성찰한 것이다.

주디스 슈클라의 《일상의 악덕》은 오정희씨가 성찰한 그 사소한 악에 대해 주목할 것을 요구하는 책이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인간적인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자유민주주의가 약속한 ‘자유’나 ‘평등’과 같은 거대한 개념이 온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도 있겠으나, 우리가 극복하지 못한 사소한 성격적 결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슈클라는 우리를 고통에 빠뜨리는 일상적인 악에 대해 주목함으로써 도덕적인 진보를 위한 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암시한다. 슈클라가 거론하는 일상적인 악의 목록은 잔혹성, 위선, 속물근성, 배신, 인간혐오 등이다.

이 가운데 슈클라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잔혹성’이다. 슈클라가 말하는 잔혹성이란 “고뇌와 두려움을 주기 위해 몹시 약한 존재에 신체적인 고통을 가하는 의도적인 괴롭힘”(27쪽)이다. 그가 이 개념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우리가 인간에게 가해지는 물리적이거나 정신적인 고통을 감소시킴으로써 도덕적인 진보를 이루고자 할 때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지를 가장 명확하게 가리킬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이 잔혹성이 행해지는 장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슈클라는 이런 입장을 ‘두려움에서의 자유주의’(liberalism of fear)라고 불렀다.(22쪽) 이 개념은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에게 영향을 주어 새로운 유형의 자유주의 개념을 낳았다. 자유주의는 여러 가지 이론적인 토대위에서 다양하게 분화되어 왔지만, 그것이 ‘이론적’ 토대 위에서 주장되는 한, 즉 자유주의 이론이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한, 그 과정에서 발생할지도 모를 고통의 문제를 간과할 위험이 있다. ‘잔혹성’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슈클라와 로티의 자유주의는 이론적 토대를 포기하는 대신 잔혹성을 없애는 것이야말로 자유주의자의 일차적인 실천적 과제라고 상정함으로써 그런 위험을 피하고자 하는 자유주의이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타자의 삶에서 고통을 제거하는 일이 어떤 이론적 근거에서 합당하며 마땅히 추구해야 할 일인지를 논증하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잔인성이 행해지는 장소에서 희생자의 고통을 느낌으로써 그런 잔인성이 중단되도록 할 방안을 모색하게끔 한다. 슈클라는 거대한 신념을 토대로 세상을 바로 잡으려고 의도했던 사람들에 의해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희생자의 고통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그런 고통을 중단시키고자 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세상은 본질적으로 바뀐다고 말한다.

“잔혹성이 우선시 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잔혹성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에 영국과 미국의 수많은 제도들이 변경됐다. 그 시대의 찬미자인 다이시가 우리에게 일깨우듯이, 남부의 노예제도를 폐지하도록 했던 것은 독립 선언문에 명시된 박탈할 수 없는 권리가 아니라 노예들의 고생에 대한 새로운 의식이었다.”(69쪽, 번역은 가독성을 위해 수정했음)

잔혹성은 때로는 도덕의 외양을 입고 행해지기도 한다. 슈클라는 호손의 <주홍글씨>의 주인공들이 도덕적 잔혹성의 희생자들이라고 해석한다. 딤즈데일 목사는 자기증오와 죄의식으로 스스로를 학대하다가 자살한다. 슈클라는 이와 같은 자기학대와 같은 잔혹성은 오로지 완전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그런 완전함을 강요하는 것은 기독교의 교리였다고 보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완전하지 않다. 잔혹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자유주의자는 인간적인 불완전성을 긍정함으로써 인간의 죄의식, 양심 등이 가하는 잔혹성을 피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맥락에서 슈클라는 칸트의 ‘정언명법’ 역시 잔혹한 것이며,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극형을 내리는 재판관”(78쪽)이라고 평한다.

인간에 대한 혐오를 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잔인한 행위를 자행함으로써 타자를 고통에 빠뜨리는 악순환을 중단하기 위해서 우리는 거대한 이념에서 눈을 돌려 눈앞에서 행해지는 잔인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슈클라의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일상적인 차원에서 벌어지는 악덕들에 대한 고민이 없이 현실적인 고통을 우회할 길은 없다. 이 책은 삶의 고통과 대결하기 위해서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을 들여다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일깨운다.

▷ 이유선 교수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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