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시선] 창간 특집으로 조명한 기구한 삶 “더 늦기 전에...”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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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로 몰려 끌려간 경찰서에서 세 살배기 둘째딸은 엄마가 매질을 당할 때 함께 다리를 난타당했다. 엄마 등에 업혀 있었던게 화근이었다. 살이 뜯기고 하얀 뼈가 훤히 드러났다. 전주형무소에 입소한지 20일 후 딸은 결국 세상을 떠났다. 안동형무소에서 태어난 세째딸 역시 7개월만에 하늘나라로 갔다. 엄마 뱃속에서 고문과 폭행을 함께 견뎌내기가 힘들었으리라. 4.3의 광풍 속에 남편은 이미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중산간 마을을 모조리 불태우는 이른바 초토화작전 당시 할머니에게 맡겨졌던 큰 딸은 나중에 보니 남의 집 수양 딸이 돼 있었다. 출소 후 시삼촌의 권유로 새 가정을 꾸렸으나 실종됐던 전 남편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하늘이 노래졌다. 몇 년 후 조우했을 때 전 남편은 울고불고 난리였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전 남편도 이미 재혼해서 애까지 두고 있었다. 그 역시 얼마 못가 눈을 감았다. 인천에 사는 송순희(95) 할머니 얘기다. 

A할아버지(89·서울)는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는 걸 극구 꺼려했다. 자식들에게 누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연좌제에 대한 공포가 70년 넘게 그의 입을 틀어막은 것이다. 1948년 가을 어느날, 그는 영문도 모른채 서북청년단에 끌려갔다. 농업학교 친구가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본게 죄라면 죄였다. 친구를 잘못(?) 둔 대가 치고는 너무나 가혹했다. 말그대로 죽도록 두들겨 맞은 후 법정에 섰다. 재판은 없었다. 그러고 인천형무소에 갇혔다. 그 때까지도 그는 자신의 죄명은 물론 형량조차 몰랐다. 출소 후 법원 서기로 일했지만 수감 사실이 탄로 나 쫓겨났다. A할아버지는 예나 지금이나 떳떳하다는 입장이지만, 오랜 세월 이러한 과거를 가슴에만 묻어뒀다. 부인도 몇 년 전에야 알 정도였다.

김두황 할아버지(92·서귀포시 성산읍 난산리)는 죽을 고비를 세 차례나 넘겼다. 1948년 10월 마을에 들이닥친 경찰이 주민들을 마구잡이로 죽일 때 집 뒤뜰에 굴을 파 숨어 지내면서 겨우 살아남았다. 경찰의 하부조직 격인 민보단에 있을 때 또 한번 고비가 찾아왔다. 폭도 누명을 쓴 사람이 경찰 고문에 못이겨 마을의 아는 사람 이름을 전부 대 버린 것이었다. 어김없이 모진 고문이 가해졌다. 징역형을 받고 복역중이던 목포형무소에서 탈옥사건이 발생했다. 탈옥한 400여명 중 300여명이 사살됐다. 김 할아버지는 목공소 제재기 밑에 숨어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번에는 예비검속으로 끌려갔다. 생존확률이 제로(0)에 가까웠으나, ‘4.3 의인’ 문형순 경찰서장의 관할이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천우신조(天佑神助)였다. 이후의 삶은 주홍글씨와의 싸움의 연속이었다. ‘딱지’를 지우기 위해 일부러 입대도 하고, 마을로 돌아와서는 궂을 일을 도맡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명문대 법대를 나온 아들은 빨간 줄 때문에 매번 취업이 가로막혔다. 

송석진 할아버지(93)에게 제주는 고향이라기 보다 ‘두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공포스런 존재다. 4.3 때 모든 것을 잃은 그는 쫓기듯 일본(도쿄)으로 터전을 옮겼다. 일제강점기 제주에서 소학교 4학년까지 마친 송 할아버지는 태평양전쟁에 강제징집됐다. 일본 패망 후 제주시에서 버스를 몰면서 가정을 꾸렸다. 부인과 2남1녀. 단란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집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먼 훗날 발굴된 수형인명부에 그의 죄목은 ‘내란죄’로 기재돼 있었다. 목포형무소에서 1년을 보낸 송 할아버지는 한국전쟁이 나자 곧바로 해병대로 자원 입대했다. 인천상륙작전에도 참여했다. 5년여의 군 생활 후에도 그는 제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니 돌아갈 수 없었다. 광기어린 4.3의 악몽이 그를 고향과 떼어놓게 했다. 부산에서 뱃일을 하다가 일본으로 넘어갔다. 온갖 허드렛일로 생계를 이어갔다. 새 가정도 꾸렸다. ‘한국전쟁 참전 후 왜 귀향하지 않으셨느냐’는 거듭된 질문에 할아버지의 대답은 짧고 단호했다. “제주에는 4.3이 있으니까”

[제주의소리]가 창간 15주년 특집으로 조명한 4.3생존수형인들의 삶은 하나같이 기구했다. 트라우마 때문이었을 것이다. 속으로 분을 삭이면서도 좀처럼 입밖에 내려 하지 않는 점도 빼닮았다.   

기획 의도는 한가지였다. “더 늦기 전에” 생존수형인들의 입을 통해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4.3의 실상을 전하려 했다. 

올 2월부터 5월까지 제주는 물론 인천, 서울, 안양, 그리고 일본까지 찾아갔다.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가 함께 했다. 

1월17일 제주지방법원의 ‘공소 기각’ 결정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4.3생존수형인 18명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재심 청구사건 선고공판에서 법원은 검찰의 공소를 기각했다. 70년 전 이들을 옥에 가두는 명분으로 작용한 군법회의의 위법성이 인정됐다. 사실상의 무죄 선고였다. 끈질지게 자신들을 옭아맸던 법적 멍에를 벗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판결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법원에 재심이 청구된 것은 2017년 4월19일. 공소 기각까지 거의 2년이 흘렀다. 그 사이 재심 청구에 참여했던 한 할아버지가 눈을 감고 말았다. 

공소 기각 이후 2차로 7~8명이 재심 청구를 준비중이다. 생존수형인에 이어 최근에는 수형행불인 유족 중 일부도 재심 청구에 나섰다. 수형행불인 재심의 경우 당사자들이 생존해 있지 않아 문제가 복잡하다. 유족들이 피해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생존수형인 보다 시간이 훨씬 더 필요하다는 얘기다. 물론 결과는 장담할 수 없다. 

이들에게 법원 판결이 내려지려면 또 얼마를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고령자들은 하나둘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방법은 있다. 군법회의의 불법성이 드러난 마당에 이들의 명예가 일괄적으로 회복되도록 4.3특별법을 개정하면 된다. 이미 국회에는 관련 법안이 2017년 12월19일 제출돼 있다. 

정치권도 말로는 ‘조속한 통과’를 이야기하고 있다. 여야 대표들은 올해 4.3추념식에 참석해서도 이구동성으로 특별법 개정을 약속했다.  

그 후 또 2개월이 흘렀다. 국회는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총선 정국이 되면 기대난망이다. 4.3특별법 뿐만이 아니다. 모든게 총선에 묻힐게 뻔하다. 그 총선이 10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다. [제주의소리]가 만난 생존수형인들은 평생의 한을 풀기위해 시간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100세를 바라보고 있다. <논설주간/상임이사>

* 소리시선(視線) /  ‘소리시선’ 코너는 말 그대로 독립언론 [제주의소리] 입장과 지향점을 녹여낸 칼럼란입니다. 논설위원들이 집필하는 ‘사설(社說)’ 성격의 칼럼으로 매주 수요일 정기적으로 독자들을 찾아 갑니다. 주요 현안에 따라 수요일 외에도 비정기 게재될 수 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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