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희의 예술문화이야기] 40. 구스타프 클림프, 자본과 함께 제주 벙커 상륙 

1900년경 비엔나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이상의 문화적 의미를 갖는다. 여전히 합스부르그 왕가의 통치 유산이 남아있는 보수적인 도시이기는 했으나, 근대의 물결은 런던, 파리를 거쳐 유럽의 주요 도시로 확산되고 있었고 비엔나를 비켜가지 않았다. 과거 귀족 문화와 카톨릭 교회 전통이 강한 이 도시에도 사람들이 모여들며 인구가 늘기 시작했고 도시화라는 변화를 포용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중반 파리가 근대 문화를 꽃피우며 문화적 도약을 먼저 시도했다면 비엔나에는 조금 늦은 19세기 말부터 나타났는데 비엔나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심리학, 미술사, 음악, 문학, 건축, 회화 등의 분야에서 과거와 다른 변화를 모색하며 나름대로 시대정신을 공유하고 있었다. 파리처럼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고, 카페와 살롱 문화가 활발하게 확산되었으며 비트겐스타인, 프로이드와 같은 유명 지식인과 부유한 사업가, 그리고 일군의 예술가들이 어울리며 새로운 세기에 대한 기대감을 품기 시작했다.

‘비엔나 모더니즘’ 또는 ‘세기말 비엔나’라고 부르는 이 시기에 활동한 작가 중에는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도 있었다. 그는 1897년 기존의 예술단체에서 나와 전통과 단절하고 새로운 예술과 건축을 모색한 동료들과 함께 ‘비엔나 분리파(Wiener Secession)’라고 불리는 단체를 만들어 예술작품부터 책 디자인, 가구 디자인까지 아우르며 근대적 정신과 국제주의를 지향하며 낡은 예술관습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들이 만든 ‘유겐스틸(Jugendstil)’은 당시 유럽에 유행하던 아르 누보 양식을 비엔나식으로 토착화시킨 것이다. 

클림트를 중심으로 모인 작가들은 새로운 건물을 지어 구습과 전통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표현했다. 이 건물의 정면에 “모든 시대에 그 시대의 예술을, 모든 예술에 예술의 자유를”이라는 그들의 의지를 글자로 새기고 전시공간으로 사용하며 유럽 모더니즘 미술의 한 장을 기록했다. 이 건물이 바로 ’분리파 건물‘이다. 지금도 비엔나에 가면 황금색 구가 위에 얹어져 있는 이 건물을 볼 수 있다. 

비엔나 분리파의 건물 '1898', 출처= www.vienna-unwrapped.comvienna-secession.
비엔나 분리파의 건물, 출처= www.vienna-unwrapped.comvienna-secession.

클림트는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벽화나 건물장식을 그리며 승승장구했고, 황금색을 사용한 그림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오래전 비잔틴 제국의 미술에서 보이는 황금색을 벽화와 그림에 활용하면서 유명세를 탔는데 급기야 부유층의 초상화를 그릴 때에도 사용하게 된다. 이른바 그의 ‘황금시기’였다. 

이 시기에 그린 그림들 중에서 <키스>(1907-8)는 남녀가 열정적인 자세로 서로 포옹한 그림이다. 추상화된 패턴이 황금색 배경에 펼쳐지며 고전과 현대를 낭만적인 주제 속에서 융합시키며 이런 남녀의 접촉이 일반적이지 않던 한국인들에게 큰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비엔나에서 성공한 유대인 사업가의 아내였던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도 이 ‘황금시기’에 제작되었다.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과 손은 사실적으로 묘사된 반면에 나머지는 황금색 문양과 패턴으로 단순화되어 장식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후에 나치가 이 유대인 가족을 끌고 가면서 그림도 함께 사라졌으나 종전 후 한 미술관에 걸려있던 것을 유가족이 오랜 소송 끝에 이기고 돌려받은 바 있다. 지금은 뉴욕의 한 미술관에 걸려있다. 이 그림을 찾는 유가족 이야기는 영화 <우먼 인 골드(Woman in Gold)>(2015)에 담겨있다. 

백 년 전 비엔나의 ‘황금기’를 보여주는 클림트의 예술 작품이 제주에 왔다. 비엔나의 정신을 담은 원작도 아니고, 위에서 설명한 ‘세기말 비엔나’라는 맥락을 굳이 알 필요도 없다.   고해상 이미지로 만든 클림트의 작품들을 10미터에 달하는 벽면에 고화질 프로젝터로 투사한 것들로 제주시 성산읍 고성리에 작년 가을 문을 연 ‘빛의 벙커’에서 볼 수 있다. 한때 국가 통신 시설 기지였던 어두운 벙커에 온 클림트는 우리에게 익숙한 예술 관람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그림들이 확대되고 편집되는가 하면 애니메이션이 가미되어 원작과는 완전히 다른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정적인 그의 회화는 웅장한 음악이 배경으로 깔리고 테크놀로지의 도움으로 ‘몰입 예술(immersive art)’라는 새로운 장르로 태어난다. 

빛의 벙커에서 보는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초상' 제공=양은희. ⓒ제주의소리
빛의 벙커에서 보는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초상' 제공=양은희. ⓒ제주의소리

‘빛의 벙커’는 1990년 프랑스에서 브루노 모니에(Bruno Monnier)가 설립한 컬쳐스페이스(Culturespaces)사가 개발한 아미엑스(Amiex, Art & Music Immersive Experience) 기술의 정점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컬쳐스페이스사는 2012년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역에 있는 폐쇄된 채석장에 고갱, 고흐 등의 예술을 아미엑스 기술로 선보이며 많은 관람객의 호응을 이끈 바 있다. 이 회사의 두 번째 프로젝트는 파리의 ‘아틀리에 데 루미에르’인데 여기서 선보인 작업이 바로 제주의 ‘빛의 벙커’에서 선보이고 있다. 파리에서 선보인 클림트 체험은 1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고 한국의 한 회사와 협업으로 진행한 제주의 ‘빛의 벙커’도 수십만 명이 방문하여 줄을 서지 않으면 보지 못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요즘은 초창기 같지 않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관객 동원에서 성공적이다. 이런 성공에 힘입어 다음은 프랑스 보르도에 있는 폐쇄된 벙커에서 새로운 콘텐츠로 관객을 맞을 예정이라고 한다. 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와 스페인 죄수들이 독일의 강제노역으로 건립한 이 잠수함 벙커는 그동안 수명을 다한 시설을 재활용한 시리즈의 연장선이다.     

프랑스에서 제작되어 제주에 온 클림트의 ‘몰입 예술’은 21세기 디지털 기술을 응용하여 사람의 감각을 최대한 만족시키며 수입을 창출하는 데 목적을 둔 문화 산업의 최전선에 있다. 이 문화 산업은 작가가 사망한지 70년이 지나면 예술 작품의 저작권이 말소되고 공공재가 된다는 사실에 힘입어 우리에게 익숙한 근대의 예술가들을 선보인다. 대형 영화와 3D 체험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감각을 자극하려면 영화만큼 강력한 시각적 쾌(快)를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잘 충족하고 있기도 하다. 동시에 클림트와 같은 과거 유럽 거장의 작품이 소비의 스펙터클이 되어 아시아의 한 섬에 올 정도로 문화는 자본의 경계를 약화시키는 최고의 수단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준다.    

필자 양은희는...

양은희는 제주에서 나고 자라 대학을 졸업한 후 미학, 미술사, 박물관학을 공부했으며, 뉴욕시립대(CUNY)에서 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9 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 <조우: 제주도립미술관 개관 1주년 기념전>, <연접지점: 아시아가 만나다> 등의 전시를 기획했으며, 여러 미술잡지에 글을 써왔다. 뉴욕을 현대미술의 눈으로 살펴 본 『뉴욕, 아트 앤 더 시티』 (2007, 2010), 『22개 키워드로 보는 현대미술』(공저, 2017)의 저자이자 『기호학과 시각예술』(공역, 1995),『아방가르드』(1997),『개념 미술』(2007)의 번역자이기도 하다. 전 건국대학교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 연구교수. 현 스페이스 D 디렉터 겸 숙명여자대학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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