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섬 숨, 쉼] 한수풀 역사문화 걷는 길을 걸으며 / 홍경희

몸도 가볍게, 마음도 가볍게, 그저 가볍게 걷고 싶었다. 걸으면서 요즘 내 삶을 감싸고 있는 많은 껍질들을 하나씩 벗겨내고 싶었다. 고교 동문회에서 주최하는 ‘한수풀 역사문화 걷는 길 걷기’를 신청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걷고 또 걷고 싶은 마음에.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거라 큰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제주시에서 한림으로 가는 길은 모르는 길이 아닌데 낯설었다. 내가 운전하고 갈 때는 머릿속에 오만가지 잡념을 가득 채우고 앞만 보며 달리느라 이런 저런 풍경들이 그저 휙 휙 지나가기만 했었다. 그런데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버스 뒷자리 오른쪽 끝에 앉아 창밖을 보니 많은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 때는 나무와 풀만 있던 곳에 사이사이 들어선 건물들. 오랜 세월 변치 않았던 곳의 모양과 무늬가 달라지고 있었다. 앞으로도 더 많이 더 빨리 달라질 수도 있겠다. 나는 그냥 아쉽고 섭섭했다.

이날 걸은 길은 켜켜이 역사의 길이었다. 고려시대 삼별초군이 들어왔다는 명월포구, 조선시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어진 명월진성, 육지로 말을 보내기 전에 잠시 대기했다던 마대기빌레, 옹포 주변에 남아있는 일제시대 통조림 공장 등이 역사 문화의 길에 다 포함되어 있었다. 길은 늘 그 자리에 있었고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삶만 변한 것이다. 내가 흥미롭게 본 공간은 마대기빌레와 통조림 공장 터였다.

한수풀 역사문화 걷는 길을 안내하는 리본. 제공=홍경희. ⓒ제주의소리
한수풀 역사문화 걷는 길을 안내하는 리본. 제공=홍경희. ⓒ제주의소리

상상해본다. 마대기빌레에는 늘 말들이 북적였을 것이다. 말들이 대기한다 해서 이름 붙여진 마대기빌레답게 말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 그런데 세상이 바뀌면서 지금은 터만 남았다. 말들은 조금씩 줄어들었을까, 아니면 빠른 속도로 없어졌을까? 나는 제주시에서 한림으로 오는 길가의 바뀐 풍경을 보며 아쉬워했는데 그 때의 사람들은 말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상상해본다. 삶은 팍팍하고 모든 것이 억눌려있던 시절, 우리가 먹어야 할 음식들이 통조림에 담겨 우리 것을 다 빼앗아가는 사람들에게로 가다니. 더욱이 그 통조림 공장의 일꾼들은 저들이 아니라 우리였을 것이다. 아 식민지 시대, 우리 삶의 촘촘한 부분까지 다 들어와 모든 것을 다 갈취해가는 것. 그 시절을 떠올려보면 지금 우리의 삶이 온전히 우리 것인 게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인지.

그러고 보니 역사는 오늘로 흐르는 이야기의 길, 삶의 길이었다. 이야기를 알면 옛날의 삶을 상상할 수 있고 또한 미래의 삶도 그려볼 수 있다. 그 길에서 중심을 잡는 것은 오늘이다. 과거를 통찰하고 오늘의 삶을 잘 살아나가면서 훗날 미래의 길에서 오늘의 길을 돌아봤을 때, ‘그때 참 그렇게 하길 잘했어’라는 말을 들어야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매사에 큰일을 결정할 때 눈앞의 작은 이익을 얻으려 하지 말고 보다 멀리 보고 판단해야겠구나. 이럴 때는 또 과거의 역사를 불러와야 한다. 지금 돌아봤을 때 잘 한 일, 아쉬웠던 일을 보면 된다.

발걸음이 가벼우니 생각의 길도 가벼웠다. 그러다 딱 만난 밭담, 그 아름다운 곡선의 돌담 안 밭에서는 기장이 쑥쑥 자라고 있었다. 길은 오래된 이야기를 품어 안으면서 현재의 일용할 양식까지 쑥쑥 키워내고 있었던 것이다. 햇볕과 바람을 친구삼아 살랑거리는 푸릇한 기장을 보니 참 좋았다. / 홍경희 제주교재사 대표(http://jejubook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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