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연구소 창립 30주년 기념식...“부실하게 태어난 연구소, 여러 도움으로 성장”

“4.3의 진실규명이라는 대명제를 위해 높이 들었던 4.3연구소의 깃발을 다시 한 번 세차게 휘날리도록 합시다.”

1989년 5월 10일, 제주시 외곽 서문통의 공임쌀집 2층에서 첫 발을 뗀 제주4.3연구소(이사장 이규배, 소장 허영선)가 어느덧 30년을 맞아 기념 자리를 열었다.

10일 오후 5시 아스타호텔에서 열린 창립 기념식에는 연구소의 지난 역사와 함께 했던 각계각층 인사들이 대거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제주의소리
10일 제주4.3연구소 창립 3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제주의소리

현기영 작가(초대 4.3연구소장·2대 연구소 이사장), 강요배 화백(6대 이사장), 강창일 국회의원(3대 이사장·5대 소장), 고희범 제주시장(5대 이사장), 문무병 시인(7대 이사장)을 비롯해 김명식 시인, 문창우 주교, 위성곤 국회의원, 김태석 제주도의회 의장, 이석문 제주도교육감, 양조훈 4.3평화재단 이사장, 강정효 제주민예총 이사장 등 연구소와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은 인사들이 함께 했다.

여기에 강윤형 원희룡 도지사 부인, 송삼현 제주지방검찰청 검사장, 권상대 형사2부장검사, 김황국 도의원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김황국 도의원은 4.3연구소의 첫 보금자리인 공임쌀집의 주인집 아들이라는 인연이 이날 뒤늦게 알려졌다.

이규배 이사장은 개회사에서 "4.3연구소,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떨린다는 분들이 계신다. 연구소의 전통과 유산은 그런 초창기 영웅적 주역들에 의해서 만들어졌지만, 그 이름과 과업을 계승하며 오늘에 이르도록 소리 없는 역할을 다해주신 수 많은 일꾼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라며 "아버지로부터 이어져온 일들을 그 자식들이 하고 있듯이, 30년전 4.3연구소로부터 이어져온 일들을 지금의 우리들이 하게될 것이다.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운동의 심장부였던 4.3연구소의 전통과 유산이 항상 우리들에게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제주의소리
이규배 4.3연구소 이사장. ⓒ제주의소리

참석자들은 4.3연구소의 족적을 높이 평가하면서, 아직 남아있는 과제를 위해 계속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다.

문창우 주교는 축하 인사에서 “우리 같은 신앙인이 미사를 매일 드리면서 식상해 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현재 진행형임을 상기하면서 우리의 원천과 미래를 찾고자 하기 때문”이라며 “4.3을 기억하는 것은 과거를 상기하는 것을 넘어 미래를 위한 일이다. 우리가 4.3을 기념물로 돌에 새겨 기억하는 순간 미래는 차단된다. 4.3 폭력은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암시하고, 역사를 다시 되돌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물어야 한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과 4.3연구소 30주년이 되는 해다. 진실을 향한 추적을 멈춰서는 안된다. 4.3의 진실과 명예회복이 이뤄지는 날까지 교회는 연대하고 동참하겠다”고 밝혔다.

송승문 4.3희생자유족회장은 “침묵을 강요당하던 암울했던 시기, 4.3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해 4.3연구소 회원들이 노력했고, 그 덕분에 4.3은 수면 위로 올려졌다. 금기시 했던 4.3사건을 말하지 못한 벙어리로서 한(恨) 많은 삶을 살아오던 시절에,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물꼬를 터준 현기영 선생을 비롯한 많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피력했다.

ⓒ제주의소리
왼쪽부터 문창우 주교, 송승문 4.3희생자유족회장, 김태석 의장, 이석문 교육감. ⓒ제주의소리

김태석 의장은 4.3연구소 창립 전후, 자신의 신혼집을 홍만기 전 4.3연구소 간사에게 내준 사연을 풀어내면서 “연구소의 지난 30년 성과를 바탕으로 4.3의 정명은 머지않아 나올 수 있으리라 본다”고 강조했다. 이석문 교육감은 “우리는 계속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사람이 사람다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인사를 남겼다.

4.3연구소는 1989년 창립 이후 생존자 증언집 《이제사 말햄수다 1, 2》를 시작으로 미군정보고서, 구술자료 총서, 증언 총서 등 많은 자료를 펴냈다. 1000인 증언 채록 사업, 4.3 유적 합정비 및 유해발굴 기본계획 수립, 국내외 학술행사, 제주포럼 4.3세션, 역사 교실, 4.3 연수 프로그램,  증언본풀이, 역사 기행 등 다양한 활동을 벌여왔다.

창립식에서는 현기영, 강창일, 이규배 현 이사장, 김창후 전 소장(3대·9대)이 4.3연구소의 탄생 비화를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1978년 소설 <순이삼촌> 연재 시작, 1979년 서울에서 열린 조촐한 4.3추모식(까마귀 모르는 제사) 1988년 서울·동경에서의 4.3 학술토론회, 1989년 우여곡절 끝에 제주에서 개최한 4.3 41주년 위령제, 그리고 제주사회문제협의회를 산파로 탄생한 4.3연구소까지. 네 명은 때로는 웃으면서 때로는 진지하게 고난 했던 지난 시간을 기억했다.

김창후 전 소장은 “창립 초기만 해도 김황국 의원 어머니 건물 2층 방을 빌려서 사무실로 쓰는데, 운영비도 없고 구태의연한 회보 만들 돈마저 없었다. 시퍼런 공안정치 속에 부실하게 태어냈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그러면서 탄압도 받았지만 많은 분들의 도움 속에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밝혔다.

ⓒ제주의소리
현기영, 강창일, 이규배, 김창후 초청 대담 모습. ⓒ제주의소리

김 전 소장은 1992년 다랑쉬굴 유해 발굴에 대한 사연도 풀었다.

그는 “다랑쉬굴 유해는 공개 전인 1991년 12월에 우리가 미리 발견했다. 보통 시신을 발견하면 시청이나 경찰에 신고하기 마련인데, 당시만 해도 정보기관이 아무도 모르게 치울 것 같아서 신고하지 않고 다섯 달 동안 준비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이 나중에 굉장한 탄압으로 돌아왔다”면서 “공안기관은 다랑쉬굴 유해 전체를 화장해 남김없이 바다에 던졌다. 당시 연구소 소장을 맡았던 고창훈 선생은 고생이 정말 많았다. 안기부(현 국가정보원)는 고창훈 선생을 부동산 투기 혐의로 엮어서 괴롭혔고, 결국 벌금형을 받아 2년간 제주대학교에서 직위 해제를 당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김명식 시인, 김동만 교수 등 많은 인물이 4.3으로 구속당하거나 고초를 당했다”고 기억했다.

더불어 “어려웠던 초기 시절, 고생을 마다하지 않은 연구소 식구들과 이사·운영위원들 덕분에 연구소를 지켰다. 박수를 치고 싶을 만큼 고맙다. 이 자리를 빌려 고마운 말씀을 남긴다”고 강조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완전한 해결’을 약속했는데, ‘국민의 눈높이’란 ‘국민의 의식 수준’을 의미할 것입니다. 따라서 4.3에 대한 좋은 여론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아직은 대다수 국민의 4.3에 대한 의식은 낮은 수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4.3의 진실을 모르고 있을뿐더러, 4.3의 진실을 왜곡하여 여론을 호도하는 세력이 만만찮게 존재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4.3에 대해 좋은 여론을 획득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우리의 고민이고, 연구소의 당면 과제입니다. 연구소의 초석이 되어준 회원 여러분 고맙습니다.


- 현기영 ‘4.3민중기억을 되살리는 투쟁의 길' 가운데 (제주4.3연구소 30주년 기념 헌사)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