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멘난민 1년, 그 후](1) 기자 출신의 난민지위 인정자 이스마일 씨 “환대에 감사...예멘 이해해 달라”

여전히 그들은 치열하게, 그리고 절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지난해 예멘 난민 신청자 500여명이 제주를 찾으며 논란이 불거진 지 1년. 그간 난민 수용에 대한 찬반갈등은 전국적인 이슈로 번졌고, 혼란을 틈탄 가짜뉴스도 횡행했다. 그들은 전쟁을 피해 고국으로부터 8000km를 벗어났지만 이국 땅에서의 삶도 여전히 생존을 위한 전쟁터와 같다. '난민 공포증'을 부추겼던 일각의 주장, 언론의 호들갑은 1년이 지난 오늘날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제주의소리]는 6월20일 '세계 난민의 날'을 맞아 난민사태 이후 한국사회에 녹아든 예멘인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또 제주사회가 바라보는 예멘인들에 대한 인식에 대해 세 차례에 걸쳐 다룬다. -편집자주

'세계 난민의 날'을 앞두고 만난 예멘 난민 인정자 이스마일씨. ⓒ제주의소리
'세계 난민의 날'을 앞두고 만난 예멘 난민 인정자 이스마일씨. ⓒ제주의소리

2018년 늦은 봄. 전쟁의 불길을 피해 아시아 대륙 끝자락인 대한민국까지 밀려 온 500여명의 예멘인들. 무사증 제도로 제주에 발을 디딘 이들은 '살고 싶다'는 원초적 일념으로 난민이 되길 자처했다.

그러나, 한국 땅은 이들을 맞기에는 준비가 부족했다. 난민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부추기는 루머성 정보는 일파만파 번졌고, 사실 확인도 되지 않은 뜬소문은 어느덧 진실로 둔갑해 있었다.

결국 OECD 국가 중에서도 최하위권인 한국의 난민 인정률(0.9%)은 이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됐다. 난민 신청을 한 484명의 예멘인 중 난민으로 인정된 이는 단 두 명에 불과했다. 0.4%였다.

일시적으로 '인도적 체류허가'를 받은 412명은 여전히 미래를 보장할 수 없고, 55명의 난민 불인정자들은 아직도 제주땅에 묶여 있다.

그렇다면 일각에선 마치 '선택된 이들'인 것 마냥 표현된 난민 인정자들은 한국에서의 삶이 행복했을까.

"한국의 역사를 알고 있어요. 과거 한국에서 해외로 망명을 간 할아버지·할머니 세대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있을까요? 1년을 살았지만 충분한 답변을 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시간인 것 같아요."

[제주의소리]는 6월20일 '세계 난민의 날'을 맞아 난민 허가를 받은 이스마일(31)씨를 만나 제주를 중심으로 한 한국에서의 지난 1년간 삶을 전해들었다.

예멘 난민 문제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이 쏠리면서 이스마일씨는 그간 수 많은 한국 언론에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우호적인 언론도 있었지만, 반대의 경우도 많았다. 난민으로 인정된 이후에도 생면부지의 기자들과 숱하게 마주해야 했던 그였다.

처음 마주한 그는 그만큼 조심스러웠다. 경계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왜 한국까지 오게 됐나"라는 상투적인 질문에 "내가 왜 왔겠는가"라고 되받아쳤다.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한국, 그리고 제주에서의 그의 삶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이내 이스마일씨는 어떤 고민을 안고 있는지 등 자신의 삶을 허심탄회하게 회고했다. 특히 한국 사회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다. 그의 표현을 빌어 따뜻한, 어쩌면 뜨거운 심장(Warm Heart)을 지닌 청년이었다.

'세계 난민의 날'을 앞두고 만난 예멘 난민 인정자 이스마일씨. ⓒ제주의소리
'세계 난민의 날'을 앞두고 만난 예멘 난민 인정자 이스마일씨. ⓒ제주의소리

예멘을 떠나기 전 이스마일은 예멘의 수도 '사나'에 있는 신문사 <올라>의 기자였다. 예멘 정부와 후티 반군에 대한 기사를 썼고, 전쟁에 반대하는 비판 기사를 썼다. '누군가는 진실을 말해야 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기자가 되기 전에도 그는 젊은 혁명가 집단의 지도자로서 활동했다. 수백, 수천명 앞에서 연설을 하며 예멘 청년들을 고취시켰다. 펜을 잡은 것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이었다. 

내전이 심화되면서 2015년 8월6일 <올라>는 발행을 중단하고 문을 닫았다. 내전과 관련한 비판적 기사를 썼던 언론인들이 잇따라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다. <올라>의 페이스북 마지막 포스팅은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우리의 깊은 사랑과 슬픔으로” 

이스마일도 당연히 위험에 빠졌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세력들은 그의 목숨을 위협했다.

"내 삶은 매우 위험했습니다. 그들은 기자로서의 삶을 위협하고, 언론을 통제하려 들었습니다. 누군가는 나를 죽이려고 했고요."

선택지는 두 가지 뿐이었다. 전쟁에 참여해서 반군과 함께 싸우거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예멘을 떠나거나. 이스마일의 선택은 후자였다. 그는 "싸우기를 선택한 사람들도 중요하지만 나는 나의 꿈과 인간으로서의 삶을 지켜야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을 먹고 예멘을 등진 것은 2017년이었다. 이후 아르메니아와 말레이시아 등에서 1년 3개월을 지냈지만, 비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매일을 공포 속에 떨어야 했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한국에 몸을 의탁한 것은 2018년 5월이었다. "우연한 기회와 선택들에 힘 입어 한국에 오게 됐다"는 그는 "이 곳(제주)은 이제 나의 두 번째 집"이라고 했다.

그의 기대와는 달리 한국엔 난민을 환대해주는 이들도 있는 반면 난민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다는 질문을 던졌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예멘인들을 싫어하는 분들은 문화적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역사에 대해 알게됐습니다. 주변에서 많이 가르쳐주셨어요. 한국이 단일민족이고, 피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보니 (난민을 두려워하는 것을)이해합니다. 예멘에서도 100%의 사람들이 외국인을 환영한다고 볼 수는 없었어요."

"하지만 우리도 그저 사람일 뿐입니다. 내가 한국인들을 존중하고 한국의 역사를 존중하듯이, 한국인들도 우리의 상황과 예멘사람들을 존중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세계 난민의 날'을 앞두고 제주의 한 카페에서 만난 예멘 난민 인정자 이스마일씨. ⓒ제주의소리
'세계 난민의 날'을 앞두고 제주의 한 카페에서 만난 예멘 난민 인정자 이스마일씨. ⓒ제주의소리

현재의 생활을 만족하는지 묻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제주를 사랑합니다. 내게 제주는 두 번째 집 같은 곳이에요. 짧게 육지에도 있었는데, 제주에서 많은 한국인 친구들을 사귀고, 다른 국적의 외국인들을 만나 언어와 생활상을 배울 수 있었어요. 시청(상점가)에는 한국 엄마(Korean Mom)도 있어요."

하지만, '정서적 만족'은 안정적인 생활과는 별개였다. 혹자는 난민으로 인정되면 안락한 삶을 보장받을 것처럼 인식하고 있지만 현실은 달랐다. 

나름 명성 높은 기자였고, 영어도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아는 이스마엘씨였지만, 관련된 일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몇몇 언론에 글을 싣는 등 프리랜서의 활동은 삶을 영유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귤 농장 등에서 일용직 노동을 이어갔던 그는 현재 제주의 한 해산물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있다.

"평생 카메라와 키보드 앞에서 일했어요. 저는 번역도 가능하고 직접 사람들의 이야기를 쓸 수 있습니다. 지금은 소설을 쓰고 있지만, 가능하다면 사람들의 삶의 경험을 글로 옮기고 싶어요."

한국에 바라는 점이 있는지를 묻자 손사래를 쳤다.

"바라는 것을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은 나를 받아들여 준 곳입니다."

그러면서도 한가지 바람을 전했다. "개인적인 것을 원하는 것 자체가 실례입니다. 다만, 다른 예멘 사람들도 더 많이 한국에 머물 수 있게 도와줬으면 좋겠습니다."

예멘인들을 환대해 준 제주사회에 대해서도 깊은 감사를 표했다.

"제주 사람들은 제가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제주 사람들은 우리를 비즈니스 관계가 아닌 가족처럼 대해주고 있습니다."

"난 한국을 사랑합니다. 김치, 소주, 떡볶이, 비빔밥을 사랑해요. 젓가락 사용법도 배우고 있고, 해산물 알레르기가 있지만 약을 먹어가며 문화적 적응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직접 소통하면서 서로의 문화를 알아가는게 중요한 것 같아요. 혹시 예멘에 대해 알고 싶다면 예멘 레스토랑에 와서 음식도 같이 먹어봤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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