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놀이패 한라산 ‘제13회 4.3평화인권 마당극제’

“공연 예술의 힘을 쩌릿쩌릿하게 느꼈다.”

6월 14~16일, 3일간 제주4.3평화공원에서 펼쳐진 <제13회 4.3평화인권 마당극제>는 사회자 폐막 소감처럼, 연기(演技)라는 공연 예술의 매력을 흠뻑 느낀 시간이었다.

시작은 함덕·덕수리 주민들의 흥겨운 풍물판굿으로 열었다. 

다랑쉬굴에서 눈 감은 4.3 희생자들, 해방 후 희망을 꿈꾼 조천중학원 학생들,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선배를 그리워하는 후배 광대,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기억해 달라’는 5.18 희생자들, 이별한 자녀들의 웃음을 대신 연기한 세월호 단원고 부모들, 끝내 귀향 못하고 일본에서 눈 감은 위안부 할머니, 10~20대 몸으로 되살아난 4.3희생자들, 땅을 잃어버린 1930년대 미국인 가족,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는 몸짓.

활짝 열린 마당 무대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와 가치로 채워졌다. 의미만 앞세우지 않았다. 극 예술이 놓쳐서는 안 될 ‘재미’까지 잡고 관객을 울고 웃기며 사로잡았다. 비바람으로 원활한 진행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런 제약을 뛰어넘는 작품으로 충분히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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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좌읍민속보존회의 공연 '다랑쉬 서우제' 한 장면.  ⓒ제주의소리

# 다랑쉬 서우제 - 모진 세월 지나 후손들의 손으로

구좌읍민속보존회는 첫 날인 14일 <다랑쉬 서우제-설운 원정 다 풀령 갑서>를 공연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4.3의 한(恨)을 간직한 다랑쉬굴 학살을 재현했다. 출연진은 전문 연기자가 아닌 주민들이다. 하지만 어느 멋진 배우, 극단 연기만큼이나 찡한 여운을 남겼다. 70여년 전 핏빛 어린 광풍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아 공동체를 복원한 그들의 후손이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를 연기한다. “살아서 만나자”는 외마디 서툰 연기가 관객 가슴 깊이 박히는 이유다. 이 작품은 지난해 탐라문화제 가장퍼레이드에서 최고상을 수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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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패 한라산의 공연 '조천중학원' 무대 인사. ⓒ제주의소리

# 조천중학원 - 전진하는 혁명 정신

첫 날 공연의 대미는 놀이패 한라산 <조천중학원>이 장식했다. 지난해 12월 초연 이후 조천중학교 포함 몇 차례 방문 공연을 했지만, 정식 공연 행사는 이번 마당극제가 두 번째다. 다시 만난 <조천중학원>은 몇몇 장면을 줄이는 등 여러 부분 손질하며 한결 매끄러워진 모습이었다. ‘기생충’, ‘적폐’ 등 현실에 맞는 유연한 대사로 공감대를 더했다. ‘우리는 나라를 지키는데, 나라는 우리를 죽이냐’는 토로처럼, 해방 이후 다른 세상을 꿈꿨던 청춘들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살아있다. 극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중요한 계기인 학생회장의 죽음은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학생회장에 대한 관객 이해와 공감을 높일 방법이 필요해 보인다. 점점 발전하는 <조천중학원>을 기대한다.

# 그 사람 - 진심은 알겠지만…

둘째 날 시작은 ‘연기하는 목수’ 여상익의 1인극 <그 사람>이다. 여상익은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 <섯알오름의 恨>, <집> 등 이전 마당극제에서도 모노드라마를 선보인 바 있다. 이번에는 마치 ‘강연’처럼 故 정공철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시를 읽고 노래를 듣고, 영상을 보고 고인의 초상화를 그리며 한 사람을 회고한다. ‘보고 싶은 선배’ 정공철에 대한 그리움은 공연 내내 뚝뚝 묻어난다. 같은 기억을 간직한 관객들도 고인의 구성진 목소리와 ‘보고싶다’는 영상 편지를 보며 감정을 공유했다. 다만, 정공철을 잘 모르는 관객 입장에게는 쉬운 자리가 아니었다.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데 집중하면서 정보가 없어 폭넓은 공감을 구하기 어려웠다. 함께 기억하고 그리워 할 수 있는 <그 사람>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이팔청춘가 - 나도 남들처럼 살고 싶었다

부산 극단 자갈치의 <이팔청춘가>는 배우 홍순연이 일본군 위안부 故 강순애 할머니의 지난한 삶을 재현했다. 홍순연은 지난해 정공철광대상 수상자의 명성에 걸맞게 넘치는 끼와 연기력을 뽐낸다. 비행사 안창남과 자전거 선수 엄복동 이야기를 구성지게 풀어내고, 걸걸한 경상도 사투리로 관객에게 함잡이 오징어 가면을 씌우며, 덩실덩실 춤사위에 김추자 노래를 부르니 객석도 들썩거린다. 흥겨운 분위기는 80세 노인이 아픈 기억을 꺼내면서 점차 차분해진다. 나무의자에 앉아 “나도 남들 같이 살고 싶었다”, “나도 꿈이 있었다”고 구슬프게 털어놓는 모습은 위안부 소녀상과 겹치면서 관객을 한 없이 숙연하게 만든다. 유쾌하고 들뜬 감정에 뒤따르는 독백은 무겁고 깊이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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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패 신명의 공연 '언젠가 봄날에' 무대 인사. ⓒ제주의소리

# 언젠가 봄날에 - 울고 웃기는 마당극의 힘

‘Since 1982’ 광주 극단 놀이패 신명은 5.18 당시 희생자들이 ‘불법체류 귀신’이 됐다는 설정이다. 차마 저승으로 떠나지 못하는 청년 시민군, 여고생, 멋 내기 좋아하는 남자 세 사람을 위해 저승사자는 이승에서 그들의 한을 풀어준다. 작품은 뚜렷한 인물 개성에 맛깔 나는 전라도 사투리를 장착해 빈틈없는 진행을 자랑한다. 특히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는 늙은 무당 역의 배우는 막강한 입담과 연기로 무대를 들었다 놨다 활약한다. 초중반 코미디 분위기는 서서히 비통한 분위기로 연착륙한다. 작품은 살아서 기다리는 자, 죽어서 기다리는 자 모두의 한을 위로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보상을 받는다고, 유공자가 된다고 가슴 속의 못이 뽑히겠냐”는 무당의 울음은 비단 5.18 만의 것이 아니다. 웃기고 울리며 관객을 쥐고 흔드는 마당극 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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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리본의 공연 '장기자랑' 무대 인사. ⓒ제주의소리

# 장기자랑 - 웃고 있기에 더 슬픈

4.16 가족극단 노란리본은 세월호 참사로 자녀를 잃은 엄마들이 모여 시작한 극단이다. 출연진 7명 가운데 엄마 6명 모두 원치 않은 운명으로 연기자가 된 셈이다. <장기자랑>은 수학여행을 앞두고 장기자랑을 연습하면서 싸우고 화해하며 돈독해지는 여고생들 이야기다. 다소 부담스러운 교복처럼 엄마들의 연기는 어색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어색함은 점점 옅어진다. 10대들의 언어나 분위기, 인터넷 유행(Meme)을 잘 살리려 노력한 덕분이다. 몸과 말이 따로 노는 불균형은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작품은 세월호의 ‘ㅅ’자도 나오지 않는다. “제주야 기다려라”라고 배우들은 즐겁게 손을 흔들지만 관객은 차마 웃을 수 없다. “우리는 아프지 않다”는 마지막 밝은 노래가 꽤 길게 가슴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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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정공철광대상을 수상한 극단 돌의 김기강 배우. ⓒ제주의소리

# 캐러멜 - 이게 광대다

올해 마당극제에서 유일한 해외파인 ‘극단 돌’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이야기를 준비했다. 재일교포 3세 김기강은 무대 위에서 총 5명을 연기한다. 위안부 할머니 홍옥순과 김숙기, 오사카 조선고급학교 여학생 강령미, 중년남성 히라야마 미쓰오, 홀로 아이를 키우는 젊은 여성 이토 기미코. 여기에 홍옥순, 김숙기의 10대, 50대, 90대 시절도 소화하니 그야말로 종횡무진이다. 홍옥순은 위안부로 끌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서 홀로 평생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 유일한 친구였던 김숙기는 그의 시신을 손수 수습하고 장례를 치르면서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과거를 들려준다. <캐러멜>은 중반부까지 다소 느린 속도로 진행한다. 장례 절차를 차례로 이어가면서 음복주인 소주도 실제로 한 잔 마시고 유머도 섞어 조금씩 풀어내는 방식이다. 위안부에 대한 정보도 마찬가지. “속아서 끌려갔다”는 언급에 그친다. 서서히 쌓인 감정은 장례를 마치고 난 뒤, 본인 경험을 세세하게 들려주는 말미 들어 거세게 몰아친다. “우리들이 왜 이렇게 살아야했냐”, “똑바로 사죄하라”고 울부짖는 배우도, 지켜보는 관객도 격한 떨림에 눈물로 통곡한다. 그 순간 김기강은 ‘배우’가 아니었다. 무대를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 만큼 적나라하게 위안부 고통을 묘사하고, 한 편으로는 할머니들이 염원한 엄마로서의 삶을 연령대 별 자녀 옷으로 보여준다. 같은 비극이어도 농도를 달리하는 연기는 인상 깊다. 아픈 사연을 캐러멜이라는 상징물에 담아내는 구성 역시 마찬가지. <캐러멜>은 올해 정공철광대상으로 김기강을 선택하는데 고민의 여지가 없을 감동적인 무대였다. 김기강은 1999년 제주를 찾아 놀이패 한라산 그리고 정공철과 인연을 맺었다. 극단 돌은 2004년 결성해 시가현 히코네시를 근거지로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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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모닥치기의 공연 '마당뮤지컬 헛묘' 무대 인사. ⓒ제주의소리

# 마당뮤지컬 헛묘 - 가능성 꽃피는 그날 위해

제주의 극단 청춘 모닥치기는 올해 2월 선보인 마당뮤지컬 <헛묘>를 가다듬어 들고 왔다. 4.3 당시 마을 전체가 불에 타버린 안덕면 동광마을의 아픔은 4.3평화공원을 배경 삼은 야외무대에서 더욱 생생히 살아났다. 주민 피신 부분의 길이를 줄이고 동굴에서 태어난 생명을 위로하는 장면에 힘을 실어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에 주목했다. 망자 어머니와 갓난아이가 스쳐 지나가는 새로 추가한 장면은 나쁘지 않았다. 갓난아이를 거둔 삼춘 역의 배우는 초연보다 훨씬 풍부한 감정으로 오열도 마다하지 않았다. 혼신의 연기에 관객은 큰 박수로 화답했다. 동작, 대사 모두 반복하는 느낌의 피난 장면을 색다른 아이디어로 보여줄 순은 없는지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뮤지컬이란 장르를 지키고 싶다면 관객 입장에서 판단하는 노력 역시 필요하다. 청춘 모닥치기는 ‘막내’라는 처지와 놀이패 한라산과의 특별한 관계 때문에 행사 처음부터 끝까지 궂을 일을 도맡았다. 그들의 땀과 눈물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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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걸판의 '분노의 포도' 무대 인사. ⓒ제주의소리

# 분노의 포도 - 프로 극단의 진한 향기

마지막 작품은 안산 지역 극단 걸판이다. 세찬 바람이 불었지만 추위에 아랑곳 하지 않는 연기와 빼어난 완성도는 왜 극단 걸판이 ‘대학로의 블루칩’이라는 평가를 받았는지 오롯이 입증했다. 미국 소설가 존 스타인벡 원작 소설과 영화로 널리 알려진 <분노의 포도>는 농업이 쇠락하고 자본이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한 193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힘들어도 의지만큼은 굳센 ‘톰’ 가족의 방랑기다. 땅을 빼앗기면 삶과 공동체마저 빼앗긴다는 작품의 메시지는 낯설지 않다. 1988년 서울올림픽 전후 대규모 철거민들의 눈물은 갈 것도 없이, 제2공항으로 고향을 등지게 생긴 제주 성산읍 주민도 또 다른 톰 가족이다. 암전 시 퇴장하는 배우들의 몇 걸음까지 신경 쓴 섬세한 연출, 주·조연 가릴 것 없는 연기력, 발성, 노래 실력, 소품 활용, 음악 등 모든 면에서 프로 극단의 힘을 실감했다.

이번 마당극제는 비 날씨로 인해 마지막 날 <헛묘>, <분노의 포도>를 제외하면 모두 실내(4.3평화공원 교육센터)에서 이뤄졌다. 아쉽지만 마당극의 묘미를 채 느끼지 못했고 전문 극장도 아닌 장소에서 공연했지만, 의미에서나 작품 수준에서나 거를 작품이 없는 행사였다. 제주4.3, 광주 5.18, 일본군위안부, 세월호 사건, 미국 대공황 등 실제 역사이자 지금 우리 삶과 맞닿은 주요 사건을 재현하기에 작품 하나마다 메시지는 남달랐다. <캐러멜>, <언젠가 봄날에> 등 비싼 티켓 값을 지불해도 손색없을 극단들의 역량이 뒷받침됐기에 메시지는 힘이 실렸다. 

4.3항쟁의 역사적 의미와 미래지향적인 가치를 예술적으로 승화시켜내어 생명, 평화, 인권의 소중함을 함께 느끼고 일깨워나간다.

행사 주최 단체인 놀이패 한라산이 정한 ‘4.3평화인권 마당극제’의 정신이다. 생명, 평화, 인권의 가치를 느끼는 것은 참여한 배우들과 관객 모두 해당한다. 마지막 순서인 4.3평화공원 위령제단 앞에서 모든 참가자들이 참여한 ‘4.3통일굿’과 흥겨운 야외무대 풍물 마당은 참가 예술인의 마음이 하나로 이어지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4.3통일굿에는 제주의 젊은 배우들도 한 마음으로 동참했다. 관객 역시 마찬가지. 3일간 모든 공연을 지켜본 관객 입장에서 4.3평화인권 마당극제는 매해 기억해서 찾아갈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하겠다. 다양한 극 예술을 만나고 싶은 도민들에게 반가운 기회가 될 것이다. 다만, 놀이패 한라산과 함께 여러 제주 극단, 예술인의 공들인 무대도 계속 보고싶다는 바람을 남긴다. 

훌륭한 작품, 다양한 구성, 보다 나은 접근성으로 많은 관객을 불러 모으는 노력은 놀이패 한라산에게 주어진 숙제다. 예술감독을 맡은 윤미란 놀이패 한라산 대표는 “마당극제는 시대에 맞는 이슈와 주제에 따라 장소를 달리한다. 대중적인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경우는 탐라문화광장, 탑동해변공연장을 선택하곤 한다. 올해 4.3평화재단은 참가하는 젊은 배우들이 4.3에 대한 의미를 아우르는 의도를 담았다”며 “좋은 작품과 관객을 어떻게 하면 많이 만나게 할지, 그 방법은 계속 고민하겠다”고 소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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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정이 끝나고 풍물 마당에서 출연진들이 즐겁게 어우러지고 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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