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홍의 세상 사는 이야기] 68. 저승에 있는 안회를 불러오고 싶다

안회는 공자가 가장 총애하던 수제자였다. <논어> 전편을 통해 요절한 안회에 대한 공자의 회상이 상당부분을 차지한 것을 보면, 공자의 학문은 안회와 더불어 죽은 것이다. 

그 안회가 공자 앞에 나와 하직 인사를 드렸다

“어디로 가려는가?”
“위나라로 가려 합니다.”
“왜?”

“위왕은 점점 도리에 벗어난 짓을 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을 사지로 내몰고 있으면서도 반성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선생님은 어지러운 나라야말로 우리들이 일해야만 할 곳이라고 말씀한 바 있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어지러운 것을 바로잡기 위해 전력을 다할 작정입니다.”

안회. / 출처= 중국 바이두
안회. / 출처= 중국 바이두

권력자는 비판자들의 발언을 ‘나를 알지 못하는 것들의 잠꼬대’라고 흘려들을 것이다. 하지만 제주 속담에 ‘애기업게 말도 귀 담아 들어라’는 게 있다. 애기업게 말을 들은 여·몽 연합군이 탐라에 주둔하고 있던 김통정 장군의 삼별초군을 무너뜨렸다. (필자는 애기업게의 심정으로 펜을 들었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말했다. “권력은 천사도 타락시킨다.” 

아무리 선량한 인간이라도 권력의 맛을 보면 타락하게 된다. 베이컨은 또 ‘동굴의 우상’을 경계하라고 했다. 편견으로 동굴 속에 갇힌 인간이 되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하는 오류를 지적한 것이다.

거의 모든 권력자가 빠지는 세 가지 함정이 있다. 독선·독단·독주의 3독인데, 권력자의 치명적인 오류는 자신이 3독에 빠져 있는 줄 모르는데 있다. 그런데 불교의 3독(三毒: 탐·진·치)과 권력자의 3독은 닮은 점이 많다. 자신을 해치고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을 해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필자가 보기에 현 집권 세력이 지닌 2개의 콤플렉스는 메시아 콤플렉스와 마돈나-창녀 콤플렉스이다. ‘자기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메시아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한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행위는 전형적인 메시아 콤플렉스다. 민주당 대표가 ‘20년 집권론’을 말하는 것도 이 콤플렉스의 발현이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세상과 사람을 마돈나(성모 마리아)와 창녀로 가르는 난센스 같은 이분법을 ‘마돈나-창녀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내 편이 아니면 적이고, 나만 선하고 상대는 악이라는 도덕적 우월감은 대체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 ‘조삼모사’의 비유가 나온다.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어리석음을 빗댄 것이다. “진실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라 확신이다”고 한 니체의 말은 확신의 위험성을 경고한 것이다. 집권 세력은 확신, 그것도 그릇된 확신의 사슬에 묶여 있는 것 같다. 북한 비핵화, 평화, 통일 … 언젠가 이룩해야 할 겨레의 소원이지만 큰일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게 아니다. 확신으로 성급히 밀어붙여 나쁜 결과를 가져오면 다시는 돌이킬 수가 없다.

은감불원(殷鑑不遠)은 멸망의 선례가 바로 전대(前代)에 있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실패를 보고 자신의 경계로 삼으라는 말이다. 

집권세력은 박근혜 대통령이 왜 탄핵을 당했는지, 잊어버린 것 같다. 그를 반면교사 삼아야 하는데, 어떤 면에선 더 나가고 있다.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킨 ‘촛불 혁명은 왜 일어났나?’ 초심으로 돌아가서 성찰하고 점검해 봐야 한다.

불행하게도 지금 이 나라엔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과 소득주도 성장, 그리고 탈원전을 꺾을 사람이나 집단이 없다.

누군가는 그런 현 정부의 태도를 몽니, 헛발질, 옹고집이라 비판 하기도 한다. 

오직 용기 있는 지식인만이 광야에 울러펴진 세례 요한의 외침 같은 사자후를 토할 수 있을 것이다.

안회가 죽었을 때, 공자는 천지 간의 빛이 다 사라진 것처럼 애통해 했다. 

“너는 나의 제자이기 이전에 친구이고 반려자였거늘….”

저승에 있는 안회를 불러오고 싶다. / 장일홍 극작가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