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32) 주철희, 《불량 국민들-여순사건 왜곡된 19가지 시선》, 북랩,  2013.

주철희, 《불량 국민들-여순사건 왜곡된 19가지 시선》, 북랩,  2013. 출처=알라딘.
주철희, 《불량 국민들-여순사건 왜곡된 19가지 시선》, 북랩,  2013. 출처=알라딘.

1948년 10월, 바다 건너 제주에서 불어오는 동족의 피울음 소리에 여수는 불바다가 되었다. 순천은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

- 《불량 국민들-여순사건 왜곡된 19가지 시선》 에서

국방경비대 14연대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제주도 파병이었다. 제주4.3을 진압하라는 명령이었다. 14연대의 제주도 출병이 상부로부터 하달된 것은 1948년 10월 19일 오전 7시경이다. 그 날 저녁 14연대는 비상나팔소리에 휩싸였다. 지창수·김지회 등 좌익계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고 친일파 처단, 조국통일 등을 내걸고 봉기를 일으켰다.  

1948년 10월 19일 저녁 8시경, 14연대의 군인 일부가 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하고 비상나팔을 불어 연대 병력을 집결시킨 다음, 선동과 위협으로 봉기군에 동참하게 했다. 이들은 곧 경찰서와 관공서를 장악하고 여수·순천을 순식간에 휩쓴 뒤 곧바로 벌교·보성·고흥·광양·구례 등 전라남도 동부 5개 지방을 장악했다. 10월 22일에는 곡성까지 점령했다. 

송호성 국방경비대 사령관까지 부상당할 정도로 초기 진압작전에서 밀린 이승만 정부는 20일 열린 미국 군사고문단 수뇌부 회의에서 광주에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21일, 여순 지역에 계엄령이 발효되었다. 사흘간의 교전 끝에 이들 정부군은 25일 장갑차와 박격포, 항공기, 경비정 등을 동원해 여수를 포위해나갔고, 27일 진압에 성공했다. 여수를 빠져나간 봉기 세력은 지리산 인근으로 흩어져 그 유명한 빨치산 활동을 전개했다. 

여순사건은 진압되었고, 봉기에 참가했던 군인들은 이제 지리산 인근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정부군은 이제 남아있는 지역민들에게 그 책임을 돌렸다. 추위가 몰려오기 시작한 가을 날 여수, 순천, 그 지역에 살고 있다는 주민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운동장으로 내몰렸다.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조차 운동장에 모두 끌려 나왔다.

그 가운데 소위 손가락질 재판이 벌어지고, 즉결 처분 당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인민대회 참가했다는 이유로, 완장을 찼다는 이유로, 머리를 짧게 깎았다는 이유로, 고무신을 신었다는 이유로, 군용 팬티를 입고 있었다는 이유로 형무소에 수감되거나 총살당했다. 심지어 정부는 ‘환상의 여학생부대’라는 기사를 창작하고 활용하면서 민간인 학살을 정당화시켰다. 소위 ‘불량국민’을 양산했다.

이 결과 진압 과정에서 봉기군과는 무관한 민간인들이 희생당했고, 막대한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확인된 사망자만 3400여 명이며, 행방불명자는 800여 명, 사망자는 1만 여 명에 달할 것으로 알려져 졌다. 그러나 그 정확한 숫자는 아직까지도 알 수 없다. 

희생자의 가해주체를 보면 군경과 우익에 의한 희생이 75~90% 정도이다. 좌익에 의해서도 분명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그 숫자는 군경과 우익에 의한 희생비율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좌익에 의한 학살의 잔악성만 알려져 있다.

누가 얼마나 죽였는지를 따지는 자체가 모순이다. 그렇지만 정부와 국군 특히 보수우익에서 주장하는 근거가 매우 희박함을 알 수 있다. 참으로 마주하기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군가 경찰의 잔인성이 좌익의 잔악성으로 포장되었다. 역사의 왜곡으로 불량 국민을 양산했고, 국민들을 현혹했다.

좌익에 희생된 사람들도, 우익에 희생된 사람들도 세상을 잘못 타고 난 것이 죄였다. 
 

- 《불량 국민들-여순사건 왜곡된 19가지 시선》에서, 286-287쪽.

미군의 협조로 진압에는 성공했으나 이 사건은 신생 이승만 정부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여순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권은 정치 불안이 깊어지는 가운데 좌익세력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경쟁자들, 그리고 민중을 탄압하는 체제를 강화했다. 이승만 정권을 가장 크게 위협했던 것은 여순사건을 계기로 일부 지역에서 일어났던 유격투쟁이었다. 여순사건에서 빠져나온 봉기군인들은 장기적·조직적으로 저항할 목적으로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시작했다. 이 밖에도 지리산·오대산·태백산 지역에서 빨치산 투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1949년 군과 경찰이 겨울을 이용하여 대토벌을 벌임으로써 빨치산 활동은 이듬해 초 거의 사라졌다. 

이승만 정부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빌미로 1949년 12월 식민지 시대 때 만들어진 치안유지법을 그대로 살린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무제한적인 탄압을 제도화시켰다. 군사조직 형태인 학도호국단을 학교마다 만들었다. 해방 공간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되었던 각 지방의 인민위원회, 좌파청년단체, 전평, 전농 등 대중조직에 관계했던 인물들을 국민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시켜 감시·탄압했다. 

또한 대대적인 숙군을 단행, 좌익계와 광복군계를 포함한 모든 반이승만 성향의 군인을 제거해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하게 되었으며, 미국은 이 사건 이후 대한군사지원을 훨씬 강화했고 주한미군철수를 1949년 6월로 연기했다.

여순사건은 지금까지도 뜨거운 감자이다. 핵심은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군인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제주4.3과 구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4.3은 특별법이 제정되어 진상규명과 대통령 사과에 이르기까지 탄탄한 명예회복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여순사건은 논의 자체가 제한적이다. 이는 정부뿐 아니라 지역사회도 마찬가지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는 용어에서도 드러난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여순사건 보다 14연대 반란사건을 개칭하고자 하는 주장도 있었다. 그 이유인즉 여순반란사건은 14연대 내의 남로당 계열 군인들이 일으킨 것이지 여수·순천 지역 주민들이 주동된 것이 아니므로 명칭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봉기 세력과 구별하고 싶은 것이다. 학살과 학살 이후 오랜 고통 속에 살았던 지역 주민들의 아픔이 느껴지지만, 안타까운 주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순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대한 걸음은 제주4.3에 비교하면 더디고 힘겨워 보인다. 진상규명세력 내부에서도 이견이 많고, 특별법 제정이라는 공적 무대로 가는 길목 길목마다 어려움이 산재해 있다. 물론 4.3 진상규명운동세력이 특별법 제정을 위한 하나의 노력과 비교하면 안타깝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순사건에 빚을 지고 있다. 

여수 시내와 주요기관을 장악한 제주토벌출동거부 병사위원회는 여수일보를 여수인민보로 제호를 바꿔 <애국 인민에게 호소함>의 성명서를 냈다.

……모든 동포들이여! 조선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하고 제주도 출병을 거부한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싸우는 인민의 진정한 인민의 군대가 되려고 봉기했다.……

그 젊은 병사들은 동족을 죽일 수 없다는 일념으로 봉기를 일으켰다. 그 날 군대가 여수항을 떠나 제주로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잔혹한 영상이 떠오른다. 물론 안타깝게도 그 봉기가 갔던 길목에서 또 다른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상황을 낳기도 했다. 봉기에 참여한 젊은이들도 죽어갔다. 해방과 분단의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이념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도 있지만, 다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이념을 위한 사람들도 평범한 사람들도 모두가 역사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희생자이라 해서 진실을 찾는 여정이 생략될 수는 없다.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은 과거청산의 기본 수순이다. 기본이 생략되고 역사의 희생자로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순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그들의 걸음은 힘겨워 보인다. 우리가 이제 손을 내밀 때이다. 동족의 가슴에 총을 쏠 수 없다는 그 마음을 제주가 기억하기를 같이 다짐해 본다.    

▷ 양정심

현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
전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학술위원장.
전 고려대, 대진대,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
한국현대사를 공부하며 제주4.3과 한국전쟁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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