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광의 제주 산책] 3. 은하수 품은 한라산 언저리, 꽃 피고 지는 5월

새로운 인연은 두려움과 기대감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올봄 제주에 터를 잡은 본산 정은광 교무(원불교 서귀포교당) 역시 마찬가지다. 원불교 신앙을 바탕으로 철학, 미술, 미학에 조예가 깊은 정은광 교무가 20일 간격으로 [제주의소리]에 ‘제주 산책’을 연재한다. 신실한 신앙심과 따뜻한 시선으로 섬 곳곳을 누비면서 풀어낼 글과 그림을 함께 소개한다. [편집자 주]

고려시대 13세기 문화사에 지평을 열었던 이규보(1168-1241)는 이런 절묘한 시를 선사했다. 

산속스님 달빛이 탐이 나서 山僧貪月光
물 병속에 함께 길어 담았네. 甁汲一壺中
절에 돌아와 뒤미처 생각하니 到寺方應覺
병을 기울이니 달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네. 甁傾月亦空

이 시는 이미 20년 전 열반한 법정스님의 애송시다.

내용은 결국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논리를 시화했다.

세상의 삶은 가만히 보면 환상이요, 꿈이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 마당에 나가보면 종려나무가 밤새 바람 속에 펄럭였던 치마폭 같은 이파리를 거두고 아무 일 없듯 서있으며, 왕벚꽃 진 자리에 이름 모를 새들이 새벽을 노래한다. 

이처럼 나의 삶은 내가 머무는 공간에 평안(平安)이 우선이고 그 다음은 세상의 행복이다. 내가 존재하기에 세상의 모든 것이 존재하며 나는 이 세상을 잠시 빌려 쓰고 머물다 가는 '렌탈 인생'이며 '렌탈 에너지'의 산물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아무리 길어도 과일가게 바나나처럼 유통기한이 있다. 땅을 많이 갖고 부자 소리를 들어도 유통 기한이 한정된 나를 어쩌지 못하고 자연 속에 살다 봄날 바람에 꽃 떨어지듯 또는 이른 아침 피었다 지는 나팔꽃의 이슬처럼 그렇게 머물다 간다. 

부처님이 우리에게 무상(無常)의 소식을 준 것은 인간에게는 철들게 하는 선물이기도 하다. 

인간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빌려 태어났으며 자연을 빌려 세월 속에 거닐다가 무상의 별을 헤이며 세월의 그림자를 따라 잠시 세상에 시인이 되었다가 어느 날 밤하늘 별빛으로 사라진다. 

정직하게 말하면 그게 인생이다. 

서귀포 문화원에 인사차 들렀다가 차담(茶談)을 나누고 《제주문화상징》 책을 가슴에 안고와 며칠이고 글줄을 그으며 지냈다. 

아, 한라산(漢拏山).

제주 사람들이 마음속에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우러러 보는 산이 바로 그 산이며 이 산을 통해 생명수를 얻고 산에 달이 뜨면 맑고 고요한 신앙이 되었다. 

바다도 함께 어우러져 춤을 추듯 사람들을 모아 일깨우고 봄이면 보리 내음, 여름이면 칡꽃을 보며 가을이면 조랑말 살찌우는 산록, 그리고 겨울이면 올레길에서 조심조심 걸어 이웃 괸당(친척)들의 안부를 묻고 빙떡을 나눠먹던 그 옛날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아름답기만 하다.​

368개의 높고 낮은 오름의 모성도 한라산이요, 바람 불고 비 오는 날, 자연 앞에 겸손하라고 전해주는 산도 한라산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종려나무가 바람에 나부끼는 날의 밤하늘, 은하수의 별빛을 모아 바라보는 서귀포 보목리의 해변가 산책이다. 한라산은 은하수(銀漢)를 잡아당기는 높은 산이란 뜻이다.​

정은광의 작품 '해질녘 수채화' 제공=정은광. ⓒ제주의소리
정은광의 작품 '해질녘 수채화' 제공=정은광. ⓒ제주의소리

예전에 김수환 추기경의 어록에 어느 날 나이 드신 할머니 신도가 추기경에게 찾아와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신부님 제가 죽으면 어디로 가나요?”

침묵하던 그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아름다운 작은 별 아시죠. 아마 선종하시면 은하수의 별이 되실 것입니다. ​그러니 이 땅에 집착과 걱정을 내려놓으시고 편히 하늘나라로 떠나세요. 제가 책임지고 안내를 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한라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 은하수 별빛을 끌어당기며 사색을 즐겼던 이 땅 사람들의 삶도 이와 같으리라. 

꽃 피고 지는 5월, 정산종사(鼎山宗師)님은 법문에 “일념(一念)이 청정(淸淨)하면 그가 바로 부처요, 그 일념을 내려놓으면 그 자리가 극락”이라 말씀하셨다.

모두가 거룩한 5월이 되시길 소망한다.

# 정은광은?

정은광 교무는 원광대학교에서 원불교학을 전공하고 미술과 미학(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원불교 사적관리위원과 원광대학교 박물관에서 학예사로 근무하며 중앙일보, 중앙sunday에 ‘삶과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다년간 우리 삶의 이야기 칼럼을 집필했다. 저서로 ‘그대가 오는 풍경’ 등이 있다. 현재 원불교 서귀포교당 교무로 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