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깊이 다가오는 노래...최정숙 뮤지컬의 가능성
가슴 깊이 다가오는 노래...최정숙 뮤지컬의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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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3.1운동 100주년 창작뮤지컬 '최정숙-동 텃저, 혼저 글라'
'최정숙' 4일 공연을 마치고 배우들이 무대 인사를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4일 '최정숙' 공연을 마치고 배우들이 무대 인사를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제주도 천주교구의 3.1운동 100주년 창작뮤지컬 <최정숙-동 텃저, 혼저 글라>(최정숙)가 3일부터 5일까지 제주아트센터에서 성황리에 공연됐다. 연출 이충훈, 극본 이은미다.

이 작품은 제주 출신 교육자 겸 의사 최정숙(1902~1977)의 생애를 그린다. 종교계, 특히 기독교회의 극 공연 작품은 그리 어색한 일이 아니다. 지난 2월 27일 제주도 기독교교단협의회는 제주성안교회에서 창작 뮤지컬 <그 날>을 공연한 바 있다. 조천리 출신 김창환 학생을 주인공으로 조천만세운동을 조명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제작한 <그 날>처럼 <최정숙> 역시 같은 역사를 기념하고자 제주도 천주교구가 의욕적으로 뛰어든 작품이다. 제작비는 문화체육관광부, 제주도 지원 예산을 포함해 2억6000만원 이상이다. 뮤지컬 예산으로는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제주시 창작 뮤지컬 <만덕>만 해도 초연 제작비로 7억원을 투입했다.

<최정숙>은 장·단점이 명확하게 드러난 작품이었다. 

노래는 가장 큰 장점으로 꼽을 만 하다. 희망과 절망을 넘나드는 최정숙의 일생과 잘 어울리게 제작했다. 대표적으로 핵심 곡이면서 피날레를 장식하는 <베아트리체의 꿈>은 흡사 최신 성가 느낌인데, 늙은 최정숙의 마지막 독백과 어우러지면서 공연이 끝나도 멜로디가 한동안 입가에 맴돌았다. 

<최정숙> 노래는 38세 젊은 음악인 '윤순'의 작품이다. 영화 <그 사람 추기경> 작곡과 뮤지컬 <사도 베드로> 음악감독 등을 맡았고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알려졌다. 덕분에 신앙인 최정숙의 감정을 잘 살려낸 것 같다.

공연 노래는 배우들의 놀라운 역량으로 힘을 얻었다. 여성 솔로, 여성 2인조, 남녀 혼성 3인조(여 2·남 1), 여성 6인조, 남녀 혼성 10인조 등 수시로 변화하는 구성에도 젊은 배우들의 목소리는 관객을 압도하는 힘을 유지하며 노래를 소화했다. 특히 김유현(강평국 역), 홍유진(고수선 역)은 연기나 노래 실력 모두 조연 이상 존재감을 뽐냈다. 주인공 역의 박신영은 노래뿐만 아니라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는 분장과 연기로 최정숙의 삶을 재현했다.

<최정숙>은 수녀를 꿈꾼 유년 시절부터 3.1운동에 투신한 경성 유학, 교육자의 길까지 한 개인의 일생을 압축해서 그린다. 그 속에서 또래 남자 노덕만(고민재 배우)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켜 더욱 극적인 효과를 노렸다. 노덕만은 경성 태생으로 아버지 일 때문에 제주에 내려와 최정숙과 만난다. 노덕만의 마음은 최정숙을 향하고, 최정숙은 ‘주님’을 향한다는 대사에서 둘 사이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노덕만도 3.1운동에 참여하지만 가혹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일제에 협력한다. ‘친구들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에 동료를 경찰에 넘기는 ‘세작’ 짓도 마다하지 않는다. 광복이 되자 움츠러드는 듯하더니, 경찰로 변신해 4.3 때 제주도민들을 탄압한다.

이런 배경을 고려할 때 노덕만은 친일 경찰에서 대한민국 경찰로 변신하며 온갖 악행을 저지른 친일반민족행위자 노덕술(盧德述)이 유력한 모티브다. 현실에 굴복하고 나아가 변질한 노덕만의 캐릭터는 올곧은 최정숙과 대비를 이룬다.

<최정숙>은 노덕만을 활용해 제주4.3이란 역사를 함축적이면서 강렬하게 표현했다.

붉게 타오르는 커다란 배경화면과 극장 안을 울리는 사람들의 고통스런 신음소리. 노덕만은 비참하게 오가는 도민들 사이에 선다. 일제강점기 시절 입었던 옷을 벗고 어느새 경찰 정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동료를 고문하며 외쳤던 “덴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 대신 “대한민국 만세”를 두 손 들어 외친다. 비열하면서 냉소적인 표정으로. 이 장면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4.3의 학살, 고통, 원인을 응축한 무척 인상적인 연출이다. <최정숙>은 극 초반 해녀에 대해서도 짧게 다루는데, 노동요를 부르며 행복한 모습 대신 육지 상인에게 수탈당하는 설정으로 현실을 반영하려 노력했다. 

작품에서 가장 큰 비중은 3.1운동이다. 모임을 조직해 준비하는 단계부터 모두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감정의 폭발, 그 뒤 이어지는 고문과 탄압. 여기에 노덕만의 배신까지 더해 상당한 분량을 들여 집중력 있게 3.1운동을 다룬다.

그에 반해 4.3 이후부터의 진행은 다소 맥이 빠진다. 강렬함을 남긴 4.3 장면 이후, 무대는 쾌활한 노래와 함께 최정숙 교사의 활약상으로 넘어간다. 전혀 다른 성격으로 곧장 넘어가는 감정 전환은 관객 입장에서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실제 최정숙은 1946년 45세 나이로 신성여자중학원 교사, 1949년 9월 1일 같은 학교 교장으로 근무한다. 작품에서 4.3 장면 다음에 이어지는 최정숙 교사 장면을 보면 경찰이 권총으로 위협하며 최정숙을 연행한다. 이때 중년 학생은 “48년 때처럼 다 죽이려고 하냐”는 식의 대사를 남긴다.

최정숙이 생전 ‘제남신문’에 기고한 <내가 걸어온 길>에 따르면, 4.3 당시 본인이 회장을 역임한 제주읍부녀회가 좌익 성향의 부녀동맹으로 오해받아 군기대에 끌려간다. 즉결 처분 당할 위기까지 놓였지만 송요찬 당시 계엄사령관(9연대장)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 이를 계기로 박경훈 제주도지사와 2주간 도민 선무강연에 참여한다. 선무강연은 일종의 홍보성 강연이다. 목숨은 건졌지만 집이 불타는 피해도 입었다.

결국 실제 역사와 비교하면 최정숙의 연행 장면은 학살이 한창 진행 중이던 4.3 한복판이어야 맞다. 즐겁게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실은 어울리지 않고, “48년 때처럼 다 죽이려고 하냐”는 대사와도 맞지 않다. 4.3 당시 학살은 몇 년에 걸쳐 이뤄졌기 때문이다. 창작의 영역으로 이해하려 해도 ‘지금 무대가 어느 시점인지’ 한참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이런 개연성뿐만 아니라 앞선 3.1운동 탄압 장면과 겹치며 기시감까지 들지만, 최정숙 연행 장면은 노덕만과의 조우를 통해 주인공을 돋보이게 만드는 역할이다.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노덕만 앞에서 최정숙은 늘 그렇듯 변치 않는 신앙심과 의지를 보인다. 마치 빛과 어둠처럼 선명한 대비를 이루며 최정숙의 존재감은 더욱 커진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 치켜세우기 보다는 인간적인 고뇌를 조명하는 편은 어땠는지 사족을 더해본다. 참고할 만 한 역사도 존재한다.

앞서 송요찬 사령관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최정숙은 제주에서 평범한 집안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고위 관료를 지내고 초대 제주지방법원장, 군수, 정치인으로도 활약한 최원순이다. 최원순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의 친일파 관료 1207명 가운데 하나다. 4.3 당시 불탔다는 집도 대표 친일파 박영효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친일파 아버지와 수도자처럼 헌신한 딸. 분명한 사실이지만 아이러니한 대조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3.1운동 당시 투옥 전과로 인해 평생의 꿈이었던 수녀를 포기해야만 했던 순간, 노쇠한 나이로 교육자로서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면서도 “나의 꿈을 꺼뜨리지 않게 해달라”고 신에게 자비를 구하는 장면에서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다.

노래는 감명 깊었지만 대사는 대사, 노래는 노래 식으로 명확히 구별되는 진행이 대다수여서 시간이 지날수록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예를 들어 수녀원 입소를 거부당하는 장면은 인물의 일생일대 소원이 좌절당한 중요한 순간이다. 이 때 감정을 충분한 시간을 들여 독백으로 풀어내고 노래로 이어져도 납득이 될텐데, 짧은 대사 이후 곧바로 노래로 넘어가버려 급하게 느껴졌다. 후반부 노덕만과 최정숙의 1대 1 장면 정도를 제외하면, 노래와 대사가 함께 묶인 방식은 드물었다. 

공연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노래와 군무는 길이 때문인지 간결하게 막을 연다기보다는 늘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배우들의 몇몇 춤 동작도 좋게보면 신선했지만 낯선 감이 없지 않았다. 무대 세트나 소품은 딱 필요한 최소한으로 갖춘 듯 아쉬웠는데, 이는 넉넉하지 않은 제작비와 연관이 있다고 추측해본다. 

제주어 대사는 시도까진 좋았으나 현지 제주인들이 사용하는 억양, 용어와는 동떨어진 마치 ‘서울 제주어’처럼 들렸다. 그래서 의외의 장면에서 관객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최정숙>은 몇 년 사이 제주 안에서 만들어진 뮤지컬 가운데 잠재력이 가장 높은 작품이라고 본다. 일제강점기, 3.1운동, 해방과 4.3, 한국전쟁 등 혼돈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하고, 다루지 않은 개인사까지 포함하면 흥미로운 연출을 구현할 소재 거리는 비교적 많은 편이다. 초연 무대는 이런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다만, 투자 비용을 고려할 때 종교 기관(천주교 제주교구)에서 주최·주관한 만큼 다음 무대 여부는 장담할 수 없겠다. 별도 기획사(imd 가톨릭문화기획)에서 실무를 도맡은 것도 변수다.

<최정숙>은 서울 공연과 한 차례 제주 공연이 더 남아있다. 6월 26일부터 30일까지 광화문아트홀, 8월 29일부터 30일까지 제주도 설문대여성문화센터에서 공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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