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119. 외로운 나무에 외동백

* 웨로운 : 외로운
* 낭 : 나무의 제주방언
* 웨돔박 : 외동백, 돔박낭, 동백나무

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서 있는데, 그 나무에 열매라곤 딱 하나다. 외로운 풍경을 그림처럼 그리듯이 표현하고 있다. 속담의 표현이 독특함을 자아내고 있어 인상적이다.

하나만은 외롭다. 사람이나 동물, 식물의 경우가 매한가지다. 하나는 외톨이이기 때문이다. 동백나무가 다른 나무들에서 떨어져 외따로 우뚝 서 있어 외로운데, 바로 그 나무에 동백열매마저 딱 한 알이 달려 있다. 더욱 외로워 보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무려면 왕성한 동백나무에 열매(돔박)가 단 한 알이 달리겠는가. 우리 제주 선인들 화법 속에는 이처럼 걸쭉한 입담도 심심찮게 섞여 있음을 보게 된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아무려면 왕성한 동백나무에 열매(돔박)가 단 한 알이 달리겠는가. 우리 제주 선인들 화법 속에는 이처럼 걸쭉한 입담도 심심찮게 섞여 있음을 보게 된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한데 이것은 단지 나무의 모습이 아닌, 사람의 경우를 빗대어 하는 말이어서 묘미를 느끼게 된다. 자손이 귀한 혈통이어서일까. 사고무친해서 홀로 외로이 살아가는데 그 후손들마저 외자식으로 아슬아슬하게 대를 이어 가는 집안 이력을 말하고 있다.

오늘날엔 별로 쓰이지 않지만, 옛날 독자(獨子)의 외로운 처지를 비유할 때 흔히 쓰였던 말이다. 손이 귀한 집안에 대(代)가 끊기면 양자를 데려 대를 잇던 시절엔 이렇게 외톨이 신세일 때, 더욱 초라하고 처량했을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었으리라.

외로운 집안에 독자는 그야말로 외톨이 신세다. 사고무친(四顧無親)이 아닌가. ‘顧’ 자가 헷갈릴 수 있다. ‘돌아볼 고’다. 그러니, 풀이하면 사방을 돌아보아도 친척이 없다 함이다. 아무리 보아도 의지할 만한 사람이 도무지 없는 경우를 일러 사고무친이라 한다.

‘웨로운 낭에 웨돔박’은 이를테면 다소 과장됐다고 보는 것이 맞다. 아무려면 왕성한 동백나무에 열매(돔박)가 단 한 알이 달리겠는가. 우리 제주 선인들 화법 속에는 이처럼 걸쭉한 입담도 심심찮게 섞여 있음을 보게 된다. ‘웨로운’이라 하면서 나무의 몸집을 최대한 빼 놓아야 실감이 날 것 아닌가. 놀라운 표현 기법이다.

나무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나무 중에 종종 사고무친 하면 빼놓지 못하는 나무가 있다.

은행나무다. 다른 나무들은 오랜 세월을 지나오며 진화해 친척이 많은데 은행나무는 그렇지 못하다.

5월의 여왕이라는 장미만 보더라도 종류가 수백 가지에 이른다. 주변에 찔레꽃, 해당화뿐만 아니라 매화꽃, 벚꽃까지 그 피붙이 곧 일가친척이 수두룩하다. 심지어 은행(銀杏), ‘은빛 나는 살구’라고 하면서 이름을 빌려준 살구나무(杏)까지도 장미과 꽃이다.

은행나무는 중중다리도 아닌, 완전 외톨이다.

주변을 눈 씻고 둘러봐도 피붙이가 하나도 없으니 사고무친이란 말에 딱 어울리는 것이 은행나무다.

은행나무는 스스로 독을 내뿜으며 다른 나무들과 거리를 두고 혼자서 외롭게 살면서도 사람들이 없는 곳에는 살지 않는다고 한다.

지구에 생존하는 나무 중에 은행나무는 최고참이다. 그러니까 중생대(中生代), 지금으로부터 3억 년 전쯤에 가장 번성했다 한다. 소철, 메타세쿼이아와 함께 오랜 세월을 변함없이 버텨 온, ‘살아있는 화석’이라 할 수 있다.

6~70년대엔 나무에 벌레들이 들끓었다. 학생 때 송충이를 잡으러 소나무가 우거진 야산으로 소풍 아닌 소풍을 가던 기억이 날 것이다. 학교에서도 나무 그늘에 가면 머리와 어깨 위로 송충이가 뚝뚝 떨어지고 교실 안까지 스멀스멀 기어 다녔지 않은가. 한데 딱 한 군데, 은행나무 아래만은 깨끗했다. 그래서 아이들이 은행나무 밑에서 많이 놀았다. 지금도 가을날 노란 황금색 단풍잎 우수수 떨어질 때 어디서나 마음 놓고 앉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은행나무 밑이다.

그런 은행나무가 사고무친이라니, 나무에게도 운명이 있는 모양이다.

전국적으로 통용되는 속담이 있다. 

‘서 발 장대로 휘둘러도 거칠 것이 없다.’ 

곧 기다란 장대로 휘둘러대도 사방에 걸리는 사람 하나 없을 만큼 외롭고 고독하다는 말이다.

유사한 성어에, 혼자 고립돼 도와 줄 사람이 전혀 없다는 ‘고립무원(孤立無援)’, 적군 속에 고립된 성과 서산으로 지는 해라 한 고성낙일(孤城落日)이 있다.

특히 고성낙일은 세력이 다해 의지 가지 없이 된 외로운 처지를 고립된 성과 서산으로 기운 해에 빗대 처량함을 한껏 자아낸다.

말 그대로 ‘웨로운 낭에 웨돔박’의 신세가 아닌가. 요즘 젊은이들 결혼을 필수 아닌 선택이라 하고, 출산을 해도 하나를 고집한다. 그들이 이 속담을 듣는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당연한 일이라 할까.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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