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제주국제대학교 공연예술학과 연극 <순이삼촌>

현기영 작가의 소설 <순이삼촌>은 첫 발표(1978)로부터 40년을 넘긴 오늘 날, 제주4.3에 대한 상징 가운데 하나로 진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았던 군사정권 시절에 4.3을 전국에 알린 계기였고, 앞선 <순이삼촌>을 따라 기억투쟁으로서의 4.3 예술 활동이 본격적으로 뒤를 잇는 자극이었다. 지난 5월 11일 4.3연구소 창립 3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송승문 4.3희생자유족회장이 “금기시 했던 4.3사건을 말하지 못한 벙어리로서 한(恨) 많은 삶을 살아오던 시절에,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물꼬를 터준 현기영 선생”이라는 찬사를 보낸 것도 그리 어색한 일이 아니다.

문학으로서 <순이삼촌>은 이미 수많은 평가와 조명이 이뤄졌지만, 다른 장르로는 그만큼의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원작이 지닌 무게와 존재감이 예상컨대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다른 예술로 전환한 대표 사례를 꼽아보면 지난 2006년 임원식, 임종호, 임종재 3부자 감독에 의해 영화화가 추진됐다. 안타깝게도 영화 제작은 결국 무산됐다. 2013년에는 제주 출신 김봉건 연출이 연극으로 제작해 서울·제주 등에서 공연했다. 당시 배우 양희경이 출연하며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순이삼촌이 연극 무대에 올랐다. 5월 30일부터 6월 1일까지 공연한 제주국제대학교(국제대) 공연예술학과 학생들의 <순이삼촌>이다.

국제대 공연예술학과의 <순이삼촌>은 큰 줄거리는 유지하되, 새로운 시도를 여러 가지 더했다. 예를 들어 원작에서는 “행방을 알 길 없는” 정도로 언급하는데 그친 순이의 남편을 ‘명호’라는 이름으로 등장시키고 상당한 비중을 부여했다. 명호는 남로당·무장대와 토벌대 사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인물로 설정했다. 결국 도피자 신세가 된 명호는 아내 순이를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난다.

명호 친구 ‘석기’ 역시 창작 인물로서 주민이었다가 무장대원이 된다. 토벌대에게 보복을 가하는 적극적인 무장대 활동을 보인다.

연극 <순이삼촌>은 이런 새로운 인물과 관계 설정을 통해, 개인 간의 드라마적인 효과를 높이는데 힘썼다. 더불어 평범한 도민들의 시선도 담아내려 노력했다.

명호는 좌우 이념 상관없이 나와 사랑하는 가족의 안위가 우선인 순박한 사람이지만, 억울하게 희생당해야 했던 다수의 도민을 대변한다. 석기를 통해서는 농사나 지으며 평범하게 살고 싶던 도민들이 서북청년단이나 군경의 횡포에 맞서 왜 봉기해야만 했는지 당위성을 설파한다.

원작에서는 없던 ‘이어도’를 등장시켜 남편과 자녀를 그리워하는 순이삼촌도, 순이삼촌을 그리워하는 나머지 인물들도 모두 이어도에서 만나겠다는 개념을 삽입했다. 덕분에 보다 아련함이 배가되는 느낌이었다.

원작 소설 전반에 흐르는 음울함과 어두운 감정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이번 연극은 사뭇 이질적인 분위기다. 도입부에서 이야기의 문을 여는 원작 ‘나’의 캐릭터 변화가 분위기를 가르는 핵심이었다.

차분한 듯 때로는 신경질적인 원작 ‘나’와 달리 ‘우철(홍창현 배우)’이란 이름을 부여받은 연극 속 ‘나’는 다정하면서 자상한 흡사 모범생으로 연기했다. 소설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그 모습이 익숙하기 까지는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다.

원작의 ‘나’는 서울말에서 제주 사투리로 언어가 바뀌면서 제주인으로서의 DNA를 재확인하는데, ‘우철’은 처음부터 끝까지 서울말을 사용한다. 이와 관련해서 연출자 류태호 국제대 공연예술학과 교수(학과장)는 “서울과 제주의 차이를 보다 선명하게 보여주려는 의도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다만, 우철(나)이 동네삼촌(고모부)에게 ‘30만 중에 진짜 빨갱이가 얼마냐 된다고 생각햐냐’, ‘비무장공비가 아니라 피난민’이라고 따지는 장면에서는 서울말이 아닌 투박하고 성난 제주어라면 더욱 맛깔나게 살아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5월 30일 연극 '순이삼촌' 공연을 마친 제주국제대 공연예술학과 학생 출연진들. ⓒ제주의소리
5월 30일 연극 '순이삼촌' 공연을 마친 제주국제대 공연예술학과 학생 출연진들. ⓒ제주의소리

박주난 배우는 여러 감정 변화를 소화해야 하는 순이삼촌 역을 최선을 다해 연기했다. 다만, 우철과 마찬가지로 원작 순이삼촌에서 느끼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해석이 종종 나오는 경우가 눈에 띄었다.

대표적으로 ‘나(우철)’가 순이삼촌에게 토마토주스를 권하는 장면. 원작의 경우, 순이삼촌의 신경과민이 극에 달하는 순간을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러나 연극은 사실상 그런 의도가 느껴지지 않는 선의로 사양하는 것 같은 미소뿐이어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원작에서의 큰할아버지, 고모부 역할을 여성 배우에 맞게 바꾸는 등 역할이 대대적으로 재조정된 것은 아마 배우 여건을 고려한 조치로 보인다. 고모부의 흥분한 평안도 사투리 연기는 쉽지 않으리라 충분히 예상 가능하지만, 통째로 빠져버리니 공백이 느껴지긴 했다. 오히려 어색한 고모부의 젊은 시절 이북 사투리는 귀엽게 웃음을 선사했다.

극 중 시간이 과거 군경 학살이 벌어지기 전 제주로 처음 향할 때, 노동요를 부르고 어깨춤을 추며 즐겁게 밭일을 하는 도민들이 등장한다. 이런 장면은 제주 지역 극 작품에서 굉장히 흔한 클리셰(clich)다. 평온하고 행복한 공동체가 외부의 침입으로 깨졌다는 것을 부각시키는 효과도 있는데, 꼭 이런 방식을 고집해야 하는 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노동요는 즐거워서 부른다기 보다 노동의 고단함을 노래라도 부르며 잊기 위한 위안이라고 보는 게 현실에 가깝다. 담백하면서 기억에 남는 다른 방법은 없을지, 비단 이번 <순이삼촌>만의 고민은 아니다.

원작의 고모부는 연극에서 ‘이성’이란 이름으로 역할이 대폭 줄고 짧게 등장한다. 학살의 현장에서 아내를 찾는 모습은 부부가 함께 이동했다는 원작과도 맞지 않고, 인물의 극 전체 비중을 따져 봐도 어색함이 크다. 올해 2월 초연한 4.3 창작 연극 <잃어버린 마을>의 구성과도 유사해, 사족이라는 생각이다.

순이삼촌이 나(우철)의 입맛과 다른 밥을 지어주는 장면이나, 학살 포함 극의 진행이 빠르게 전개되는 말미 등은 최소한의 설명이 빠지며 관객에게 부담을 안겨줬다. 소설 <순이삼촌>을 보지 않은 사람도 연극 관람으로 충분히 이해되도록 하는 배려가 필요해보인다.

원작과 달리 연극에서는 우철의 아내 ‘인희’가 남편과 함께 제주에 내려온다. 우철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인희에게 “도민할인”을 강조하는데, 도민할인은 2003년 10월 26일부터 아시아나항공이 처음 도입한 혜택이다. <순이삼촌> 속 시간(1980)과는 맞지 않는 오류이기에 바로 잡아야 옳다.

앞서 말했듯이 연극 <순이삼촌>은 전문 극단이 아닌 배우를 꿈꾸는 학생들의 작품이다. 아쉬움 보다는 가능성에 주목하는 편이 타당하다. 더욱이 국제대 공연예술학과는 제주에서 유일하게 연기 관련 학과이다. 본교의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학과장 류태호 교수를 비롯해 지역 예술인들이 강사진으로 참여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순이삼촌>을 선택한 과정은 현기영 작가의 제주 강연장을 교수와 학생들이 직접 찾아가 설명하고 설득을 구했다고 한다. 내용이나 의미 모든 면에서 만만치 않은 원작을 골랐다는 용기, 공연을 준비하면서 원작 소설을 읽고 4.3의 참상을 깊이 고민하는 과정에 박수를 보낸다.

국제대 공연예술학과는 <순이삼촌>에 이어 6월 4일부터 5일까지 연극 <리어왕>을 공연한다. 영국 출신 세계적인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가운데 하나로 불리는 작품이다. 현기영에 이어 셰익스피어까지 도전하는 행보가 흥미로우면서 대담하다. 연극에 관심 있는 도민들에게도 경험의 폭을 넓히는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국제대 뿐만 아니라 고등학생 연극부, 청소년 동아리, 일반 극단도 <순이삼촌> 혹은 다른 4.3 문학 작품에 도전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연극·뮤지컬 <순이삼촌>이 나올수록 4.3 앞에 놓인 인식의 벽도 그만큼 낮아지리라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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